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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rry go round Nov 02. 2020

원래 부침개는 삼십 장 씩 부치고 그러는게 아니었어요?

좋아하는 것들, 그 스물 여섯 번 째

"많이 먹어라 ㅡ"

토요일 하교 후, 친구를 데리고 간 집에서

아빠는 점심으로 식당용 냉면그릇 한 ㅡ 가득 담은 콩국수를 만들어 주셨다.


"... 이게 _ 1인분인가요 ? 나눠..먹는거죠? "

"?? 1인분이지. 원래 다 이만큼은 먹는거 아냐?"

"....? 이게 1..인분이라고..?"

" 누나 이게 많아요 ..? 아 누나 다이어트 한다고 

소식하시는구나. "


친구는 동공지진난 얼굴로 물끄럼 날 바라보았다.

'이게 진짜 1인분이라고?'

'새삼스레 왜이래, 원래 이 정도는 먹잖아.?'


어라, 원래 다 이렇게 먹는거 아니야?

나야말로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난 원래 이렇게 먹고 컸는데.

한 번도 아빠가 주는 양이 

많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고로 국수란, 식당용 물냉면 스뎅그릇에,

국물이 찰박-찰박- 넘실거리도록,

그렇게 그득하게 담아먹는게 아니었어?


이 양이 뭐 대수냐며,

되려 그런 친구가 신기하다는듯

아 저 친구는 평소 소식하는 가족인가보구나 . 하며

우리 셋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콩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열무김치 챡챡 올려가며 후루루루룩.



원래 그런줄 알았다.

정말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외식을 거의 안하기도 했거니와,

외식이라고 가는 집들은 거의 전부

아빠에게 메뉴판 디자인 같은 걸 맡겼던 가게의

첫 장사 잘 되라고 팔아주러 가는 외식이었기에

뭔가 항상 사장님이 다 아빠의 아는 지인이었다.


원래 돈까스는 일인분에 세네장씩 나오는줄 알았고,

고기를 10인분쯤 시켜 먹으면,

냉면은 입가심용으로 원래 양이 적은 줄 알았다.

(그게 일인분인줄 몰랐지 뭐)

횟집을 가도 늘 특대를 다 먹고 

대 짜리를 또 시켜 먹었고,

그건 심지어 전라도 출신인 아빠 본인에겐

"서울 회"는 회도 아니라는통에,

동생이랑 나랑 둘이서만 먹는 양이었다.

(엄마는 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

오로지 고기, 그것도 소고기)


성인이 되고, 학교를 다니며 일을 하고,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사먹으며 알았다.

왜 이 세상 사람들은 미니어처 음식을 먹는 걸까.


감사하게도 체질은 아빠보다는 엄마를 닮아서,

먹는 족족 찌는 체질은 아니었고,

엄청나게 먹는 양에 비하면

체격은 그냥.. 평균이었다.


아빠는 응답하라에 나온 

일화 엄마 저리가라 할 정도로 큰 손이었고,

고3내내 뒷바라지를 음식으로 할 정도였다.

한달에 한 두번은 꼭 

김밥 50줄에 부침개 50장씩 부쳐서

반 친구들과 "간식"으로 나눠먹으라고 

갖다주고 가실 정도였으니ㅡ

심지어 그게 많다고도 생각 못했다.

우리 식구 넷이서 먹는건데도,

아빤 김치부침개를 늘 30장씩은 부쳤으니까.

무조건 할당량이 인당 최소 7-8장은 되었던 것이다.

대체 아빠는 왜 그렇게 음식을 많이 했던걸까,


아빠는, 어렸을 적 다섯 남매 중

딱 정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큰 형한테 밀려서,

막내 동생한테 밀려서,

누나랑 여동생은 또 여자라고,

가운데인 자기만 언제나 제일 뒷전인 통에

먹고싶은걸 맘껏 못 먹은게 늘 한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빠가 가족을 꾸리면,

식구들 누구하나 아쉬운 마음 없도록

늘 배불리 먹이면서 살거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런 아빠의 큰 손이, 고스란 ㅡ 히 나에게 왔다.

아빠 못지않게 엄마도 손 맛이 좋았는데,

그런 아빠 엄마의 음식 손 맛을 고스란히 받은 나는

손 맛 좋은 음식을 보고 자란 그대 ㅡ 로 ,

참으로 방대하게 잘도 생산해냈다.


하필이면 또 첫 직장이 호텔이었던데다

요리를 대량으로 생산해낸다는

뷔페 레스토랑 주방이었다.


요리의 시작부터 큰 손으로 시작해서,

프리랜서 일 마저도 케이터링일을 하다보니,

점점 더 내 손은 방대해져만 갔다.

그러다보니 한동안 집에서 집밥을 만드는데

양이 항상 많아서 이걸 줄이는게 너무 어려웠다.

남들은 2인분이 넘어가면 요리하는게 어렵다던데,

난 그 2인분, 3인분만 만드는게 너무 어려웠다.

만들었다 하면 기본으로 최소 6인분이었다.


밥을 하다가 항상 중간에 멈추고 핸드폰을 집어 든다.


"야, 뭐해. 퇴근했어? 어디야, 집 가는길이야?

빠꾸해. 아 돌아와 돌아와 다시 돌아 방향 틀어ㅡ

와서 밥 좀 먹고 가.

아 너무 많이 했어 또 ㅡ 

지금부터 먹기 시작해도

3박4일 안에도 다 못 먹을거 같으니까 빨리 와.

아님 와서 좀 싸가던가,

어? 아 얼른 와 ~ 얼른와서 먹고가 ㅡ"


변치도 않는 레퍼토리.




자고로, 음식이란게,

찌 ㅡ 이끔 해서는 맛이 다 안 깃드는 것이다.

(합리화의 시작)

양을 푸짐 ㅡ 허니 해서, 담뿍 담뿍 담아줘야

고기에도 간이 더 슴슴하니 잘 배어들고,

야채도 더 맛이 풍성하게 내는 법.


그러니 음식하는 이 큰 손은,

할미 될때까지도 크게 바꿀 생각은 없다.

장 봐온 재료,

적당한 양 만든다고 찌끔씩 쓰고 아끼다가

결국은 요리로 한 번 탄생도 못해보고 

냉장고에서 말라 비틀어져 생명을 다하게 되느니

그냥 처음부터 넉넉하게 해서,

회사 동료들도 나눠주고,

언젠가 생긴다면 동네 이웃도 좀 나눠주고.


그냥 그러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나는.

할 줄 아는게 음식이니, 재주부리는 곰마냥 ,


음식으로 재주 부려 조금 더 더불어 살아가고프다.

그러라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에게까지 큰 손을 주신게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로, 이번 주말에는 깍두기를 담궈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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