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mutilation (자해)
시험이 언제냐는 듯 매일매일이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이지만 날짜가 다가올수록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감을 많이 느끼나 보다. 학창 시절 꽤 오랫동안 손톱 주변 살들을 뜯던 버릇이 있었다. 고2-3 때에는 곱슬머리를 골라 책상이 수북할 때까지 뽑았다. 아마도 강박이 있는 성격인 듯한데 어른이 된 후에 없어졌던 그 버릇들이 다시 생겨나 손톱 주변 살을 매일매일 뜯어내고 곱슬머리를 뽑고 있는 나의 모습을 마주하고서는 현타가 왔다.
작년 겨울 사직 이후에 평온함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불쑥 고개를 든 그 버릇들 덕분에 내 안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인지하고, 생각날 때마다 다시 명상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험을 40여 일 앞둔 지금도 여전히 완전히 전념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이도 있고, 생업도 있고 집안일도 셧다운 시킬 수는 없다. 학생 때처럼 공부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스퍼트를 내기 힘들다. 하루 잘 된다 싶으면 그다음 날은 여지없이 글자들이 머리에 쏙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헛돌고 있다.
한국 의대에서의 시험과 다른 점
이 시험은 매우 호흡이 긴 시험이다. 그리고 그 호흡을 내가 정할 수 있다.
의대를 다닐 때로 치면 가장 호흡이 긴 시험은 연말시험과 국시였을 것이다. 본과 3학년이 끝나고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 외과, 정신과 등등을 한꺼번에 치른 연말시험, 4학년 졸업 전 봤던 국시, 그리고 전문의 보드 시험 역시 전집으로 10권 가까이 공부해야 하는 시험이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까다롭게 느껴진다. 의대를 다닐 때 봤던 시험은 물론 그것도 절대 쉽지 않았지만 정해진 범위만 시간을 들여 들입다 파면 음 이제 여기는 웬만큼 훑었다는 생각이 들며 시험을 칠 준비가 되지만, 이 시험을 공부하면서 이걸 머리에 집어넣고 나면 저게 빠져나가는 마법을 경험했다. 물론 나이 탓일 수도.
그 이유는 일단 anatomy, biochemistry, pathology 등 의사들이 제일 어려워하는 basic science를 포함하고 있어 다루는 범위가 훨씬 넓기도 하고, 각각의 subject와 system이 따로 노는 게 아니라 방대한 지식을 모두 유기적으로 통합하여 공부를 하는 방식이다. 그게 참 재미있고 경이롭고 놀랍기도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한 순간도 완벽하게 마스터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완전히 푹 적셔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고 계속 반복적으로 가랑비에 젖게 하여 일부는 말라가고 일부는 습기를 머금은 그 상태로 시험장에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지친다는 의미
시작할 때 즈음, 오래 붙들고 있다고 해서 잘 보는 시험이 아니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왜 그럴까, 집중해서 달리고 달리면 되는 거지, 결국 오랫동안 많이 보는 사람이 잘 보는 거 아니겠어?라고 생각했다. 1독을 다 끝내기도 전 중반에 다다랐을 때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물론 나처럼 졸업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사람은 공부 기간을 오래 잡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1년 365일 매일 많은 양을 쏟아부을 수는 없다. 그러다 보면 지난주 쏟아부은 지식이 빛의 속도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일주일 바짝 달려 시험을 보던 블록 때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다.
지치면 며칠을 빌빌대며 날리기도 한다. 앉아서 지문을 읽고는 있지만 심지어 남의 나라 글이라 그럴 때에는 지문을 읽어도 입력이 안된다. 하지만 며칠 날리는 것이 아주 치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또 며칠을 비실대다 보면 또 충전이 되고 나아갈 힘이 생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마지막 전념'-소위 dedicated period라고 부르는-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시험장에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약간은 불안하다. 그래도 모든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멘탈이 아닐까 생각하며, 그간 꾸준히 걸었으니 하던 대로 걸으며 결승선에 도달하기만 해도 성공이라 토닥인다. 러닝을 하는 마음으로 멈추지 않는 것에 의미를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