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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개 Mar 22. 2022

한국을 떠나며

그날의 일기



2019.06.19



콩행 비행기 HX647의 43C 열은 비상구 자리다. 공항 직원은 '비상구 자리는 원래 추가 요금을 내야 하지만 공짜로 내준다'며 생색을 냈지만 실제로도 그런지 알 리가 없는 내 입장에서는, 그것도 꼭두새벽에 가족과의 헤어짐을 바로 코 앞에 둔 사람 입장에서는 고마움을 느낄 만한 여유 따윈 없었다. 그보다는 과연 내 캐리어가 수화물 규정을 초과하지 않을 것인지, 혹 10년 전 교환학생을 떠날 때 공항 한복판에서 엄마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하며 짐을 덜어내던 악몽을 되풀이하진 않을지가 더 중요했으니까.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는 지금 문득 그 직원이 했던 말이 생각이 나서 고개를 들어 뒤를 보니, 확실히 뒷좌석들보다는 공간이 여유로운 것 같다. 생색낼 만도 했네.



기내를 찬찬히 둘러보니 누가 봐도 '홍콩'스러운 칠리 브라운 계열의 색상은 공교롭게 내 체크 셔츠랑 깔맞춤이어서 괜스레 머쓱했으나, 청결상태나 편안함이나 모두 훌륭하다. 요 근래 저가항공만 타고 다녀서 기대치가 거의 바닥인지라 이 정도면 매우 만족스럽다. 회사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떠나는 마당에 직항도 아니고 경유를 끊을 수가 있어?' 라며 본인이 타는 것도 아니면서 호들갑을 떨었지만, 가격을 듣고는 다들 수긍했던 기억이 난다. 딱  2시간만 대기하면 단돈 20만 원에 샌프란시스코를 갈 수 있다는데 (카드 실적을 충실히 쌓은 덕이다. 역시 나는 소비 요정) 이 정도 퀄리티에, 이 정도 가격이면 훌륭하지. 거기다 나는 PP카드 소유자니까 2시간 동안 라운지에서 무한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천하무적이 된 기분이다. 홍콩서 출발하는 미국행 비행기는 분명 더 좋을 것 같다.



막상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는 다소 정신이 없었다. 방심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까 온 신경을 다해 참고 있기도 했고, 그 와중에 면세품까지 찾느라 아슬아슬하게 last call에 맞춰 탔다.  진짜 챙길 건 다 챙기고 떠나는구나. 누가 보면 여행 가는 줄. 덕분에 잠을 거의 못 잤음에도 피곤하거나 목이 마르거나, 심지어 슬프지도 않다. 약간의 땀도 흘린 덕분에 기내 에어컨이 시원하게 느껴지고, 이제야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다.


 

 Bye Korea.




대략 15시간  새로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이 아직 실감이 나질 않는다. 사실 불과 며칠  퇴사를 했다는 것도 아직 느낌이 없는  . 그만둔  2 만에 한국을 뜨는 내가  징하다.   뒤엔 아마  느낌도 잊어버리겠지. 그렇다면 10 , 또는 5 . 아니 불과    이맘때쯤 나는 지금  순간을 어떻게 회상하고 있을까? 글을 보지 않으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가물가물해져 있을까? 혹은 목표와 달리 원하는 job 찾지 못해 허덕이고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마치 라섹과, 교정과, 편도 수술 경험에 이어  하나의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리스트에 지금의  선택이 보란 듯이 올라가 있을까.



인간이 변하는 방법은 3가지뿐이라고 했다. 사는 곳을 바꾸거나, 시간을 달리 쓰거나,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지금 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하러 샌프란시스코로 떠난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 지금의 이 순간을 어떻게 회상하고 있을지 알 길은 없지만, 분명한 건 어쩌면 앞으로 나한테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는 decision을 했다는 거. 떡하니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떠났던 나의 친구 D나, 역시 다 버리고 캄보디아로 떠났던 친구 K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때 블록체인이라는 미지의 분야를 과감히 선택했던 친구 S처럼, 살면서 한 번쯤은 인생을 뒤흔드는 decision을 하는 순간이 온다고 어렴풋이 믿었었는데, 나에겐 이것이 그러한 선택이 되리라 믿는다. 그래서 잘 해내고 싶다.




1. 남의 탓, 환경 탓할 시간에 나에게 집중하기. 결국 모든 건 나의 선택이었다는 걸 잊지 말자.

2. 힘이 드는 순간엔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지난 일 년간 내가 어떤 고민을 했고, 무엇을 포기했는지 떠올리기.

3. 조금은 흘러가는 대로. 사람에 연연하지 말 것. 남의 성공 별 거 없고 내 실패도 별 거 아니다.

4. 당연한 건 없음. 그러니 누군가 나를 도와준다면 반드시 진정으로 고마워할 것 +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말 것.

5.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결과가 말해준다. 아웃풋이 안 나올 땐 노력의 양과 방향을 점검할 것.

6. 어쩌면 폭망 해서 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더라도 아깝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떳떳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보기.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롤러코스터를 탈 때만큼의 긴장감이나 여행을 떠날 때만큼의 설렘은 아니지만, 적당히 두근거리고, 적당히 긴장이 되고, 적당히 걱정이 되면서 적당히 자신감이 있는 딱 지금 이 정도의 느낌이 나는 나쁘지 않다.


이제 잠을 청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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