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물개 Mar 22. 2022

디자이너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마케터에서 UX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한 2가지 이유




나는 뼛속까지 문과인 사람이다. 공대 출신인 집안 남자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수학, 공학, 과학 뭐 하나 관심 있었던 적이 없다. 특히 숫자에 유독 약해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해내는 간단한 암산도 잘 못한다. 오죽하면 회사에서 다른 팀들이랑 워크샵을 할 때  ‘자신에 대한 fun fact(재밌는 사실) 말하기’에 "I am Korean, but I’m not good at math (한국인이지만 수학은 못함)"라고 말할 정도니까.



문과가 뭐가 어때서! (출처: SBS)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문과인 나는 마케터라는 내 직업을 참 좋아했다. 회사를 다니며 디자이너들과 일할 기회가 종종 있었고, 스스로도 '디자이너 아닌 사람치고는 미적 감각 있지 않나?'라는 크나큰 착각을 하며 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디자이너 감이라고 생각하거나 훗날 디자인을 공부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에게 디자인은 예민하지만 힙한, 세심하지만 개성 강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분야처럼 보였으니까. 오피스 직장인이 무채색이라면, 디자이너는 가만있어도 튀는, 채도가 높은 사람들 같았다. 그리고 나의 상상 속 디자이너는 항상 ‘수저통 하나 살  때도 이유가 있고, 옷은 절대 아무거나 입지 않으며, 본인만의 스타일이 명확한, 범접할 수 없는 바이브의 소유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예민하지만 힙하진 않고, 감성적이지만 꼼꼼하진 않은, 예쁜 걸 보는 건 좋아하지만 그걸 사는 순간 예쁜 쓰레기가 된다고 믿는 철저한 실용주의 문과생인 나는 그저 디자인을 감상하고 소비하는 대상으로만 남으면 족했다.



그랬던 내가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도 문과생의 불모지, 실리콘밸리에서 말이다.


내가 UX 디자인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은 데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나마 해 볼 만하다 (고 생각했다)


변호사를 만난 뒤 학생이 되기로 결정한 나는 우선 공부할 분야를 찾아야 했다. 공부가 하고 싶어서 유학을 가는 게 아니라 실리콘밸리에 살고 싶어서 유학을 간다니 어딘가 바뀌어도 한참 바뀐 지라 나도 우습지만, 어쨌든 난 결정을 했고 어서 실행에 옮겨야 했다.


우선 나는 변호사가 추천한 대로 STEM에 해당하는 전공 중 내가 공부하고 싶은 학문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STEM이 뭐더라?


STEM이란

STEM은 Sciences(과학), Technology(기술), Engineering(공학), Mathematics(수학), 즉 이공계 전공을 의미하는 말로, 오바마 정권 때부터 자주 등장하던 단어다. 미국 내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전공을 공부한 고급 두뇌에게 취업 및 이민 절차에 혜택을 줌으로써 미국에 남게 하기 위한 조치로 생겨났다고 한다.


시작부터 좌절이었다. 이공계라니...  전공 이름들을 보니 죄다 Manufacturing, Chemistry, Science 등 내가 정말 관심이 하나도 없는 이름만 나오는데,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천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토플 공부를 할 때도 과학 지문이 나올 때면 도무지 집중이 안 되고  ‘왜 내가 지하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영어로 듣고 있어야 하지?’ 하고 생각했던 나다. 그런 내가 어떻게 코딩을 하고, 수학을 풀고, 실험을 한 단 말인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뼛속 아니 영혼까지 문과인 내가 이걸 하면 죽고 못 배길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낙담을 하려던 찰나, 나의 눈을 사로잡은 단어가 있었다. STEM리스트에서 발견한 단어, “Design".


디자인?  정신이 번쩍 든 나는 STEM에 해당하는 디자인 전공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Web Design, Graphic Design, Industrial Design.. 오호라, 무언가 한줄기 희망을 찾은 듯했다. 디자인을 쉽게 생각하지도, 내가 소질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수학, 과학보다는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Product Design”.   이건 뭐지?


주말 동안 Product Design에 대한 자료들을 미친 듯이 찾아보며 난 Product Design이 바로 내가 알고 있던 UX Design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회사에서 해 준 Design Thinking 워크샵에서 배웠던 것이 바로 UX Design Process 였고, UX Designer가 실리콘밸리에서 수요가 높은 직종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초봉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라는 건 덤으로.


관련 내용을 찾으면 찾을수록 내 안에서 흥미가 커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정말 재밌게 공부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문과인 나도 잘해볼 만한 분야일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다.


Tip. STEM 전공 찾기

미국 ICE(이민세관 집행국)에서 매년 업데이트하는 STEM 리스트를 보면 해당하는 전공과목들을 살펴볼 수 있다. 유학을 준비할 때 공부하고자 하는 학교의 과 CIP 코드를 리스트와 비교해보면 된다. 만약 공부하려는 전공의 CIP 코드가 리스트에 있다면 그 전공은  STEM에 해당하는 것이다. 최근엔 경제 경영 분야도 STEM 리스트에 포함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STEM 리스트:
https://www.ice.gov/sites/default/files/documents/stem-list.pdf




제품이 별로인 걸 어쩌라고요


절대로 공부할 수 없을 것 같은 STEM 전공 중에서 ‘유일하게 해 볼 만해 보였다’는 점을 제외하고, 내가 다른 디자인도 아닌 UX 디자인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UX 디자인이 바로 제품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에겐 회사를 다니는 동안 늘 갖고 있던 불만이 하나 있었다. 그건 세일즈를 할 때도, 마케팅을 할 때도 똑같았는데 바로 ‘왜 내가 만들지도 않은 제품이 안 팔린다고 챌린지를 받아야 하지?’이다.


세일즈든 마케팅이든, 궁극적인 목표는 매출 증대에 기여하는 것이다. 세일즈는 직접 물건을 셀링함으로써, 마케팅은 그것을 보조함으로써. 이윤 없는 회사는 존속할 수 없고, 어떻게든 비즈니스는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종종 느꼈던 점 중에 하나는, 사실 비즈니스가 잘 되고 안 되고는 제품 그 자체에 달린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거다. 신제품 서버를 홍보하러 고객 콜을 간 적이 있었다. 한창 프레젠테이션을 했더니 고객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더니 '이거 다른 제품에도 다 있고 걔네가 훨씬 가격도 싸다.'며 살 이유가 없다고 했다. 사실 고객이 지적한 포인트는 실제로 내부에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우리 제품은 비싸고 호환성도 떨어지고 안 되는 피처가 너무 많다는 걸. 심지어 내부에서도 실패한 제품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으니까. 물론 세일즈는 안 되는 딜도 되게 해야 하고 당시 나는 그 정도 감량이 안 되는 인물이었던 지라 변명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일들을 겪을 때면  '제품이 별로면 아무리 영업이 잘해도 안 팔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왜 내가 이걸로 월급이 깎여야 (세일즈는 목표치를 팔지 못하면 월급에 영향을 받았다) 하지? 억울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마케터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마지막 포지션이었던 퍼포먼스 마케터의 역할은 마케팅 캠페인을 통해 해당 제품이 목표로 한 영업 타깃을 맞출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리딩 하는 것이었다. 만약 마케팅 타깃을 못 맞추면 마케터는 여기저기서 치이고 깨진다.  숫자가 왜 이러냐며, 그 많은 budget으로 뭘 한 거냐며, 마케팅이 세일즈에 뭘 도와주냐며 등등. 그런데 마케터인 내가 봐도 제품이 별로고 장점이 하나도 없는데, 고객 입장에서 전혀 살 이유가 없는데 어떻게 팔리게 만들라는 건가. 나는 거짓말쟁이도, 마술사도 아니다. 소구성이 떨어지는 제품을 제 아무리 혹한 메시지로 포장하고, 돈을 써서 광고를 하고, 세미나를 한다고 한들, 팔릴 리가 없는데 비현실적인 숫자를 만들어오라고 하니 점점 양치기 소년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도 제품을 만들고 싶다. 그럼 덜 억울하기라도 할 텐데'



무의식 중에 종종 들었던 생각. 그리고 그때는 몰랐던, 그 '제품을 만드는 사람’ 이 바로 Product Designer/UX Designer 였던 것이다.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전방에서 직접 제품을 만들고,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디자인으로 해결해주는 사람. 더 나은 제품을 통해 더 나은 소비자 경험을 선사하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비즈니스 성장에 기여하도록 하는 사람.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UX 디자이너가 되기로 했다.


아무나 못하는 디자인,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이전 04화 약은 약사에게, 비자는 변호사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