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만나서 그동안 지낸 얘기를 털어놓을 때, 흔히 자녀 안부도 서로 물어보곤 한다. 그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이 일견 쉬워 보이지만, 누구에게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아는가? 나는 아이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에나 위와 같은 긍정적인 대답이 가능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적응하다가 1학년을 마칠 때가 되면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인원수이다. 학생수가 감소하는 문제는 상당히 민감하다. 학생 모수가 줄면 그만큼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는 인원도 감소하기 때문이다. 1학기 말부터 빠지는 인원은 소수이지만, 2학기 말에는 그 수가 본격적으로 늘어나 등급별 인원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이들은 1학년 성적과 힘든 공부 때문에 비전이 보이지 않아서, 또는 친구 관계 때문에 학교에 가는 것이 힘들어 자퇴를 하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버린다. 유학을 가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정신과 육체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 휴학했다가 다시 복학하는 아이들도 있다. 나는 복학생이란 대학교에나 가야 만날 수 있는 존재, 즉 군대 제대 후 복귀한 남학생만을 의미하는 줄 알았지, 고등학교에도 존재하는지는 미처 몰랐었다.
그런데, 학부모 입장에서 아이가 학교에 다니던 것을 중간에 멈추게 되고, 다른 대안을 찾아봐야 한다는 것은 정말 고단하고 슬픈 일일 것이다. 일단 내 아이가 소위 ‘루저’가 되는 낙인이 찍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 때는 부모가 마음을 다잡고 아이가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위로하고 케어하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할 것이다. 낙인에 더해, 나와 아이를 둘러싼 모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또 새로운 곳에 발을 디뎌야 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 남들이 가보지 않은 비정형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만약 나와 아이의 의사가 다를 경우에는 혹시나 내 결정으로 인해 아이의 미래가 더 안 좋아질까 봐 노심초사하고 많은 고민을 거쳐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한 학년에 3명이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한다면, 사실 3명의 몇 배나 되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다른 대안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보면 된다.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을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잘 해결해 나가는 아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여 상처받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다. 어찌 보면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는 순간 엄마들의 본격적인 괴로움이 시작된 것이다. 다만, 그 괴로움의 강도는 아이가 처한 상황에 따라 확연하게 다르지 않을까.
사실 나의 큰 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나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아이는 수준 있는 독서와 깊은 사고력 및 분석력을 기반으로 디베이트와 그리고 글로벌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전 세계 정책 및 사례 공부를 통해 탄탄한 논리체계를 갖춰 소위 ‘넘사벽’이라 불리던 아이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도 교장실에서 상을 받은 몇 안 되는 아이 중 하나였으며, 찾아뵙는 선생님마다 칭찬을 하며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던 아이였다. 선생님은 오히려 나에게 좋은 학원 정보를 조언받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내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외국인들 사이에서 터프하게(?) 자라서 많은 일들을 겪다 보니, 멘탈도 단단해져 작은 일에는 쉽게 흔들리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이성적이고, 때로는 시니컬한 성격의 전형적인 T형이었다.
아이의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도 원래 최상위권 학교를 목표로 했다가, 아이와 의논한 끝에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만한 수준이 되는 적절한 경쟁강도의 학교를 골랐다. 입시 실적이 좋은 학교였기에 나는 학교와 선생님을 믿었다. 따라서, 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라이딩 문제를 빼고는 아이 학교 일에 관여하지 않았고 내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아이가 1학년 생활을 끝낼 때가 되니, 내가 생각했던 이상과 아이가 직접 부딪치는 학교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학부모를 처음 경험하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범주와는 차원이 다른 이슈들이 끝없이, 그리고 조용히 발생하는 것이 고등학교 현장이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눈치챈 것이다. 이 말은 즉,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학교에서 당연히 실현되거나 하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내 예상과는 전혀 달리, 그저 명분과 반대를 위한 논리에 의해 학교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나름 능력 있다고 인정받아와 자존감은 하늘을 찌르고, 욕심도 많으며, 경제적으로도 준수한 아이들이 한 학교에 모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별 어려움 없이 본인이 원하는 바를 쉽게 이루면서 양보도 별로 해본 적이 없던 자기주장 강한 아이들이 수백 명 모여 하루종일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는데, 그 속에서 크고 작은 갈등과 문제가 계속 발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갈등이 잘 해결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 아이들은 본인과 관련된 소문이 학교에 빠르게 퍼지는 것을 힘들어했고, 버티다 한계에 다다르면 학교를 떠나고 싶어 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는데?'라는 질문을 해결할 정답은 글쎄, 없지 않을까. 차선책이 있으면 다행이다. 아이의 부모가 열심히 대안을 알아보고 아이와 상의하면서 해결하고자 하는 힘든 과정에 있음을 알게 된 이상 나는 그냥 지나치지를 못했다. 그렇다. 나는 일명 ‘오지라퍼’였던 것이다. 다른 엄마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방안을 조언해 주는 일이 늘어났고, 나에게 학교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선후배 및 동기 학부모들도 늘어났다. 그 해 겨울 나는 아이와 학교 개선을 위해 내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다양한 선배 및 동기 학부모들과 만나서 몇 시간이고 회의를 하며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어떻게 학교에 얘기하여 반영시킬 것인지 현실적으로 고민했다. 모인 사람들은 다들 좋은 사람 같았다. 가정 일과 작은 아이를 팽개친 채 학교 개선을 위해 머리를 맞대는 엄마들이라니, 나름 멋지지 않은가? 회의를 10시간 가까지 한 적도 있을 만큼 열정적인 분들이었다. 체력만 된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얘기할 분위기였다.
아이가 고2가 되었을 때 새로 조직된 위원회에 속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좋았고, 위원장을 맡은 선배 학부모가 덕과 리더십이 있어서 나와 위원회를 잘 이끌어 주었다. 위원회를 세팅하는 과정에서 간부였던 우리는 서로 많은 고민을 했고,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만들고 학교에 도움이 되게 연결할 것인지를 중요 과제로 삼았다. 한 밤중에 SNS 단톡방에서 얘기하다가 답답하면, 남편이 잠든 틈을 타서 조용히 거실로 나와 새벽까지 직접 통화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아이디어도 얻었으며, 상황을 더 개선시키는 방향으로 정리를 했다. 이를 문서로 정리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기에, 학교에 제안할 기안서도 여러 번 썼다. 우리의 생각은 마치 하나의 뇌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갔다. 몸은 고되었지만 참 즐거웠다. 승승장구하는 우리 위원회를 두고 질투와 견제가 있었고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사건들도 발생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들의 연대는 더욱더 단단해졌다.
그러던 어느 봄날, 우리 위원회 위원 한 분이 모임에 와서얘기하던 중 갑자기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울리던 그룹에서 왕따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여러 아이들 앞에서 대놓고 무시하고 놀리는 괴롭힘으로 인해 결국 겨울방학 때는 아이가 자살을 시도했었다는 가슴 아픈 얘기를 들었다. 아이는 집에 귀가하는 금요일만 되면 학교를 1등으로 벗어났고, 집에 도착하면 잠만 자려고 하면서 학원도 빠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명백한 현실도피 행동이었다. 그 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로 낙인찍히자. 다른 아이들도 그 아이를 가까이 하지 않아 결국 학교에서 하루 세끼를 모두 ‘혼밥’ 해야하는 상황으로 악화되어 있었다. 그런 고통스러운 학교 생활을 몇 개월째 하고 있는데, 아이가 어떻게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가치관도 뚜렷하고 똑 부러지고 밝았던 아이는 당연히 어두워졌고 어깨도 못 펴고 다녔으며, 성적은 당연히 하락했다.
충격이었다. 한참 친구가 중요하고 민감한 시기인 10대 여학생에게는 너무 가혹한 상황이 아닌가. 학교에서 발생하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지성이 있는 학생이라면 하면 안 되는 행동이 반복되었다. 귀하게 키운 아이가 자살하려고 하고, 해결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 한다니, 자식의 어미 된 입장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 위원은 우리가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했지만, 나의 정의관으로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나의 ‘오지랖’ 시동이 다시 걸렸다. 그날 우리들은 마땅히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려야 하는 상황이니 공식적으로 행동할 것을 말해주었고, 좀 더 자세히 알아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 후로 나는 매우 바빠졌다. 밤이 되면, 퇴근을 늦게 하는 신뢰할만한 법조인인 어머니께 연락을 드려 현재 바뀐 규정과 조건을 파악했고, 직접 규정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리고 피해학생 엄마와 통화하면서 알게 된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 엄마는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고맙다고 울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너무 가슴이 아파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이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학생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는 더 충격적이었다. 학교폭력위원회 위원장이 바로 그 가해 학생의 부모인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니......
‘부모를 믿고 저렇게 행동한 걸까? 그 부모에 그 자녀라는 말이 딱 맞네. 후, 정말 얘들 교육을 잘 시켜야겠어.’
생각은 자연스레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 엄마를 도와주고자 했던 나와 위원장 선배 어머니, 그리고 학교개선을 위해 머리를 함께 맞대었던 선배 어머니들이 연대하여 진행상황이나 조심할 점을 공유하면서 계속 도움을 이어갔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방법을 마련하여 결국 학교폭력위원회 소집 전에 학교에서 회의가 열렸고 아이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받았다. 또 하나는 부적절한 직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정치적인 문제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결국 여러 단계와 과정을 거쳐서 가해자의 부모는 위원회 간부 자리에서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위원직 자체를 사임했다. 학교에서는 곧 보궐선거를 진행했다. 시간이 흘러 그 피해 학생은 자퇴하지 않고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우리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 긴긴밤의 대화들과 공감의 눈물들은 모두 희미한 과거로 남았다,
하지만, 그때 함께 연대했던 인연은 현재 진행형이다.
3명의 선배 어머니와 나는 금년 봄에 다 같이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동안 개별적으로는 연락했지만 4명 모두가 함께 만난 것은 처음이라 기대가 되었다. 이제는 아이들 모두 대학교에 재학 중이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뇌 구석에 남은 여러 상처들과 오해들, 그리고 사과의 마음을 다시 소환했고, 다음번 모임에서는 좀 더 발전적인 대화를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즐거운 회포의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문득 가해학생 문제가 불거졌을 무렵 읽었던 루리 작가의 ‘긴긴밤’이 떠올랐다. 2년 전, 열대야로 잠 못 이루던 여름밤에 내 눈물을 한 바가지는 뽑아내면서 탈수증상이 올 뻔하게 만들었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지구상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이었다. 그의 가슴 아픈 긴긴밤들을 눈물 속에서 읽어 내려가다가, 노든이 죽기 전에 아기 펭귄과 함께 한 연대의 긴긴밤도 감동의 눈물 속에 읽었더랬다. 혼자만의 고통의 시간이었던 노든의 긴긴밤이 어린 펭귄을 통해 희망과 애정이 있는 ‘우리의 긴긴밤’으로 바뀌며 노든의 과거의 고통을 걷어내는 부분에서, 자연스레 그 당시 나와 그녀와 우리들의 힘들었던, 그러나 극복해 내었던 경험들이 연상되어서 그 책에 더 몰입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