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추석에 이어, 이번 추석에도 내 인생의 기록을 세 개나 갈아치운 일이 생겼다. 나는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며느리답게, 결혼한 후 20년이 넘도록 명절이면 단 한 번도 빠짐없이 항상 시댁으로 간다. 그리고, 1박 2일 동안 내 에너지가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노동력을 무상으로 제공해 준다. 명절에는 시아버지께서 장남이었기 때문에 손님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손님이 올 때마다 새 상을 차려 내주었다. 설거지는 막내며느리인 내 담당이었는데, 어느 명절 때는 하루에 설거지를 7번이나 할 정도로 시댁은 일이 많은 집이었다.
그런데 작년 설에 사건이 하나 터졌다. 큰 아이가 곧 고3을 앞둔 겨울방학 때라 중요한 시기였고, 아이는 겨울캠프에, 학원 뺑뺑이에 관리형 독서실까지 삼단 콤보로 바쁠 때였다. 그래서, 큰 아이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집에 있게 하고, 둘째 아이만 데리고 시댁에 가자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러나, 남편은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극구 반대를 했고, 결국 큰 소리까지 나왔다. 부부싸움이 끝난 뒤, 큰 아이도 억지로 끌려가야 했다. 아이가 혼자 집에 있는다고 해도 얼마나 공부를 하겠는가? 침대에 누워 영상이나 보며 빈둥대겠지. 그래도, 그동안 공부하느라 애쓴 아이가 스트레스와 피로라도 풀게 놔두고 싶었는데, 남편은 끝까지 허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하지만 현명하게 더 이상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가서 있을 곳도 마땅치 않은데, 무슨 대~단한 집안이나 된다고!’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화가 풀리지 않았던 나는 용감하게(?) 시어머니께 남편의 만행을 일렀다.
“어머니, 솔직히 민이가 지금 고 3이라 공부할 게 정말 많잖아요. 애는 못 온다는데, 글쎄, 애 아빠가 난리 치면서 억지로 끌고 왔어요. 덕분에 저희 부부는 아침부터 싸움까지 했다니까요.”
우리 집에서 그렇게 큰소리치던 남편은, 본가에 와서는 내 말에 웬 일로 아무 대꾸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시어머니께서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두르며 말씀하셨다.
“아이고, 내가 오라고 했어. 애 공부하느라 힘드니까 꼭 데리러 오라고. 와서 음식 좀 먹이자고 했어.”
“어머니, 다른 집들은 고3 되면 명절 때 오지 말고 쉬라고 한다는데요, 휴,, 저희는 어머니 덕분에 이혼할 뻔했네요.”
시어머니는 제대로 못 먹었던 어려운 시절을 오래 겪은 탓인지, 항상 먹는 것이 무조건 제일 중요한 분이었다. 남편도 비슷하다. 엥겔지수가 높은 생활은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닌데……
“알았다. 다음에는 오지 말라고 할게. 민아, 추석 때는 공부하고 오지 말거라”
솔직히 기가 막혔다. 추석 때는 정말 수능이 코 앞이고 면접 준비로 한창 바쁠 때인데 어떻게 온단 말인가…… 시댁은 식사할 때도 가족이 다 같이 모여 한 번에 먹지 않는다. 여자들은 나중에 식사할 만큼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데다가, 아이가 공부하거나 쉴 곳도 마땅치 않다. 시아주버니 사업이 잘 안 되면서 큰 집 네 식구가 모두 시댁에 들어간 이후로, 우리 네 식구가 있을 공간이 없어졌다. 그전에도 시댁에 가면 아이는 근처 스카를 찾아 그곳에서 공부해야만 했다. 이제 고3을 눈앞에 두고 한참 예민해지고 까칠해진 큰 아이 입장에서는 가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아이들이 할머니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실까? 온통 자극적인 음식인데, 소화도 안되고 위장염인 아이한테 뭘 먹으라는 건지…. 애 입맛에 맞지도 않는 음식 먹으러 쉬지도 못하고 왕복 2시간 거리를 오라고 했다고?’
내 아이는 고2 겨울방학 때부터 몸 여기저기에 본격적으로 다발성 염증이 생기는 등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링거도 여러 번 맞았다. 더 열받는 것은 큰 집 조카는 대학생이 된 이후, 매년 명절 때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매번 외가와 함께 여행을 다니기 때문이다.
‘참나, 그 조카한테는 뭐라고 말 한마디를 못하면서, 왜 고3 된 우리 애가 어떤 상태인지 이해도 안 하고 억지를 부려……’
내 어린 시절, 추석은 즐거움과 창조의 시간이었다. 엄마가 빻아온 쌀가루를 아빠가 치덕치덕 반죽해 송편 만들 준비를 모두 끝내면, 우리 남매는 기대감에 차서 기다리다가 얼른 모여들어 옹기종기 앉아서 즐거운 창작놀이를 시작했다. 엄마가 준비해 준 송편 속들- 콩, 밤, 깨 중 각자가 제일 좋아하는 걸 골라 예술작품을 만들듯이 송편을 예쁘게 빚곤 했었다. 당연히 세 남매는 모두 깨 송편을 만들었고, 아빠는 밤 송편, 엄마는 콩 송편을 정성스레 만들었다. 매년 발전하는 막내의 송편을 보며 짓궂게 놀려주는 것도 추석의 낙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결혼한 후 추석은 설과 함께 나에게 중노동과 불편함을 상징하게 되었다. 추석의 상징인 송편도 없을뿐더러, 명절 때 시댁의 주방에서 몇 시간이고 계속 서서 눈치를 보며 일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중노동이 맞았다. 게다가 자유로웠고 따뜻했던 친정 분위기와 달리, 여성이 무시당하고 일만 해야 하는 시댁의 삭막한 분위기는 버티기 어려운 고역이었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시댁에서 명절을 지내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나머지 연휴 기간에는 몸살로 앓아눕곤 했다.
작년 설에 고3 해프닝이 있은 후, 작년 추석에는 시어머니의 공식적인 허락 하에 시댁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결혼한 지 2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드디어 내 인생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물론, 고3 엄마의 역할은 충실히 수행해야 했기에, 3일 내내 명절특강 수업을 듣는 아이를 위해 대치동으로 왕복 라이딩을 했어야 했지만. 그래도 덜 힘들었다.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어느덧 1년이 지나 다시 추석이 돌아왔다. 슬프게도(?), 큰 아이가 무사히 대학생이 되는 바람에 금년에는 아무리 생각을 짜내도 시댁에 안 갈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남편은 재작년 말, 큰 아이가 고2였던 해에 해외 발령으로 나가버렸고, 1년에 한두 번만 한국에 들어왔다. 그래서 이번 설과 추석에 남편도 없이 남편의 본가에는 더더욱 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도 왜 가냐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금년 설에 기대를 버리지 않는 만행을 저질렀기에 고민이 된 것이다. 글쎄, 설 전날 저녁과 설 당일 아침 제사를 지내는 시간에 맞추어 화상통화를 두 번이나 시도한 것이다! 지쳐있던 나는 짜증이 확 나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남편은 막내에게 전화를 걸어 본가에 있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명절인사를 했었다.
시댁에 있는 모습을 확인할 만큼 용의주도한 남편 성격을 생각하면, 추석 때에도 분명히 같은 패턴을 보일 것이 확실했기에 시댁에 안 갈 수는 없었다. 작년 추석에 한 번 안 간 것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만약 우리가 안 갔다는 것을 남편이 알게 된다면?’
오우,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동안 명절 때마다 남편이 보여준 행동을 돌이켜 보면, 아주 단순하고도 일정한 패턴을 보여준다. 본가에 가서 내가 일하는 내내 남편은 잠자고, TV 보고, 핸드폰 보면서 쉰다. 아주 가끔, 10년에 2번 정도 내가 몸이 정말 안 좋을 때 설거지를 해준다. 그때마다 시어머니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란… 시어머니의 속마음이 아주 실시간으로 들리는 듯하다.
‘아이고 얘(며느리)가 해야 하는데, 왜 돈 버느라 고생 많은 아들이 하나…… 편히 쉬어야 하는데......’
시댁에서 1박을 보내고 점심 식사 후 주방 뒷정리까지 모두 끝난 후에, 느지감치 친정으로 가곤 했다. 남편은 친정에 가도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엔 침대 대신에 소파에 누워 잠을 자거나 쉰다. 70살 넘은 장모님 앞에서도 달라지지 않는, 그 예의 없는 남편의 행동을 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고 뭐라 해도 남편의 자세는 변함이 없더라.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도 포기해 버렸다.
‘휴...... 이 놈의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 여성 차별은 도대체 언제쯤 끝나는 거야…...’
《82년생 김지영》은 어쩌면 한국의 현실 문제를 굉장히 부드럽게 축소시켜 풀어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비록 나 대에는 실패했지만 우리 딸들 대에는 제발 여성 위주의 명절 노동과 소소한 문화적 성차별이 없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