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해외 취업의 필수 조건
이직을 한 번이라도 고려해 본 사람이라면 회사를 다니면서 이직을 준비한다는 것이 참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평소 생활을 유지하면서 따로 시간을 들여 회사를 찾아보고, 서류를 준비하고, 인터뷰를 본다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는 일이다. 심지어 회사 몰래 진행해야 해서 꼭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썅 X 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주변을 둘러보면 그 어려운 일을 남들은 참 잘도 해낸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실리콘밸리 이직을 목표로 총 9번의 인터뷰를 보면서, 나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일단 한국과 캘리포니아는 16시간 차이가 나니, 그나마 이상적인 인터뷰 시간은 아침 6시 - 10시, 또는 밤 1시 - 2시였다. 그러나 인터뷰 시간이 어떻게 매번 마음대로 되겠는가. 토막 잠을 자다가 새벽에 깨는 삶을 반복해야 했고, 어쩌다 야근이라도 한 날은 인터뷰 준비를 하다가 잠들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그 막막함은 안 그래도 팍팍한 나의 삶에 스트레스 지수를 드높여 주었고 덕분에 날 때부터 얇은 모발이 더 얇아져서 여성형 탈모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6개월이나 이 짓을 한 이유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유학이 아닌 해외 이직이 목표였던 2018년의 나는 그저 끊임없이 두들기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이놈의 기회는 참 밀당을 잘해서, 항상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 ‘짠! 이래도 포기할 거야?’ 하고 약 올리듯 다가오고는 했다. 차라리 인터뷰를 한 번도 못보거나 승산이 전혀 없어 보였으면 일찍 포기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어서 마치 중독처럼 연락할 회사를 찾고, 콜드 메일을 보내고, 인터뷰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나의 이 삽질을 끝내게 해 준 결정적 역할을 한 2개의 인터뷰가 있다.
1월을 며칠 안 남긴 어느 날 링크드인에서 캘리포니아 F 지역에 위치한 어느 스타트업의 Marketing Specialist 공고를 발견했다. 미국에 있는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써봤을 스트리밍 플랫폼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한국에도 지사가 있고 무엇보다 대표가 한국인이라 한국인 직원이 꽤 있어 보였다. 눈이 번뜩 뜨여 자기 전에 resume와 포트폴리오를 제출하고, 리크루터에게 쪽지까지 보냈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녀는 올린 지 한 시간도 안된 포스팅이었는데 내가 지원을 해서 무척 놀랐다고 했다.
자고 일어나니 메일이 한 통 와있었다. 제목은 “Let’s Talk”. 나의 외노자가 되기 위한 공식적 첫 인터뷰 요청이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어!’ 신이 난 나는 외쳤다. 그리고 며칠 뒤 스카이프로 Vanessa라는 이름의 여자와 인터뷰를 했다. 무려 새벽 4시에.
한국계 미국인인 Vanessa는 미국의 S전자를 다니다가 빡센 한국 조직문화가 힘들어서 재미있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에 스타트업 씬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이 회사에 관심 있는 이유, 왜 대기업을 포기하고 스타트업에 오고 싶은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왜 미국으로 relocation (일하는 곳을 옮기는 것)을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이미 다 준비를 해놓은 답변이 있어서 인터뷰는 쉽게 흘러갔다. 그렇게 50분 정도 가량을 통화하다가 그녀는 대뜸 물었다.
“사실은 나 다음 주에 한국 오피스로 출장을 가. 그때 2차 인터뷰를 볼 수 있을까?"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Of course!”를 한 3번 말한 것 같다. 없어 보이게.
평일에 반차를 내고 간 가로수길에 위치한 그 오피스는 간판이 없어 정말 찾기 힘들었다. 나는 위워크 정도의 규모를 기대했건만 두꺼운 철문을 열고 들어간 한국 오피스는 상당히 단출했다. ‘뭐 그래도 깔끔하네' 하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Vanessa가 웃으며 등장. 전형적인 교포의 외모(까무잡잡한 피부, 얇은 눈썹, 하얀 치아)를 하고 있었던 그녀는 마케팅 헤드는 아쉽게도 같이 못 왔다며 나를 통유리로 된 미팅룸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캐주얼해 보이지만 전혀 캐주얼하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알고 보니 그녀는 마케팅을 조금 했던 사람이고 지금 사람이 부족해서 종종 마케팅 일도 도와준다고 했다. 그녀는 내 뒤에 있는 커다란 모니터 2개를 가리키며 저게 무슨 화면인지 알겠냐고 물었다. 실시간 트래픽을 보여주고 있는 구글 애널리틱스 화면. 회사에서 구글 애널리틱스를 쓰지는 않지만, 작년에 자격증을 따서 (그렇다. 나는 열정 넘치는 마케터였던 것이다) 사용할 줄 안다고 했더니, 그녀가 몇 가지 직무 관련 질문을 했다. A라는 상황에서 B라는 수치를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느냐, 이만큼의 버짓이 있으면 어떤 플랜을 하겠느냐 등 등. 머리로는 ‘아 그만 좀 물어봐라 좀’을 생각했지만 입가엔 미소를 띠며 답하기를 몇 분 째, 그녀가 말한다. “You’re smart.” 응, 참 고맙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랩탑을 닫더니, “Let’s finish the interview here and just talk as friends. (인터뷰는 이쯤 하고, 친구로서 얘기하자)” 고 말했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당황했다. 그래서 합격이라는 거야 뭐야. 나한텐 그것만 중요하다고!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게 아니었다.
“솔직히 말할게. 너는 충분히 이 자리에 자격이 있어 보여. 그런데 네 신분이 걸려”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H1B (취업 비자) 지원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지원을 해줄 수는 있는데 알다시피 그게 로터리잖아. 떨어지면 너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회사는 onsite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을 원해. 그래서 가급적 리스크는 피하고 싶어 하고. 아마 대부분의 미국 회사들이 그럴 거야.”
“그럼 여기 일하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뭐야?”
“대부분이 영주권자야. 몇 명은 내년에 주재원으로 올 사람들. 내 생각엔 우리가 너에게 오퍼 할 수 있는 건 한국 오피스에서 몇 년 일하다가 주재원으로 오거나, 아니면 아예 인턴 신분으로 미국에 오는 거야. 근데 말했다시피 회사는 당장 미국 오피스에 있을 사람이 필요해. 그래서... 만약에 네가 인턴이라도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면 알려줘. 그럼 마케팅 헤드랑 CEO와 연결시켜줄게”
나는 인턴이라는 말을 듣고 기겁했다. 인턴만 3번 하고 어렵게 취업해서 이미 4년을 직장인으로 산 나한테, 다시 인턴을 하라고? 내가 무슨 영화 <인턴> 찍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미국 인턴은 단기 비자다. 즉 결국엔 취업 비자를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당황한 내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하고 있는데, 그녀가 머뭇하더니 입을 열었다.
"있잖아, 사실은 내 남자 친구가 한국인 유학생이야. 근데 H1B를 못 받아서 결국 비자가 만료돼버렸어. 그래서 얼마 전에 한국에 들어왔거든. 비자가 해결되지 않고는 미국에서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어. 그리고 이미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정권은 외국인에게 너무나 불리해."
그러면서 말하길,
‘이제 내가 남의 나라 정권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건가?’라고 혼잣말할 뻔한 걸 꾹 참았다. 그리고는 개인사까지 꺼내며 솔직한 조언을 해준 Vanessa에게 고맙다고, 생각해보겠다고 답한 뒤 오피스를 나왔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너무 참담했다. 그리고 이미 답은 나와 있는 듯했다. 회사가 취업 비자 스폰의 의지가 없다는데 휘황찬란한 IFC 건물을 버리고 골방 같은 오피스에서 나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도, 그렇다고 단기 인턴으로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열정만으로 무엇하나 확실치 않은 환경에서 버티기에 나는 이미 너무나 현실적인 5년 차 사회인었던 것이다.
결국 난 인턴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Vanessa는 결국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해서 롱디 생활을 끝내고 그의 신분문제를 해결해주었다고, 그리고 그 회사는 그만두었다고 한다.
나의 마지막 인터뷰는 해외취업 박람회를 통해 알게 된 버클리에 위치한 한 한국 스타트업이다. 음원 퍼블리싱 플랫폼의 디지털 마케터를 뽑는 포지션이었는데, 업무가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위치도 샌프란시스코 바로 옆인 버클리라는 점에서 너무나 끌렸다.
한 달 반 정도 걸렸던 이 포지션은 인턴으로 입사한 후 한국에서 3개월 일한 뒤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였는데, 비자도 인턴 기간이 끝나면 지원해줄 의사가 있다고 했다. 인턴인 게 영 마음에 안들긴 했지만 일단 비자는 보장이 되어있으니 한 번 해보자는 생각에 인터뷰 과정 중 주어진 과제도 열심히 해서 제출했다. 결과는 합격.
문제는 조건이었다. 영세한 스타트업인 것도 알았고, 인턴으로 시작하니까 어느 정도 연봉 삭감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쯤은 예상했지만, 내가 상상도 못 한 범위의 금액을 제시한 것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대학생 때 했던 인턴십 수준을 조금 못 미치는 월급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그쪽 관계자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혹시 인턴 기간이 끝나면 연봉 재조정이 가능한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슬펐다.
사실 나는 직업을 선택할 때 연봉을 일 순위로 꼽는 사람이 아닌지라 비자만 해준다고 하면 다 그만두고 미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터무니없는 연봉 앞에서 막막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치 지난 몇 년간 쌓아온 나의 몸값(?)이 제로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더욱 슬펐던 건 그러면서도 '이걸 놓치면 또 언제 인터뷰를 볼 지 모르는데 ‘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당시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던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때 친구가 나에게 해준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런 걸 팩폭이라 하나. 너무 맞는 말이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미국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지금 보다 넓은 세상에서 일해보고 싶어서’였지만, 그 이유엔 최소 한국에서 내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것들이 보장된다는 전제조건이 깔려있던 것이다. 당연히 누리고 있는 것들 - 월급날이면 친구들과 먹는 맛있는 음식, 큰 마음을 먹어야 하긴 하지만 원하면 시작할 수 있는 필라테스 1:1 수업, 나를 위한 쇼핑, 여기에 약간의 적금까지-가 보장되지 못하는 외노자의 삶이라면 제 아무리 실리콘밸리여도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생각을 당시의 나는 하지 못했다. 내가 상상하는 외노자의 삶은 열심히 일하되 하고 싶은 거 하며 여유 있게 사는 삶이었지 돈 때문에 햄버거 하나 사 먹지 못하면서 홈리스처럼 텐트에서 지내는 삶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은 거다. 더군다나 내가 가려는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세금이 가장 높은 도시였다. 현실감각이 넘친다고 자부하던 내가 어찌 이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했는지,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터무니없는 숫자를 제시한 그 회사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다음날 나는 정중하게 거절 메일을 보냈다. ‘저는 신입사원이 아닙니다’로 시작한 나의 거절 이유와 함께. 그리고 회신이 오기를, 그쪽에선 너무 낮은 연봉이라 내가 거절할 줄 알았다고 한다. ‘거절할 줄 알았다’ 그 어이없고 황당한 말이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6개월 간의 나의 삽질은 그 면접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팩트만 놓고 보면 나의 삽질은 엄연한 실패였다. 결국 난 실리콘밸리에 마케터로 이직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나는 회사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직접 겪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실제로 2년 뒤 현지에서 취업을 시작할 때 도움이 되었던 2개의 큰 깨달음을 얻었다.
1. 현실적인 조건이 해결되지 않는 한 행복한 외노자는 없다- 비자 필수, 일정 수준 이상의 연봉도 필수
2. 어떤 결정을 하든 항상 더 나은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것. 타지 생활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정신을 차리니 여름이 성큼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제 어떻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