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유럽 - 이탈리아 로마 편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다이어트를 열심히 하고 떠나는 편입니다. 과거에 얽매여 살지 말라지만, 기억에 묻혀 추억을 떠올릴 때 에너지를 얻곤 하거든요. 그럴 때 꺼내보는 사진만큼 순간을 잘 떠오르게 해 준 게 없더라고요. 아름다운 장소에서 예쁜 옷을 입고 활짝 웃는 사진 속 모습을 남긴 2019년 마지막 유럽 도시,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이글이글 타오르는 열기에 승객 대부분의 얼굴이 찌푸려졌어요. 저희도 마찬가지였죠. 운 좋게 영국과 프랑스의 기후 이상을 겪지 않고 서늘한 스위스를 통과했던 지라 이탈리아 자체가 뜨거운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베네치아와 피렌체는 약과였어요. 적어도 두 도시는 해가 지고 달이 찾아오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으니까요. 로마는 달랐습니다. 뜨거웠어요. 습기 없이 기온만 높으면 찜통 속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화로구이가 되더라고요.
저희 자매의 다 떨어져 가는 체력과 40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날씨를 핑계 삼아 로마 여행 테마는 밤이 되었습니다. 가끔 장을 보러 가거나, 일찍 가지 않으면 구경할 수 없는 관광지 방문을 제외하고는 낮에는 가만히 숙소에 누워 그동안의 사진을 보며 수다를 떨곤 했어요. 돌아올 때는 항상 손에 젤라또가 들려있었고요.
콜로세움 표를 예매하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현장에서 구매해야 했는데요, 오전 7시 전부터 길게 늘어져 있는 줄과 그늘막 하나 없이 뙤약볕 밑에 서 있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안 보고 갔으면 평생 아쉬움으로 남았을 거예요. 팁 하나 공유하자면 콜로세움 통합권은 팔라티노 언덕에서 구매하는 게 제일 이득이에요. 줄이 제일 짧거든요. 그렇게 표를 구매해서 찾아간 콜로세움의 거대함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내부와 외부에 상관없이 몸에 전율을 일게 만들었어요. 콜로세움을 짓느라 고생한 당대 백성들의 노고와 영화에서 봤던 로마인들의 잔인한 게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날은 더웠지만 팔에는 소름이 돋는 기이한 경험을 했죠. 내부 구경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게 저와 제 동생의 후기예요.
길거리에는 분수가 참 많았어요. 정수리 위로 햇볕이 직접 닿기 때문에 분명 두통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분수를 설치해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죠.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분수대였지만, 로마의 분수 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는데요. 바로 트레비 분수입니다. 동전 1개를 던지면 이탈리아 여행으로 로마를 재방문한다, 2개를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3개를 던지면 사랑이 깨진다고 해서 저는 딱 한 개를 던졌어요. 매년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2020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에 재방문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하필이면 바이러스로 나라 문이 닫혀버렸지 뭐예요. 언젠가 저 때 던진 소원의 동전이 바람을 이뤄주겠죠?
건축을 공부한 친구는 로마의 건축물에 시선을 빼앗겨 재방문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저는 인테리어에는 관심이 있지만 건축은 조금도 알지 못하고, 동생도 전공자가 아니어서인지 건축물보다는 맛집 때문에 로마를 종종 떠올리곤 하죠. 너무 더워서 낮에는 숙소에서만 지내다가 해가 질 때쯤 나가 저녁을 먹고 돌아왔는데, 항상 손에는 젤라또를 들고 있었어요. 아이스크림이 살찌게 만든 걸까요, 한국으로 돌아갈 때쯤엔 얼굴이 보름달 만해져 터질 것처럼 보였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식당은 <Saltimbocca Ristorante>라는 곳이에요. 나보나 광장 맛집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레스토랑이죠. 해산물 파스타, 오징어와 새우튀김, 디아블로 피자가 베스트라고 하여, 두 명이 저 많은 걸 시켰습니다. 대단한 건 서버가 다 먹은 줄 알고 가져가 버린 새우튀김 1개를 빼고는 모두 클리어했다는 점이에요. 동생은 거기다가 티라미수까지 챙겨 먹었어요. 평소엔 잘 먹지만, 여행만 왔다 하면 입맛이 뚝 끊기는 아이가 잘 먹으니 왠지 흐뭇했죠. 참, 레드 비어 추천해요! 정말 맛있는 맥주였거든요.
콜로세움을 시작으로 트레비 분수, 진실의 입, 성당, 팔라티노 언덕, 포로로마노, 스페인 광장, 스페인 계단, 포폴로 광장 보르게세 공원, 베네치아 광장, 판테온, 나보나 광장, 성 천사의 다리 등 남들 다 가는 관광지는 한 번씩 찍고 왔지만, 저희에게 로마는 맛있는 음식을 파는 좋은 도시로 인상이 콱 박혀버렸어요. 마지막 공항에서 심각한 인종/성차별을 당한 바람에 로마는 두 번 다시 안 가겠다 다짐했는데, 그 음식들 때문에 문득 떠오를 때가 있어서 난감해요. 단순히 도시만 예뻤더라면 한 번 봤으니 됐다고 했을 텐데 이 맛이라는 것이 침샘을 자극할 때면 한숨이 나오곤 합니다. 그래서 훗날, 트레비 분수에 던진 동전 한 개가 우리를 다시 로마로 이끈다면, 그때는 로마 공항을 이용하는 일은 없도록 할 거예요. 여권을 던지고 저들끼리 웃던 세관 직원들은 꼴도 보기 싫으니까요. 시내 직원들은 그렇지 않았기에, 곧장 시내에서 맛있는 것들로 배를 불리고, 다른 여행지로 떠나겠어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그래서 있나 봐요. 맛 때문에 또 방문하고 싶다니, 웃기죠?
이렇게 2019년 7월 한 달 간의 여행을 종료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며 아쉬움을 토로한 저희 자매. 영국의 화려한 뮤지컬, 프랑스의 로맨틱한 에펠탑, 스위스의 평온한 마을 정취, 이탈리아의 식도락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2017년부터 다녀온 여행지를 포함해서 어느 한 곳이 가장 좋았냐고 묻는다면 저는 감히 대답 못해요. 추려내기도 힘들지만, 굳이 얘기하란다면 체코는 몇 번을 다시 가도 즐거울 거 같고, 프랑스의 달다구리 한 분위기는 연인을 떠오르게 만들어서 꼭 같이 가야겠고, 스위스는 동생이랑 한 달 살기 하기로 약속했어요. 가보지 못한 여행지를 가는 게 결정에 덜 어려울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세 국가를 꼽았지만, 발자국을 남겼던 다른 국가들이 자꾸 눈에 밟혀서요.
언제 또 갈 수 있을지 모르겠을 유럽 여행입니다. 2021년 7월이 되어서야 겨우 마무리한 유럽 일지는 아마 떠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고자 기억 여행을 떠났던 건 아닐까 싶어요. 떠나보낼 수 없어 미루고 미뤘던 로마를 마무리하고 나니 시원섭섭해요.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할 수 있는 긴 시간이 마련되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겠어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 만의 다음 여행 계획을 세우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