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취업, 어떻게 시작할까
UX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전환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꼭 듣게 되는 이 질문에 나는 할 말이 참 많다. 물론 인터뷰에서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으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UX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 한국에서 나의 업(業)이었던 마케터의 삶이 썩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 5년을 마케터로 살면서 회사를 옮길지언정 딱히 직업을 바꿀 이유를 찾지 못할 정도로 내 직업을 좋아했던 나는, 외노자가 되어도 당연히 현재의 커리어를 이어나갈 계획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외노자가 되기 위해 커리어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결정은 6개월 간의 ‘삽질' 후 정해진 것이다. 삽질이란 어감이 좀 그렇긴 하지만 달리 다른 단어로 표현이 안된다. 그러나 꽤나 효과가 있었던 방법이기에 공유해보고자 한다.
막연히 해외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갖고 있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공고에 지원하는 것도, 이력서를 고치는 것도 아닌, 선택 가능한 옵션을 파악하는 것이다. 해외에 가는 방법은 사실 다양하기 때문에, 내 손에 주어진 패를 알아야 전략을 짤 수 있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자마자 성질 급한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힘 들이지 않고, 내 커리어를 유지하면서 쉽게 외노자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미국에서 꽤나 큰 회사의 한국지사를 다니고 있었고, 당연히 베스트 옵션은 회사를 통해 본사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건 불가능했다. 하찮은 실무레벨이 본사로 가는 건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자기네 나라에 널린 인재를 두고 수많은 지사 중 아시아, 그것도 전체 매출의 1%가 될까 말까 한 나라의 마케터를 비자까지 해주며 데려갈 이유는 없었다.
그럼 나에겐 무슨 옵션이 있었을까? 어설픈 경영학도로서 어디서 배운 건 있어가지고 나는 아래의 그래프를 그려보았다.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하는데 쓰이는 이 매트릭스 모델은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노력과 리스크, 가치, 그리고 비용을 고려하여 무엇에 가장 집중할지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법이다.
나의 선택지는 총 4가지 인 듯해 보였다.
1. 실리콘밸리로 이직한다: 가장 우선순위. 목표와 일치하고, 이직이라 커리어 연장선 점에서도 좋다.
2. 싱가포르로 transfer 한다: 본사가 아닌 AP(Asia Pacific) 오피스로 가는 것. 성공하면 싱가포르의 외노자로 살 수 있으나, 나는 싱가포르의 날씨가 싫다. 탈락.
3.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옵션. 미국엔 갈 수 있지만 결국 다시 job을 찾아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난 학생이 되는 게 싫다. 그러므로 보류.
4. 한국에서 이직한 뒤 미국으로 간다: 삼성, LG처럼 미국 지사가 있는 한국 회사로 이직 한 뒤, 해외지사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지사로 발령된다는 보장이 없고, 얼마나 걸릴지도 모른다.
나의 목표는 최대한 단기간 내에 미국에 가는 것이었으므로, 2, 4번은 이뤄진다 한들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1번에 올인하고, 3번은 마음속에 품어두기만 하는 방향으로 우선순위를 결정하게 된다.
우선순위를 정했으니 이제 정말 준비를 시작해보자.
취업은 소개팅이라들 한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새끼손톱만 한 장점을 엄지발톱만큼 부풀리며 자신의 매력을 한껏 어필한다. 해외 취업도 별다를 게 없다. 다만 해외 취업이 국내 취업보다 난이도가 높은 이유는 '그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닌 외국인인 나를 뽑아야만 하는 이유'를 납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6개월 간 내가 했던 노오오오오오력은 총 3+1가지였다.
1. Resume 업데이트 하기
2. 홍보자료 만들기 (feat. 포트폴리오)
3. 전략적으로 지원하기
4. (혹시 학생이 될지도 모르니) 토플 준비하기
취업과는 관계없는 4번을 제외하고, 1,2,3에서 내가 했던 방법들을 소개해보겠다.
Resume의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참 각양각색의 ‘Resume Sample’있지만 사실 포맷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주 영세한 스타트업이 아닌 이상 조그만 규모가 있어도 ATS (Application Tracking System)라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이력서를 스캔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일단 시스템을 통과해야 내 이력서가 사람의 눈에 띌 수 있다. 때문에 해당 포지션에서 요구하는 키워드가 나의 이력서에 얼마나 많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나의 경우 Digital Marketing 포지션이면 해당 포지션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들을 이력서에 최대한 포함시키려 했다. 이렇게 하면 시스템을 통과할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다.
두 번째, Action Verb와 숫자를 활용하여 신빙성을 높여야 한다. 영문이력서를 처음 쓰는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은 바로 내 이력을 어떻게 전환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인데, 여기에 필요한 것이 action verb이다.
가령 내가 했던 캠페인이 매출을 10% 개선 혹은 증가시켰다고 하자. 이 경우에만 Improve, Increase 외에도 Accelerate, Achieve, Boost, Gain 등 수십 가지 단어를 선택할 수 있다. 원어민이 아닌 이상 (사실 원어민도 resume를 쓰는 건 어려워한다) 각 단어가 어떤 뉘앙스로 쓰이는지 잘 모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와 같은 직군의 사람들 이력서를 최대한 많이 훔쳐보는 걸 추천한다.
또한 경력은 가급적 수치화할수록 좋다. 내가 한 일을 ‘숫자'로 설명할수록 나의 이력은 객관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Created social contents across various platforms (다양한 소셜 콘텐츠를 만들었음)
.. 이 아니라,
Created 30+ social contents for company website & blog; generated +20% followers increase (회사 홈페이지, 블로그 용 30개 이상의 월간 콘텐츠 제작→ 팔로우 20% 증가)
.. 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Tip #1. 이력서를 쓰기 전에
- 내가 그동안 했던 일들을 노트에 모두 적어보자. (한글도 좋다) 이 들 중 수치화할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하고 어떤 식으로 나타낼 것인지 고민해보자. ‘몇 명’인 팀을 이끌었는지, ‘얼마'를 만들거나 개선했는지, ‘몇 개'를 만들었는지. 생각보다 많은 걸 수치화할 수 있다.
시각적으로 셀링 하기: 포트폴리오
디자이너에게 포트폴리오는 선택 아닌 필수, 아니 얼굴 그 자체와도 같지만, 마케터였던 나는 포트폴리오가 필요도, 만들 일도 없었다. 그러나 외국인인 나를 셀링 하기 위해선 나의 이력을 시각적으로 어필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Figma가 뭔지도 몰랐던 당시의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모든 오피스 직장인의 친구, 파워포인트로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Claire Kim을 뽑아야 하는 5가지 이유’라는 오글거림 충만한 포트폴리오는 간단한 이력 소개를 시작으로, 내가 했던 일들을 4가지 카테고리로 구성해 보여준다. 그리고 이 카테고리들을 각각 5가지 이유와 연결시킨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이유였던 “Experience from Product to Digital Marketing” 은 나의 업무 스펙트럼을 어필하기 위함이었는데 여기선 내가 했던 대표 프로젝트를 몇 개 첨부하였다.
한 번은 카페에서 같이 공부하고 했던 친구가 나에게 ‘진짜 이 정도까지 해야 되냐?'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하고 안 하고는 본인의 선택이지만, 포트폴리오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우선 1) 텍스트 위주의 이력서나 커버레터에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고, 2) 스토리텔링이 원활하며, 3) 나아가 ‘나 이 정도까지 준비했어!’라는 인상까지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나는 대다수의 인터뷰를 Cold email로 따냈는데, 하나같이 포트폴리오를 인상 깊게 봤다는 피드백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해볼만하지않은가?
Tip #2. 포트폴리오는 어떻게 만들까
디자이너가 아니라면 포트폴리오의 포맷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파워포인트를 선택했지만, Figma 같은 디자인 툴을 활용해도 되고, 노션에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퍼블릭 링크로 공유하는 방법도 있다.
똑똑하게 지원하기
해외 취업을 할 때 지원을 하는 방법은 3가지가 있다.
1. 오픈된 공고에 지원한다.
2. 헤드헌터를 통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방법은 쓰지 않았다)
3. 관심 있는 곳에 직접 콜드 이메일을 보낸다.
나는 1번보다 2,3번이 훨씬 효과가 높다고 말하는데, 단순히 많은 곳에 이력서를 뿌리는 것은 심리적 안정감은 줄지언정 실제 인터뷰로 이어지는 전환율에는 영향을 그다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 결국 인터뷰는 마치 결혼정보회사처럼 나와 회사가 원하는 ‘조건’이 일치할 때만 이루어지니까. 따라서 처음부터 나의 이력이 통할 곳을 추려서 지원하고, 점차 지원분야를 좁혀나가는 것이 승률은 더 높을 수 있다. 일종의 Quality > Quantity (양보단 질)인 셈이랄까.
그렇다면 내가 지원할 곳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 가지 가설을 세워보자.
30년을 한국에서 산 나는 미국 학위도 없고, 할 줄 아는 언어는 한국어와 영어뿐. 그마저 영어도 고만고만한 상태. 가진 이력은 모두 한국에서의 경험. 이런 조건의 나를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하는 곳은 어디일까? 잠정적 결론은 이러했다.
1. 미국에 있는 한국 회사 (국내 회사의 미국지사, 미국 내 한인기업 )
2.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하거나 한국이 주요 타깃 마켓인 회사
3. 한국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회사
그리고 여기에 해당하는 회사들을 집중 공략하기 시작했다. 먼저 한국 대기업의 미국지사는 오픈된 공고를 통해 지원하거나, 링크드인을 통해 recruiter를 찾아 연락을 했다.
미국 내 한인기업, 그리고 나머지 2,3에 해당하는 회사를 찾기 위해선 검색의 신이 되어야 했다. 지금이야 미국에서도 한국 유니콘 기업이 가끔 나오지만 당시에는 정말이지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나는 Kotra, 각종 실리콘 밸리 한인 커뮤니티를 뒤지고 뒤져 운 좋게 아래의 한인기업 리스트를 찾았고, 여기 있는 회사들을 모두 리서치하고, 지원할 곳들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뿐만아니라 Techcrunch, Forture Startup List 등의 미디어에 공개된 스타트업들중, 최근 투자 유치를 했거나 Series B 이상 되는 곳을 적극 노렸다. 투자를 받았다는 건 회사가 돈이 생겼다는 것이고 그 돈은 직원을 뽑는 데 사용될 것이므로. 그렇게 아침엔 출근을, 밤에는 영어공부를, 그리고 주말엔 검색왕이 되는 쓰리콤보의 삶을 2018년의 나는 살고 있었다.
Tip #3. 실리콘밸리 소식을 평소에 접하자
평소에 실리콘밸리/스타트업 뉴스를 접하면 회사들 정보를 얻는데 도움이 된다.
*추천 뉴스레터: 미라클레터 , 이안의 주간실리콘밸리, 더밀크
새해가 되자마자 시작한 삽질치고 비교적 빨리(?) 반응이 왔다. 1월 말에 한 스타트업과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나는 한국에 있으면서 미국에 있는 9개의 회사들과 인터뷰를 보았다. 코로나가 아니었던 시기에 미국에 가지 않고서도 이만큼 인터뷰를 봤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결과를 막론하고 의미 있는 삽질이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시차 때문에 새벽 4시에 인터뷰를 본 적도 있고, 출장을 가는 날 공항에서 본 적도 있다. 몇 군데는 관계자가 한국에 출장을 왔을 때 직접 만나길 원해서 대면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나의 삽질은 그 해 6월에 끝이 났고, 결과적으로 2군데의 오퍼를 받았다. 하지만 미리 말했듯, 나는 2018년에는 미국에 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