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 투병기로는 한 달 만에 찾아뵙네요. 엄마 맞이하는 준비를 하고 보살펴 드리다 보니 몸살이 나버렸어요.
10월이 되자 푹푹 찌는 더위가 사라지고,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못내 달큼하게 느껴진다. 청명한 하늘 아래 몽글몽글 떠가는 뭉게구름을 올려다보는데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살며시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 바닥에 툭툭 떨어진 나무열매들. 볼에 닿는 서늘한 공기. 가을이 왔다.
강아지 하네스 줄을 잡고 걷다가, 문득 손가락을 꼽아 세어보았다. 1월 수술 후 강아지와 함께 공원에 나온 게 겨우 세 번이라니! 내 한 몸 추스르기도 벅차서, 드문 산책은 언제나 나 혼자였다. 집에 둔 강아지에게 미안해서 결심했다. 앞으로 매주 주말 새벽, 우리 둘이서 함께 걷기로.
그렇게 오랜만에 찾아간 새벽의 중앙공원에서, 나는 멈춰 섰다.
사람들이 뛰고 있었다. 아니, '뛰고 있다'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등번호가 새겨진 민소매 러닝셔츠와 핫팬츠, 선글라스, 손에 든 생수병까지.
완벽한 러너 크루 차림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트랙을 가르고 있었다. 공원에 가득한 러닝 크루들이라니!
더 놀라운 건 그들의 나이였다.
나보다 위, 혹은 비슷한 또래. 새벽 공기를 가르며 땀을 흘리는 그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단단했다.
나도 언젠가 마라톤을 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까마득하게 오래전 일 같았다. 사는 게 바빠서, 아이들 챙기느라, 검사 다니느라, 수술 후 회복한다고, 글 쓰느라고… 그렇게 잊고 살았다. 아니, 잊은 게 아니라 포기했던 거였다.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공원은 러너들로 붐볐다. 가을 마라톤 시즌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요즘은 참가 신청이 금세 마감될 정도로 인기라고 했다.
마침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 친구를 만났다. 뱃살이 쏙 빠진 그 친구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내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이번 가을에만 네 개 대회에 나가." 친구가 말했다.
"생각만 하면 안 되더라. 그래서 일단 신청부터 했어. 날짜 정해놓고 몸만들기 시작했지. 요새 매일 밤 뛰고 있어."
그날 밤, 나는 달력을 펼쳐놓고 날짜를 짚어가며 계산했다. 수술 후 1년. 회복기를 지나는 시간. 내년 봄쯤이면, 5km 정도는 뛸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 주부터 시작했다. 공원에서 뛰었다 걸었다를 반복했다. 계속 뛰는 건 무리였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면 여전히 겁이 났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작아진 폐로 숨 쉬는 몸이 버텨줄까 불안했다. 그래도 2km를 뛰다 걷다 하니 30분 만에 1만 2천 보가 찍혔다. 휴대폰 화면에 뜬 숫자를 보며 씨익 웃음이 나왔다.
이번 여름 내내 나는 아파트 계단을 올랐다. 본격적인 계단 오르기는 처음이었다.
한창 더울 때는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라 매일, 묵묵히, 계단을 밟았다. 그 덕분에 수술로 빠졌던 근육이 조금씩 돌아왔다. 다리에 힘이 붙었다. 달릴 수 있는 근육이 생겨났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나만의 루틴을 만들기로 했다.
주중 새벽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주말 새벽엔 뛰고 걷는다. 특히 달리기는 한계를 밀어붙여야 하는 일이라 더 큰 결심이 필요했다.
가족과 함께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 가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가끔 숲을 찾아가고, 매일 호흡을 연습하기로 했다. 폐의 기능을 회복하고, 더 확장하기 위해.
수술 후 한 달간 쓰다 방치했던 폐 운동 기구도 다시 잡았다.
코로 숨쉬기,
깊이 숨쉬기,
느리게 숨쉬기,
그리고 숨 참기. 폐활량 검사를 하는 것처럼 숨을 참았다가 크게 내쉰다. 이렇게만 해도 머릿속이 맑아지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느린 호흡이 폐뿐 아니라 전신 건강과 장수에 효과가 있다는 건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주 1).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들숨과 날숨이 단순한 움직임이 아님을, 정교한 균형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수술대 위에서 폐는 내 안에 있었으나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호흡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내 의지와 무관한 작용이었다. 살아 있을 뿐, 숨을 쉬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던 그 수많은 순간들.
숨이 멈춘다면, 그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죽음이 아닐 것이다. 바로 나라는 존재가 이 세계에서 점차 사라지는 과정이다. 명상에서는 호흡을 관찰하라고 한다. 공기가 폐를 채우고, 혈액이 그것을 받아들여 세포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을.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단순 행위를 관조해 본다. 이제는 깊이 숨을 들여 마시고 내뱉는 행위가 내 의지에 반응한다는 귀중한 통잘을 깨달았다.
나는 인식한다. 들이쉬는 숨이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님을. 숨은 내가 이 순간 살아있고, 세상에 내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다. 들숨과 날숨 사이, 바로 그곳에 나의 삶이 있는 것이다.
나의 목표는 명확하다. 작아진 폐로 더 건강한 숨을 쉬는 것.
수술 전보다 더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
아니, 어쩌면 내 평생에서 가장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
공원에서 땀 흘리며 달리는 러너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힌다. 내년 봄, 나도 저들 사이에서 뛰고 있을 것이다. 등번호를 달고, 따스한 봄 햇살 아래서. 작아진 폐로도, 나는 달릴 수 있다.
새로운 숨으로,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갈 것이다.
주 1. 호흡의 기술, 제임스 네스터.
"폐가 작아지고 효율이 떨어질수록 연구 대상자는 더 빨리 병에 걸려 죽었다. 악화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았다. 더 작아진다는 것은 더 짧아진다는 것을 뜻했다. 폐가 더 크다는 것은 곧 수명이 더 길다는 뜻이었다."
"폐를 키우고 신축성을 유지하는 연습만 규칙적으로 하면 폐활량을 증가시키거나 유지할 수 있다. 적당히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만으로도 폐 크기를 최대 15퍼센트까지 늘릴 수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폐 자체는 30세에서 50세까지 약12퍼센트 용량이 감소한다. 나이 들수록 더 빠르게 감소하고, 여성이 남성보다 휠씬 더 나빠진다. 80세까지 생존하면. 20대 때보다 공기를 30퍼센트 덜 들이쉬게 된다. 그러니 더 빨리 더 세게 숨을 쉴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호흡 습관은 고혈압과 면역 장애, 불안장애 같은 만성질환으로 이어진다."
*이미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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