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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어디 어디 가봤어?

여덟 번째 유럽 - 프랑스 파리 편

by 글한송이

갑자기 우울해질 때 있잖아요. 하루가 쳇바퀴 돌듯이 똑같은 방향으로, 반복적으로 굴러만 가는 느낌이 드는 어느 날. 사람이 한 번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추락할 수 있다고 해요. 저 역시도 경험해 본 것 같아요. 딱히 큰 일을 겪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심리적으로 자꾸만 위축되고, 어떤 것에도 흥미를 못 느끼겠고, 그런 순간이 있었거든요. 인간관계도 많이 어긋나기 시작했죠. 동기들은 물론이고 친동생처럼 아꼈던 후배와도 멀어져버렸거든요. 더는 늪에 빠져 지내고 싶지 않은데 피로하고, 지치고, 그래서 두렵기까지 했었어요. 아직 완전히 이겨냈다고 하기엔 불안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는 상태이긴 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쓰고 일상을 공유하고 속내를 꺼낼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고 그 공은 고마운 사람들에게로 돌리고 싶어요. 믿음으로 응원해 주시는 부모님, 8년째 변함없이 칼답인 친구 이주연, 힘들었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귀를 열어주는 동기 김민지 언니, 브런치를 소개해주신 회사에서 만난 한서윤 언니, 해외 각지로 뻗어나갔으나 틈만 나면 찾아와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소꿉친구들까지 다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부모님처럼 절대적인 믿음을 주며, 한결같고, 항상 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지금은 일 하는 중이지만 곧 집으로 돌아와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는 예쁜 동생에게 특히 감사해요. 여덟 번째 유럽 여행지, 프랑스 파리에서도 이런 동생과 당연히 붙어 다녔어요.

유로스타 런던에서 파리로

런던에서의 시간은 가슴 한쪽에 숨겨두고 파리 행 기차에 올라탔어요. 디즈니랜드 이동을 수월하게 하겠다는 일념 하에 주요 관광지에서 좀 먼 숙소를 잡은 바람에 첫날부터 피로가 쌓였죠. 캐리어 커버는 바닥에 끌려 완전히 찢어졌고, 팔에 힘이 쫙 빠지면서 자꾸만 물건들을 놓치기까지 했어요. 그런데도 깔깔대고 웃으면서 걸어 다녔어요. 날이 너무 좋아서, 호르몬이 미쳐 날뛰었던 것 같아요. 파리에서 사는 친구가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러둔 덕에 런던에서보다 경계를 안 할 수가 없었는데도, 신기하게 편안한 매력이 뿜어졌어요.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숙소도 넓고 깨끗해서 안락하기까지 했고요. 영화에서 나올 법한 예쁜 테라스가 있었는데, 마침 밖에서 공사 중이었어요. 그래도 푸른 하늘에 뜬 태양, 보랏빛 새벽하늘에 고개를 내민 달과 별들을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죠.

숙소, 루브르, 오르세

뮤지엄 패스를 개시하고, 오르세 미술관부터 찾았어요. 루브르 박물관이 위치 상으로 가장 가까웠는데, 하필이면 문을 닫은 날이었거든요. 덕분에 사람은 별로 없어서 사진 찍기엔 좋았어요. 밤에 다시 오자고 다짐했었는데, 동생이나 저나 에펠탑에 꽂혀서 에펠탑 공원만 주구장창 다니느라 멋들어진 야경은 볼 수 없었지만요. 뮤지엄 패스는 저희한테 꼭 필요한 관광 필수 준비물은 아니었어요. 고등학생 때 이과냐 문과냐 결정하면서 동시에 미술이냐 음악이냐도 선택하잖아요. 저는 문과에 음악 파였는데, 둘 다 특출 나게 뛰어나서라기 보다는, 수학이 어려웠고, 미술에는 재능이 없어서였어요. 이과 친구, 미대 친구만 보면 두 손 모아 부러운 눈빛을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음악은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학원에 보낸 덕분인지 낯설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음악회는 나름 다녔던 것 같아요. 피아노 연주회, 오케스트라 연주회 등등 즐기는 편이거든요. 하지만 미술은 정말 분에 넘치는 분야라 그런지 다들 몇 날 며칠을 돌아도 못 보겠다는 루브르 박물관을 몇 시간 만에 돌았답니다. 루브르보다 작은 오르세는 더 빨리 돌 수 있었겠죠? 여긴 포토존이 있어서 사람이 한 곳에 특히 몰려 있었어요. 오르세 미술관의 시계, 루브르의 모나리자. 그래도 다들 다른 사람이 사진 찍을 때까지 기다려준 덕에 몇 장 건질 수 있었어요. 한국인 여행객도 많이 만났는데, 저희는 숫기도 없어서 사진만 찍어드리고 도망쳤네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같이 동행도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문, 에펠탑이 보이는 샤오 궁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샤오 궁, 그리고 에펠탑까지 이어진 거리는 검은 눈동자를 화려하게 일렁였어요. 얼마나 볼거리가 많았는지 여행지마다 인증샷으로 남기려고 들고 다니던 토퍼까지 잃어버렸다니까요. 명품에 흥미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해서 아는 브랜드 맞히기 게임을 하면서 지나쳤지만, 역시나 맛집은 들어가 봐야 직성이 풀렸어요. 마카롱 가게였는데, 우연히 찾은 곳이었어요. 여행 어플 중에 트리플이라는 정보 제공 겸 일정표 활용이 가능한 앱이 있어요. 데이터를 켜고 돌아다니니까 GPS 추적으로 해당 맛집들을 쫙 검색해준 건지, 마침 저희가 앉아 쉬고 있는 부근에 유명한 마카롱 맛집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곧장 들어갔죠. 형형색색 예쁜 마카롱들이 많았어요. 오전 9시부터 쉼 없이 돌아다닌 탓에 지쳐있었는데, 달달한 마카롱을 베어 무니, 떨어진 당이 충족되면서 웃음이 터졌어요. 그냥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사 먹어도 되는데 왜 그랬나 모르겠어요. 그래도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개선문에 감탄하고, 샤오 궁에서 에펠탑을 마주하면서는 입이 떡 벌어지는 게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바토무슈 탑승기

기념품은 길거리 상인 분들한테서 구매했어요. 품질은 비슷한데 상점은 괜히 값만 부풀려 놓는다고 하더라고요. 친구 덕분에 돈 많이 아꼈네요. 파리지앵 주민환 씨에게 감사 인사 전합니다. 일주일 간 파리에서 머무는데, 박물관이나 미술관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니 이거 너무 에펠탑만 보는 거 아닌가 싶어서 바토무슈를 예약했었는데, 이거 정말 강력하게 추천해요. 선상 위 저녁 식사 등 여러 이벤트가 많긴 하지만, 저흰 학생이었고 또 직접 해 먹으려고 아파트 호텔을 숙소로 잡았던 거니까, 그저 강줄기를 따라 파리 관광 명소들을 한 바퀴 둘러보는 거면 충분했어요. 그래서 노을과 야경을 모두 보고자 밤 9시 30분에 바토무슈 선착장으로 향했어요. 정말, 몇 십만 원이라고 해도 다시 탈 생각이에요. 강 위에서 보는 에펠탑은 반짝거리고 아름다워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니까요. 다른 배에 탄 관광객들과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고, 같은 배 위 있는 사람들과 환호하고. 입꼬리가 도통 내려올 생각을 않았답니다. 분위기에 취해서, 늦은 시간임에도 에펠탑 광장으로 걸어갔어요. 사람이 많아서 위험하단 느낌도 없었죠. 에펠탑을 찾은 사람들을 상대로 열쇠고리를 파는 분들이 많은데, 시간이 늦어질수록 값이 저렴해지니까 그때를 노려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어요. 다만, 사인단이나 소매치기도 따라붙으니까 경계는 늦추지 마시고요. 한국인 분들은 카페나 현장에서 만나 동행을 이루는 경우가 많아 보였어요. 자매끼리 여행하면 좋은 점은, 늘 둘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같아요. 너무도 로맨틱한 분위기에 남편이랑 왔으면 좋았겠다 하고 아주 잠깐 동생에겐 미안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Lauv의 Paris in the rain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나눠 끼고 있으니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몇 번이고 되뇌었어요.

디즈니랜드는 두 개의 park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흰 스튜디오 말고, 랜드만 방문하기로 했어요. 제가 놀이기구를 못 타거든요. 몇 년 전에 학교 동기들이랑 롯데월드 가서 파라오의 분노를 탔는데, 저만 소리 지르다 나온 거 있죠. 회전목마 말곤 손에 땀을 쥐면서 타야 할 정도예요. 반면에 동생은 스릴 광이죠.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서 먼저 동선은 최소화해야 했고, 열차 기구 하나 정도는 타기로 했죠. 그래도 꽤 탔어요. 캐리비안의 해적, 피터팬, 버즈, 날아다니는 비행기 같은 것도 탔고, 대망의 인디아나 존스도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빠랑 에버랜드 독수리 요새를 탄 이후로 기차는 거들떠도 안 봤었는데, 인디아나 존스는 떨어지기도 많이 떨어지고, 계속 빙글빙글 돌았어요. 저까지 돌아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목이 꺾여서 비닐봉지처럼 휘날리는 기분,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벌렁벌렁 거려요. 이 와중에 절 보면서 키득대는 동생, 하차 후 절 안쓰러우면서도 신기하게 보는 어린아이들. 나중에 미국 디즈니랜드도 가자는데, 그땐 친구 두어 명 불러서 동생이 홀로 타지 않으면서 저는 벤치에서 기다릴 수 있도록 해야겠어요. 밀려오는 멀미에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고, 야경과 불꽃놀이 쇼를 기다렸습니다. 환상의 나라 디즈니랜드는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파리에서의 느낌은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든다'였다고 말할 수 있어요. 신기함, 즐거움, 시원함, 추억에 대한 회상, 그리고 사랑스러움을 복합적으로 느낄 수 있었거든요. 카메라 때문에 어깨가 무거웠던 오후였는데, 불꽃놀이와 함께 울려 퍼지는 디즈니 영화 OST를 들으니 눈이 번쩍 뜨이는 거 있죠.

파리에서 마지막 날은 저 답지 않게 쌩쌩했어요. 작년 겨울 여행 때는 이동 전 날엔 아쉬움도 컸지만, 긴장감 때문에 초조하고 그랬는데 말이에요. 에펠탑 아래서 반짝이는 풍경을 눈에 담으니, 마치 술 한 잔 들이켠 것처럼 파리에 취해 보낸 지난 시간들이 스윽 스쳐 지나갔어요. 행복했던 나날들, 감탄했던 순간들, 미소가 아름다운 프랑스 사람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맛 좋은 음식도요. 계속 해 먹긴 했지만, 마지막 날엔 레스토랑을 가보자 해서 찾은 식당에서 오리와 송아지 고기를 먹었어요. <AU PETIT FERA CHEVAL>이란 곳이었는데, 길치인데도 한 번 돌고 찾았으니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직원도 친절했고,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지라 한국어로 주문도 받으시더라고요. 짭짤한 거야 유럽 음식이 전부 그러니까 이젠 깔끔히 받아들였어요. 추천해요. 약국에서 엄마 화장품도 구매했고, 파리 그림이 그려진 배낭도 샀어요. 크로스백이 있긴 했지만, 한쪽으로만 메려니 어깨 통증을 이길 수가 없겠더라고요. 덕분에 지금도 잘 메고 다닌답니다.


돌아오고 나니, 수 천장의 사진과 뮤지엄 패스 티켓, 그리고 교통을 책임졌던 나비고(NAVIGO)가 남았네요. 가끔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곤 하는데, 이래서 모든 남겨두라고 하는 건가 봐요. 바쁜 일상생활 속에서 추억을 짚을 수 있을 만한 매개체, 기념품과 사진들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네요. 언제든지 스물넷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니 얼마나 고마워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지나간 시간 속에서 머물 수 있게 해 주니까요. 그런 순간에 함께 했던 동생이 보고 싶은 오후예요. 그래도 여전히 다시 방문한다면 연인이 옆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그래도 스위스만큼은 가족과 재방문할 겁니다. 맑은 공기에 나까지 맑아지는 청아한 마을, 인터라켄을요.

금빛 에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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