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여행, 제게 겁을 주고 당황하게 만든 사건은 기차였죠. 안내 방송 없이 문이 닫히는 열차와 이 때문에 타국에서 헤어질 뻔한 저와 제 동생. 그런데 이젠 유럽에서의 기차가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프랑스 파리, 또 스위스 인터라켄, 그리고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오는 데만 여섯 번의 환승이 있었으니까요. 거의 여섯 시간을 소요해서 도착한 베네치아는 심신이 지친 상태라 아무런 기대도 없었던 지역이었어요. 그런데 기차역을 나오자마자 탄성이 터져 나왔죠. 물길을 따라 세워진 건물이 주는 새로움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감동을 주었거든요. 비릿한 물 냄새에선 생기가 흘러넘쳤습니다. 관광 명소 구경은 세 시간도 채 안 돼서 끝났지만, 다음날이 기대되는 신비한 도시였어요.
베네치아/베니스
사람들은 또 어찌나 친절하고 쾌활한지, 숙소에서부터 비둘기 아저씨, 오다가다 마주한 레스토랑 직원들까지 모두 함박웃음으로 얼굴을 밝히고 있었어요. 저도 미소에 취해 싱글벙글 돌아다닌 기억이 나네요. 리알토 다리와 산 마르코 광장, 두칼레 궁, 성당, 아카데미아 다리, 그리고 미술관. 관광명소가 상대적으로 적고, 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서 베네치아는 당일치기 혹은 1박 2일 정도로 잠깐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하죠. 그렇지만 저는, 다시 갈 수만 있다면 일주일 정도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어요. 경찰차나 구급차, 버스와 택시, 자가용 모두 물 위로 지나다니니 이런 신기한 경험을 또 언제 해보겠어요.
베네치아/베니스
워낙 좁은 동네라서 걷다 보면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지경에 이릅니다. 길치인 저와 동생이 보다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해 준 장소가 있었는데, 바로 DFS 전망대였어요. 책과 블로그에서 짧게 소개된 곳이었는데, 베네치아 전경이 내려다보인답니다. 정해진 시간에 옥상을 개방해서 관광객들이 눈과 마음을 활짝 트일 수 있도록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더라고요. 미리 예약하고 가야 해서 날씨가 안 좋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짓이었죠. 하늘은 맑았고, 베네치아는 아름다웠으니까요.
레스토랑 Bar Puppa
그리고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레스토랑 <Bar Puppa>에 가서 점심을 챙겼습니다. 한국인 직원이 있어서 그런지 가게는 좁은데 한국인들이 끊이지 않고 들어왔어요. 가격도 저렴해서 먹기 좋았죠. 저와 제 동생은 봉골레 파스타와 해물 파스타, 그리고 스프리츠를 한 잔 마셨어요. 후식으로 카푸치노도 나왔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커피 체인점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게 단번에 이해됐습니다. 지금껏 제가 알던 카푸치노는 카푸치노가 아니었어요. 음. 요즘 같은 장마철에 은은한 커피 향을 떠올리니, 감성에도 비가 촉촉이 젖어드네요.
야경
프랑스 파리, 스위스 인터라켄에서도 느꼈지만 동행 참 많아요. 혼자였다면 저도 누군가와 어울려 다녔으려나 호기심이 생겼죠. 실제로 몇몇 분들이 저희에게 함께 다니자고 제안해주셨는데, 아쉽게도 그러진 못했어요. 아무래도 타지이다 보니까, 더욱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거든요. 우리나라에서도 뒷걸음질 치거든요. 이상하죠, 외국에서 만나면 더 반갑다는데, 저흰 왜 이렇게 겁이 많은 걸까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큰 걸까 문득 궁금해졌어요. 아직 20대 초반인데, 너무 폐쇄적인 건 아닌가 하고요. 이런저런 일 겪으면서 인간관계에 지쳐보기도 했고, 그러면서 기대는 않고, 포기할 줄도 알게 됐지만 쉽게 변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거 같더라고요. 장기간의 여행으로 살짝 피곤하기도 했고, 영화 매니아로서 <테이큰> 시리즈를 다 봤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야겠네요. 한낮엔 많이 더워서 숙소로 돌아가 쉬다가 다시 나오곤 했어요. 마트에서 사 온 스테이크와 양파를 구워 저녁으로 먹었고, 야경을 즐기러 구석구석 걸어 다녔습니다. 베네치아는 관광객이 많아서 밤에도 안전한 편이에요. 그리고 전 야경을 정말 사랑하거든요. 어딜 가든 꼭 야경을 보고 온답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매일 같이 야경 보러 드라이브 여행 떠날 계획을 쫙 세워놨을 정도로요.
부라노 섬이 사진 잘 나오기로 그렇게 유명하다죠. SNS에서 핫한 사진들을 잔뜩 보고 간 터라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어요. 수상버스 '바포레토'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섬인데, 요금제가 다양해서 한참 고민했었어요. 만 29세까지는 롤링 베니스라는 할인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지만, 저희는 하루 정도 타고 말 거라 24시간권이 적당했어요. 섬은 부라노 섬과 무라노 섬, 두 개가 있는데 저희는 부라노 섬만 다녀왔습니다. 하필이면 비가 왔거든요. 해가 뜬 채로 내리는 빗방울에 호랑이가 시집갔다며 꺄르르 웃었지만, 다음 날 피렌체로 떠나야 하는 일정이라 근심이 얼굴에 드리웠죠. 그래도 사진 찍으며 돌아다닐 때엔 햇살이 그림자를 샥 쫓아냈어요.
부라노 섬 SNS 따라하기
집에 돌아가야 할 날이 가까워져서 그런가 시간이 유독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아서 잠이 오지 않았어요. 동생도 같은 기분이었는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더라고요. 그래서 오랜만에 속 깊은 대화를 했던 것 같아요. 저희 자매는 닮은 듯 달라요. 예를 들어서, 둘 다 떡볶이를 좋아하는데, 동생은 어묵, 양배추, 라면 사리 등등 주변머리를, 저는 떡을 먼저 먹죠. 옷차림에서도 엿볼 수 있어요. 여름에도 저는 긴팔에 반바지를, 동생은 반팔에 긴바지를 입거든요. 가벼운 예시를 들었지만, 어쨌든 서로 맞춰야 할 것들이 아예 없는 천생연분이다!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세 차례 유럽 여행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동생이 제게 많이 맞춰준 덕분이에요.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반드시 좋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게, 전 이제 동생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버렸거든요. 하하.
동생, 그리고 나
이제 기차 탑승은 단 세 번, 목적지는 각각 이탈리아 피렌체, 로마, 그리고 한국 서울이 남았어요. 한 달여간의 여행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마음 한쪽이 시린 기분이에요. 또 언제 가볼 수 있을까 하는 그리움과 유럽에서 만끽했던 행복에 대한 열망이 커져만 갑니다. 언어를 배우는 건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는 것과 같다고들 하죠. 여행도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공기 냄새, 그곳만의 날씨, 사람들의 분위기, 그리고 내가 그곳에 있을 때의 감정. 여전히 철없는 스물다섯 학생이지만, 심장이 시큰한 게, 이럴 땐 꼭 어른이 된 것만 같거든요. 남은 두 도시의 모습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