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유학생이 전하는 디자인 유학생활 적응 Tip
자칭 자발적 프롤레타리아(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뜻하는 독일어로 근로자, 노동자, 월급쟁이가 이에 해당한다)인 내가 팔자에도 없는 공부를 하겠다고 3년 전 서른이 넘어 유학생이 되었다. 의도야 어쨌든 간에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가면서 조금의 기대나 설렘도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앞으로 적어도 2년 간은 가기 싫은 회식을 안 가도 되고, 5만 원짜리 기념품 때문에 finance에 승인받느라 전전긍긍 안 해도 되고, 매일 아침 지옥철을 안타도 되고, 귀찮아 죽겠는데 남을 위해 화장을 안 해도 되고, 우리 가족도 안 궁금해하는 ‘너는 언제 결혼하려고 하니?' 따위의 선 넘은 질문에 답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은근 신이 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커리어우먼을 꿈꾸는 사람이었는데 어째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커리어 그 자체가 아닌, ‘어떤’ Woman으로 보이는지에 더 신경 쓰게 만들었다. 최소한 명품 가방은 하나 있어야 하고, 언제나 프로페셔녈해 보여야 하며, 그러면서도 예뻐야 하고 너무 드세면 안 되고 적당히 사람들과 융화될 수 있는 사람을 사회는 원하는 것 같았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돌아보면 나는 나를 보는 시선에 늘 체해 있었다.
그런데 학생이 되니 그런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반짝이는 휘황찬란한 백팩 하나에 이거 저거 쑤셔 넣고, 레깅스에 티셔츠 하나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학교를 갈 때마다,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와, 깃털 같다. (물론 몸이 아니라 마음이) I’m free. 외국인 백수는 행복하다!
그러나 행복은 늘 단발성이라 한 겨울의 귤처럼 참 빨리도 까먹고 만다.
사회적 시선으로부터는 자유로워졌을지언정, 그 외의 모든 것 때문에 나는 하루라도 빨리 학생을 벗어나고 싶었다. 사실 유학을 온 뒤 처음에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공부도 영어도 아닌, 수입이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잠깐 보이고 사라지지만 그래도 매달 20일이면 들어오던 숫자가 통장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 친구들과 하하호호 웃고 떠들다가도 계산하는 순간에 마음 한편이 살짝 불안해지는 것, 초밥이 너무 당기는데 망설임 없이 시키지 못하는 것.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며 살 땐 몰랐던 당연한(줄 알았던) 소비생활은 학생인 나에겐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다.
두 번째로 힘들었던 건 바로 여기까지 왔는데도 버리지 못한 그놈의 비교 근성이었다. 다양한 백그라운드가 모이는 UX 디자인 이라더니 어째 내 주변엔 하나같이 디자인 전공자들 뿐인지. 과제를 낼 때마다 초라하기만 한 나의 디자인과, 그들 대비 뭘 하든 1.5배는 걸리는 속도는 아무리 ‘시간이 걸리겠지'라고 되뇌어도 종종 자존심을 깎아내리곤 했다. 그러다 가끔가다 내 또래의 이미 여기서 자리를 잡은, 소위 말해 ‘잘 나가는' 디자이너들을 만날 기회가 생길 때면 이 못난 비교 근성은 굳이 꼭꼭 숨겨놓은
열등감을 불지펴서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니 돌이켜보면 유학생활로 내가 배운 건 디자인 스킬도 아니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없었던 빵빵한 네트워크도 아니고, 그저 모든 방해 요소들 속에서도 현재에 집중하는 연습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분명 잘 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그렇다면 이 쉽지 않은 유학생활, 어떻게 하면 좀 더 현실을 직시하고 오로지 디자이너가 되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을까? 내가 ‘했던’ 노력들, 그리고 ‘했었으면 좋았을’ 노력들을 적어보았다.
1. 타임라인을 미리 짜자
2년 간의 석사 생활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플랜을 꼭 짜기 바란다. 이 플랜에는 인턴지원과 예상 졸업 시기가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인턴을 구하지 못하면 졸업 후 구직 과정이 더 힘들어지는데, 대부분의 여름 인턴은 전년도 9월부터 모집을 시작한다. 즉 모집을 시작할 때 제출할 포트폴리오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걸 알았음에도 포트폴리오가 완성되지 않아 대부분의 인턴을 지원조차 하지 못했다. 때문에 꼭 기한을 정해놓고 포트폴리오를 시작하기를 권장한다. ‘일단’ 완성시키고, 계속 개선해 나가야 하지, 어쭙잖은 완벽을 추구하다 지원도 못해보는 실수를 범하지 말자. (어차피 완벽할 수도 없다)
2. 기본기를 쌓자
툴에 대한 기본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괜찮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선 디자인에 대한 전반적인 기본기가 필수이다. 특히 UX 디자인이 아무리 디자인 과정을 중요시한다고 하지만 결국 모든 디자인은 기본적인 비주얼이 충족되어야 한다. 나처럼 비 전공자라면 이러한 기본기를 학교 밖에서도 따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 타이포그래피는 무엇인지, 색은 어떻게 조합하는지, 적정 contrast는 무엇인지 등 정말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이 막상 취업을 하면 실무를 하는데 필요한 것 같다. 그러니 기본기를 쌓는 걸 게을리하지 말자.
3. 매 순간순간을 실전처럼
학교 생활을 하면서 후회되는 것 중에 하나가 대충 한 과목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모든 프로젝트가 포트폴리오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열심히 안 할 수가 없다. 실제로 인턴 지원을 하기 위해 첫 번째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참 넣을만한 프로젝트가 없다'라고 생각하며 대충 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 당시엔 과제만 때우면 될 것 같아 보여도 마음먹고 열심히 해서 퀄리티가 괜찮은 작품이 나오면, 하다못해 소셜 계정에라도 올릴 수 있다.
또한 매 순간순간이 면접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디자인의 특성상 자신의 작업을 발표하고 피드백을 받는 프레젠테이션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리고 사실상 인터뷰의 반 이상은 포트폴리오 프레젠테이션이다. 그러므로 수업시간에 하는 작은 발표 하나하나도 인터뷰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임하자. 분명 실전에서 빛을 볼 것이다.
4. 학교 밖에서 프로젝트를 찾을 것
3번과 대조되어 보일 수 있지만 나는 학기 생활 중 꼭 학교 외의 프로젝트를 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사실 학교 프로젝트는 모든 학교, 모든 학생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프로젝트의 독창성 부분에서 큰 차이가 없을 수 있다. 한 마디로 학교 프로젝트만으로는 재미없는 포트폴리오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학교 밖에서 하는 프로젝트는 선택권이 넓고 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기에 보다 참신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고 나의 강점을 여실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다. 나의 경우 B2B 회사를 가고 싶은데 경험이 없으니, 내가 쓰는 노션이라는 생산성 앱을 좀 더 나은 협업 툴로 리디자인하여 Medium이라는 플랫폼에 기재하였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그 케이스 스터디 덕에 정말 많은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철저한 개인 프로젝트에다가 실무경험도 아닌, 케이스 스터디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관심 있는 영역이나 회사가 있다면 그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해보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적고 보니 지난 2년 간에 잠 못 들었던 수많은 밤들이 생각나서 감회가 새롭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가 그립진 않다.
많은 직장인들이 말한다. 학생일 때가 좋았다고. 또는 ‘돈만 많으면 학생 하고 싶다’라고. 안타깝지만 난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 말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아무리 힘들어도 역시 난 일하는 게 좋다. 전생에 소였던 게 분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