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색 어른 <차은형, 2화>
송이에게 불현듯 나타난 유시환이라는 남자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동안 나와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이유를 신랄하게 느껴버린 탓에 그가 미웠다. 너무 정확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에게 곁을 두었다는 데에서 오는 안도와 원망감이 교차했다. 송이에겐 잘 된 일이지만, 나에겐 잘 못된 일이라 슬펐다.
"... 유시환, 그 사람이랑 지내는 거니?"
송이에게 대체제란 없다. 내가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겠지. 나처럼 상처 주는 말 한 번 하지 못할 테다. 그래서 오는 답답함과 지쳐가는 체력에 나를 걸었다. 유시환은 나와 정 반대의 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거기다 송이는 환자다. 사람은 결국 기대를 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서운함은 필연적이다. 그러니까 송이는 결국 나를 떠나지 못한다-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비참해서 떨어지는 눈물을 재빨리 감췄다. 약한 모습을 보는 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매일 이 한심한 차은형이라는 몸뚱이 주변을 맴도는 내가 안타깝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싫어하는 것 아닐까. 남들은 모르는 나의 결점까지 다 알고 있는 건 결국 나밖에 없으니까. 환자들이 계속해서 물밀 듯이 들어와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의사 자격까지 상실했다. 차라리 다 그만두고 어디로 떠나버릴까 강한 충동이 들었다. 나 역시 신경통이 심하게 느껴졌다. 회진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일찍 들어가 쉬어야겠다. 안 그러면 정말 사직서라도 던지고 나올 것만 같았다.
아픈 사람에게 감정을 바라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생각은 왜 했던 걸까. 나는 왜 송이에게 다가갈 생각은 않고, 기다리기만 했을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는 있었나.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떨쳐버릴 수 없는 송이의 잔상에 억장은 와르르 무너졌다. 이제 와서 알아챈 건, 나는 송이에게 전혀 도움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절망적인 사실 하나. 송이는 원래 밝은 아이였다. 이상적인 삶을 꿈꾸는 희망찬 소녀였다. 무뎌지고, 까칠해지고, 본인을 세상과 단절시킨 건 병을 얻고 나서였다. 피투성이가 된 채 거실 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 병실에 갇혀, 해도 들어오지 못하게 커튼을 치지 않았던 태도는 모두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발악이었으리라. 그걸 놓쳤다. 아니, 알았다고 할지라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무엇 하나 없었다. 그러니까, 송이가 나으려면 내가 아니라 유시환이 버팀목이 되는 게 옳았다. 몸은 망가지더라도, 마음이 편하다면 그것부터가 큰 발전이다. 내가 놔주는 게 맞았다.
"내일. 내일 놔줄래."
오늘은 불가능했다. 방금 깨달은 사람에게 세상의 이치를 적용하라는 건 잔인하다. 이런저런 핑계라 해도 괜찮다. 원래 숙제는 미루고 미루다가 닥쳐서 하기 마련이니까. 다만, 문제는, 그날 배운 수학 공식을 하루 이틀 지나서 적용하려 하면, 수학 익힘책은 깨끗할 수밖에 없다는 것. 송이의 행복을 빌어야 했으나, 나는 그 방법을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