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물개 Mar 21. 2022

약은 약사에게, 비자는 변호사에게

말로만 듣던 신분의 벽



*이 글에 쓰인 비자 관련 내용은 현재 시점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비자 전문가도, 관련 분야 종사자도 아닙니다. 자세한 문의는 전문가와 상담하시길 바랍니다*



다사다난했던 실리콘밸리 이직 도전에 실패한 뒤 나는 여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더럽고 치사해서 안 해!’하고 포기했다기보다는 회의감이 들어 잠시 멈추게 되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해외로 이직을 한다는 것이 타이밍과 운, 조건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그건 나의 노력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내가 아무리 뛰어난 인재가 된다 한들 비자를 스폰서해 줄 회사가 없다면, 또한 스폰을 받는다 하더라도 추첨제로 이루어지는 H1B 로터리에 떨어진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모 아니면 도인 이 게임에 나는 더 이상 나를 갈아 넣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도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기 때문에, 그 어떤 미련이나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좀 쉬고 싶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지에 대한 결정은 잠시 미뤄둔 채로.



나는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의 즐거움을 느끼며 나름의 짧은 휴식기(?)를 가졌다. 회사에선 난 별로 관심도 없는, 그저 때가 되면 해주는 프로모션 얘기가 나오고 위에선  내가 근래 처져있는 게 티가 났는지 있지도 않아 보이는 싱가포르 자리로 나를 들쑤셨다. 마치 원하면 언제든지 싱가포르로 relocate 시켜줄 것처럼.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가고 싶은 데는 샌프란시스코인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H1B 말고 혹시 다른 비자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나는 정말 몰랐다. 내가 이 정도로 실리콘밸리에 진심이 될 줄도, 이렇게 답정너인 인간이었는지도. 살면서 이렇게 무언가 집착했던 적이 있었을까?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2018년의 나는 ‘그 정도’였던 것이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걸 안 하면 안 될 것처럼.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돌아보건대, 만약 저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똑같이 할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지금의 내가 그때로 돌아가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포기하지 않아서 고맙다고, 그리고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토닥토닥'을 해줄 거라는 것이다.



변호사 사무실 가던 길에 본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 하고 있던 전시. 엉망이었던 내 근래 6개월을 어쩜 저렇게 떡하니 보여주던지.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 신분의 벽



여름에서 가을이 넘어가는 2018년 9월, 나는 퇴근 후 광화문의 어느 이민법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순전히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비자 때문에 더는 골머리를 앓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냥 누가 속 시원히 누군가 나에게 알려 주길 바랬는데, 온갖 커뮤니티에 떠돌아다니는 이렇다 저렇다 한 비자 관련 게시물들을 검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제 더는 그런데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았다. 내가 궁금한 건 단 하나, 현상황에서 노려볼만한(?) 비자들의 종류였다. 그래서 전문가를 찾아가기로 했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비자는 이민법 변호사에게.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본 적도 없고, 살면서 만나 본 법조인은 허세로 가득했던 소개팅 남이 전부였던 나는 사실은 조금 긴장했던 것 같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의 이 모든 스토리는 최측근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는데 (심지어 가족들도 모르고 있었다) 제3자에게 내가 그동안 어떤 삽질을 했는지 말한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좀 부끄럽기도 했다. 꼭 심리상담을 받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어떻게 오셨냐는 변호사의 말에, “음, 제가 미국에서 일을 하고 싶은데요”라고 시작된 나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 술술 풀려나갔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어떤 노력을 했고, 어떤 것이 문제였는지 지난 6개월의 여정을 속사포 랩처럼 뱉어낸 것이다. 내 얘기를 아무 말 없이 들어주던 그 변호사는 나의 랩이 끝나자마자 말했다.




“미국에 정말 가고 싶으신가 보네요"



그리고는 자료 하나 찾아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마치 아픈 환자에게 진료 상담을 해주듯, 비자 종류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이래서 전문가와 상담하라고 하나보다. 정말이지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진작에 올 걸.



이날 내가 변호사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은 이랬다.




미국의 비자는 이민 비자와 비이민 비자로 나누어진다. 비이민 비자는 말 그대로 이민 목적이 아닌 미국에 단기 체류를 위한 비자로 흔히들 관광객, 학생, 사업자 등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비이민 비자로도 미국에서 승인된 기간 동안 합법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민/비이민 가리지 않고 외국인 신분으로 고려할 수 있는 비자는 아래와 같다:



F1 (학생비자) → OPT (+STEM)   

학업을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비자. 교환학생, 어학연수, 유학 모두 F1이다. 단기 유학이 이 아닌 Full time 유학생으로서 미국 내 인가된 기간에서 학위를 취득한  F1 소지자에겐 졸업 후 고용 허가증 (EAD)를 받아 해당 분야에서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OPT (Optional Practical Training)가 주어진다.

OPT를 받기 위해선 최소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졸업 전 최소 1년 이상 full-time 학생이어야 하고, 반드시 본인 전공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취업이어야 한다.

OPT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은 기본적으로 12개월이고, STEM 분야 전공자는 최대 3년까지 일을 할 수 있다. 즉 미국에 남고 싶다면 이 기간 안에 취업비자(H1-B)나 영주권 (Green Card)으로 신분이 변경되어야 한다. → 바로 이 부분이 많은 회사들이 유학생 고용을 꺼려하는(했던) 이유다. H1-B나 영주권은 대개 회사에서 비용을 부담하는데, 취업비자는 추첨제라 운이 따라줘야 하고, 영주권은 워낙 까다롭고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선 리스크를 안고 싶지 않은 것이다.

OPT는 시작 날짜를 본인이 정할 수 있다 - ‘나 이 날짜에는 취업을 했을 것 같아’ 하고 정해놓는 것이다. 최대 졸업 후 60일 안으로 시작일을 설정해야 하고, 본인이 정한 날짜 이전에는 일을 시작할 수 없다. 또한 만약 OPT 시작일 이후 90일 안에 취업을 하지 않으면 불법체류자가 된다. 이때는 추가로 주어지는 60일 안에 한국에 돌아가거나 미국에 남기 위해선 반드시 신분 변경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Grace Period라고 부르며 한마디로 ‘주어진 기간 안에 job을 찾지 못했으니 신분을 바꾸거나 미국을 떠나라!’ 하고 주는 기간이다.


J1 (인턴십 비자)   

흔히 기업이나 한국 혹은 미국 정부, 각 대학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문화를 교류하기 위한 인턴십 프로그램  목적의 비이민 비자이다.

J1 기간은 보통 1년에서 1년 반 정도이고 이 안에선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비 이민 비자인 만큼 인턴 기간이 끝나면 한국에 돌아가거나 미국에 더 체류하고 싶다면 역시나 신분을 변경해야 한다. → 내가 6개월간 면접을 본 회사들이 나를 회유(?) 했던 비자가 바로 이것이다. 일단 인턴으로 와서 일하는 걸 보고 H1B로 전환을 해주는 옵션


H1-B (취업비자)   

가장 보편적인 비자로 추후 영주권이나 시민권, 즉 ‘이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허용해 주는 비자이다. 대부분의 유학생이 취업을 할 때 H1-B 스폰 여부를 확인하거나 협의를 해야 한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쿼터가 정해져 있다. 즉 자리가 한정되어있다는 소리고 매년 다르다.

전 세계에서 온 모든 미국 내 유학생이 노리는(?) 비자이기 때문에 로터리라 불리는 추첨제를 통해서 1차 인원을 선발한다. 이를 위한 모집기간은 1년에 1번이고, 4월 첫 주까지 (지금은 바뀌어서 3월 중순 안에) 해당 서류가 도착해야 한다.  → 그 말은 즉슨 만약 4월이 지나 취업을 하면 해당 연도의 H1B 지원은 못한다는 것이다.

H1-B를 한번 받으면 3년 동안 일을 할 수 있고 중간에 한 번 연장이 가능하다. 즉 H1-B를 한 번 받으면 최소 6년은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보통 이 안에 영주권을 스폰받게 되어 신분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이 많은 유학생이 택하는 루트이다.


L1 (주재원 비자)   

미국 내 자회사나 지사, 계열사를 두고 있는 본사에서 사용하는 주재원 비자이다. 가령 S전자의 미국지사로 가거나, G의 한국지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 본사로 발령 나는 것이 이 케이스에 속한다.  (당시 미국 회사의 한국지사를 다니고 있던 내가 이 방법을 가장 먼저 뚫고자 하였으나 아쉽게도 불가능했다.)

관리직이 아닌 경우 L1-B를 취득하여 나가게 되고, 최대 미국에 5년간 머무를 수 있다.

주재원으로 파견되기 위해선 해당 직원의 경력이나 기술이 다른 근로자가 대체할 수 없는 것임과 동시에 미에서도 대체할 인력이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기에 보통 기술직 전문가들이 유리하다. (문과생은 웁니다)


O-1 (예술인 비자)   

보통 예술가, 운동선수, 음악인 등에게 주어지는 비자로 본인이 종사하는 분야에 특허를 받은 게 있거나, 저명한(?) 매체에 소개된 자료들 등을 인정받아 받을 수 있다. (당시 나는 해당사항이 없었으나 미국에 와서 보니 생각보다 이 비자로 온 디자이너들을 간혹 볼 수 있었다)

체류기관은 대개 3년을 초과할 수 없으며 1년씩 연장할 수 있다.


E-2 (무역/투자 비자)   

미국과 무역 협정을 맺은 조약 국가에만 해당하는 비자로 미국과 주요 무역 거래를 하거나, 상당 액수의 투자를 한 한국 국적 회사의 직원이 신청 가능하다. 예를 들어 미국 내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한국 스타트업들의 직원들이 받을 수 있다.

모든 미국 내 한국 스타트업이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회사 소유권이 한국계 회사 거나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어야 한다.

경영, 관리, 특수 기술직의 직원만을 스폰서 해줄 수 있고 보통은 팀장급 이상만이 받을 수가 있다. 회사에선 경영을 위해 이 포지션이 필요한 이유 등을 설득해야 한다.

대개 2-5 년을 체류할 수 있다.





뭐가 그리 복잡하고 고려해야 될 요소가 많은지, 듣는 내내 속기사가 된 것처럼 메모를 하느라 애를 먹었다. 분명하게 알게 된 사실은 미국은 이민국가라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야 가능하다는 것.



종합적으로 변호사가 당시 나에게 추천했던 방법은 3가지였다.   



   1. L1: 본사에 주재원으로 나가거나, 그게 안 되면 본사가 아닌 미국 내 계열사의 주재원 자리를 알아본다.

   2. E-2: E 비자가 발급 가능한 미국 내 한국 스타트업에 취업한다.

   3. F1 후 H-1B : STEM OPT가 가능한 분야로 석사 유학을 한 뒤 H1-B으로의 전환을 노린다.



많고 많은 옵션 중에 내가 노릴 수 있는 게 3가지로 정리되는 걸 보니 씁쓸하기보단 오히려 마음이 후련했다. 그리고 아마도 3가지 옵션을 들으며 이미 머리로는 학생이 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왜냐하면,  

 

    1. L1: 본사에 주재원으로 나가거나, 본사가 안 되면 미국 내 계열사의 주재원 자리를 알아본다.       

    → 이 역시 회사의 서포트가 필요한데 당시 나의 상황으로는 마케팅으로 갈 만한 자리가 없었다

    2. E-2: E 비자가 발급 가능한 미국 내 한국 스타트업에 취업한다.       

    → 비자를 지원해 준다고 해도 만약 연봉 조건이 맞지 않는 다면 불행한 외노자의 삶이 시작될 것이다.

    3. F1 후 H-1B : STEM OPT가 가능한 분야로 석사 유학을 한 뒤 H1-B으로의 전환을 노린다.

    → 시간과 비용이 들지만 가장 확실하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단, H-1B 확률을 높이려면 STEM에 해야 하는 전공을 공부해야 했다. 참고로 대부분의 문과생 전공은 STEM이 아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명료해진 기분이었다. 빼곡하게 적은 포스트잇들을 챙기고 조금은 편안해진 표정으로 감사인사와 함께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변호사가 물었다.



“그런데 미국에 왜 그렇게 가고 싶으세요?”



한 3초 망설이던 나는 답했다.



“글쎄요, 근데 지금 안 가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그는 사실 나 같은 상담을 처음 해본다며, 어떻게든 잘 풀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어설픈 웃음으로 답한 채 변호사 사무실을 나오니 시원한 저녁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진 게 없는데,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좋아진 나는 집에 오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했다.  



그래,  늦기 전에 학생이 되어야겠다.’


그런데,  공부해야 하지?




이전 03화 계란으로 바위를 칠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