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님 보고 있나.
한국의 갑을관계 문화는 보통 위아래를 철저히 구분짓고,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뭐든지 함부로 해도 된다는 무례함, 아랫사람이 벌벌 기면서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기대, 자신은 원하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서 아랫사람이 마음을 읽어 눈치껏 자신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는 독심술 세 가지가 핵심적이다. 이 서열은 직급(신분, 직무 포함), 연공서열(나이 포함), 소속 (회사, 공무원 등)을 계량화해 정해지므로 개개인의 의사나 능력은 반영되지 않는다.
나무위키 갑과 을 中
우리의 생활에서 갑을 관계는 뗄 수 없다.
업무 중에도, 사내에서도,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회사에서도 우리는 갑이 되기도, 을이 되기도 한다.
최근 프로젝트 마무리를 위해 매주 "갑"님과 회의하며 정신적인 고통을 견디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릴 힘들게 하는 소위 "진상 갑"님의 행동에 대해 정리해봤다.
※ 이 글은 주로 발주사와 수주사의 관계 속에서의 발주사 소속 갑님들의 유형임을 밝힌다.
갑님의 전형적인 유형이 바로 답정너이다. 의견을 물어보는 척 하지만 결국엔 본인들이 원하는 답이 정해져 있고, 그 대답을 들을 때까지 계속된다.
갑 : 저희가 ABC안 중에 어떤 안으로 진행할지 고민중입니다. 보시고 의견 부탁드려요
을 : 지금 주신 A안은 이러이러한 리스트가 있습니다. 이런 프로젝트의 경우 B안으로 진행했던 것이 리스크가 적고 결과도 더 좋았습니다. B안이나 C안으로 가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갑 : 아 그렇군요. 그런데 A안은 블라블라한 장점이 있고 B,C안은 없는데요.
을 : 그렇지만 그만큼 리스크가 커서 그 부담을 안고 가야합니다.
갑 : 그래요, 그럼 A안으로 하겠습니다.
협상의 여지 없이 본인이 원하는 데로 프로젝트를 끌고 가고 본인이 원하는 방향대로 되지 않을 시엔 노발대발 화를 내는 전형적인 보스형 갑님이다.
누구나 한번쯤을 겪어봤을 이 유형은 본인이 최종내용을 컨펌하거나 요청해놓고 나중에 오리발을 내밀고 다시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냥 본인의 실수를 쿨하게 인정하고 다시 해달라고 하면 될텐데 증거를 들이밀때까지 끝까지 우기고 서로 감정만 상하게 된다.
을 : 이 부분은 어느 분께 요청드리면 될까요.
갑 : 아 그부분은 알아서 해주시면 됩니다.
을 : 알아서요??? 이정도로는 정리해주셔야 저희가 다음내용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갑: 전문가이시잖아요~ 알아서 진행해주세요.
못합니다. 라고 말하면 전문성이 떨어져보이고 능력없는걸 인정하는 것 처럼 만들어 버린다.
당연히 무리한 요구에는 추가적으로 견적을 요청하거나 협상을 요구하지만 결국 반려되는 경우가 많다.
이럴꺼면 니가 하세요 라는 말이 절로 나올정도로 분야를 안가리고 사사건건 참견하는 갑님과 같이 일하면 담당자를 그저 아바타가 된다.
직접 옆에 앉아서 문서를 함께 고치거나 디자인을 수정해달라고 요구하는 일도 있다.
이런 갑님들의 대표적인 사례가 금요일 오후에 일 던져주고 월요일에 출근하면 확인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갑 : 결과물 정리해서 월요일 오전까지 보내주세요.
을 : 지금 금요일 오후인데... 월요일 오전까지요??
갑 : 네, 월요일 오전 11시에 회의가 있어서요
을 : 작업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럼 조금 일찍 말씀해주셨으면 좋았을텐데요..
갑 : 아..지금 결정이 된 사항이라서요. 다음엔 좀 일찍 말씀드릴께요. 중요한 회의이니 결과물에 신경써주세요.
하지만 대부분 다음에도 똑같이 시간이 촉박하게 준다.
최근 진행한 프로젝트 담당자는 오픈 얼마 안남았는데 왜 주말에 안나오냐며 윗사람에게 연락해, 반 강제로 담당직원들을 주말 출근 시켰던 사례도 있다.
이런 분들이 꼭 아침 9시 출근시간 딱 맞춰서 전화하거나 퇴근시간 이후에 전화해서 담당자를 찾고, 사장님보다 다 열정적으로 담당자의 출퇴근을 체크한다.
이런 섬세하신 갑님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프로젝트 내내 고생할 수도 있다.
뭔가 하나 맘에 안들고 어긋나면 끝까지 꼬장을 부리는 경우가 많다.
을 : 어제 보내드릴 시안 받아보셨나요?
갑 : 네.. 봤는데 좀 그러네요...
을 : 아, 그러신가요? 어떤 부분에서 마음에 안드시는지 말씀해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갑 : 그냥 제가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니 시안 더 보내주세요.
사실 시안이 마음에 안드는것이 아니라 이전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에 반기를 들었다거나, 부정적인 의견을 내거나 했을때 감정이 상해서 그 이후엔 다 맘에 안든다고 퇴짜를 놓는다.
추상적인 표현의 요청으로 담당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시크하면서 화려하게, 플랫한 스타일이라고 해놓고 정작 샘플로 보내주는 참고자료들은 입체적인 시안들이다.
이런 갑님들은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그냥 예쁘고 인기많으면 다 좋은거라고 생각한다.
정리하고 보니 너무나 많은 갑님들의 유형이 있다.
갑과 을이 아닌 프로젝트를 협업해서 진행하는 조력자라고 생각하고 일을 진행한다면 좀 더 일을 수월하고 아름답게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이번주 목요일 라디오 오프닝 멘트로 마무리해본다.
이 세상의 모든 '을' 화이팅!
"업무상 을로 살아가는 나와 진짜 나를 혼동하지 말 것"
작가 이영희의 책 <어쩌다 어른>에 나오는 이 말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또 종종 잊고 사는 나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죠.
하루종일 나는, 업무상 을로 살아가는 날이 많을까요? 진짜 나로 살아가는 시간이 많을까요?
이 시간을 어떻게 잘 배분하느냐에 따라, 어쩌면 내 삶의 질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것.
그때가 언젠지 현명하게 결정했으면 하는 목요일, 여기는 오늘 아침 정지영입니다.
2018.09.07 FM 라디오 <오늘 아침 정지영입니다> 오프닝 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