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고 위태로운 노량진

by 나연

단단하고 매끄러운 얼굴에 소박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종이와 펜을 들고 싸우고 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무언의 안도감을 주고받으며 공부하고 있다. 2016.9.29.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한 번쯤 들러본다는 노량진 고시촌. 청춘 백수들의 커다란 마을이자 조용히 흔들리며 버티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그곳에 나는 길게는 아니고 반년 정도 머물공부한 적이 있다. 노량진은 생각보다 투쟁 본능을 일깨우는 곳은 아니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거기서 오는 어떤 종류의 연대감, 그리고 그 안에 내가 속함으로써 얻게 되는 안도감 같은 것들이 공부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곳이다.


안전지대에서 사람들은 자신만 취업을 못한 채 어둠 속에 있는 것이 아님을 생생하게 눈으로 보게 된다.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책을 들고 아침부터 자습실에 모여드는 광경과, 직강이 진행되는 강의실의 더운 공기 같은 것들이 공부할 용기를 준다.


모두가 같은 학년을 거치던 학창 시절과는 달리 이십 대부터는 각자 성장하는 모양과 속도가 달라진다. 취업이 빠르다고 해서 정답은 아니지만 느린 경우에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주변을 둘러보니 엄마 친구 아들도 옛 친구들도 정규직이든 계약직이든 얻어 스스로 돈을 벌며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 주변인들의 드러난 성장은 안 그래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초조한 이들을 더욱 뒷걸음치게 만든다.


특히 공부를 해서 자격을 얻는 취업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취업 활동이 거의 없다. 시험을 치기 전까지는 자신이 발전하고 있긴 한 건지 스스로도 알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공부를 아직도 하나 싶은 생각이 들고, 이제 그만하고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나 하는 마음이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일어나게 된다. 원래 가장 공부하기 힘든 곳은 나만 공부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량진은 그런 외부 자극을 차단해 주는 우중충함이 탁월하다. 노량진은 그 일대 전체가 우중충하고 밥은 혼자 먹는 게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듯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식비를 미리 걸어 놓고 먹을 수 있는 식당들, 종류도 많은 학원들, 곳곳에 있는 카페들은 학생들이 혼자 다니며 공부하고 생활하는 데 최적화되어있다. 직장 다니는 친구들은 이런 곳에 웬만해선 올 일 없으니 나의 뒤처짐을 상기하지 않아도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섬처럼 떠다니며 강의실을 이동하고 식사를 한다. 물론 주기적으로 함께 하는 스터디 그룹도 있고 식사 때는 시간이 맞는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지만 공부가 바빠지면 대체로 혼자 있게 된다.


그래도 크게 외로운 줄 모르고 공부를 할 수 있는 건 나뿐만 아니라 아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책상 앞에서 조용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다. 이 마을 밖에선 보이지 않던 음지의 사람들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용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면, 또 약간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된다면 노량진에 가서 공부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비록 노량진에 갔던 그 해에도 나는 합격을 못했지만 직강을 듣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니 훨씬 잡생각도 줄고 공부 효율이 좋았다.


하지만 이렇게 공부하기 좋고 다정한 노량진도 오래 머물기엔 위태로운 부분이 있다. 태로운 부분은 다름아닌 고립되어 요동치는 자신의 마음에서 온다. 그곳에 머무르는 내내 그 안에서의 편안함과 하루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공존다. 늘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어도 마음은 파도처럼 오르내린다. 그런 것은 노량진이 아무리 나를 다정하게 보듬어 준다고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번 주와 이번 달에 끝내야 할 공부들, 오늘 자정 안에 해야 하는 스터디 과제들, 실현하지 못한 공부 계획. 그런 것들이 책가방보다 무거웠다. 하루의 끝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물음을 던지고 아무 대답을 할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간다.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은 좀 나아졌는지, 아니면 오늘 공부를 좀 덜 했으니 오늘은 후퇴해버렸는지 확신할 수 없다. 수업도 열심히 듣고 놀지도 않았는데 처참한 모의고사 점수를 받아 들면 마음 모퉁이가 먼저 무너진다. 조용한 절박함 속에서 무너졌다가 회복하길 반복하고, 또 다시 책을 편다.


지금은 그 시간에서 떠나온지 오래되었다. 지금도 노량진에는 바깥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씨앗처럼 앉아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최대한 상처받지 않고 열정을 태웠으면 좋겠다. 합격을 하지 못했더라도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한 기억은 긍정적으로 남아있다. 삭막한 곳이고 겨울같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모여 공부하는 사람들 덕분에 희망이 쉽게 꺼지지 않았다. 또 그런 장소에서 애를 쓰고나면 매사에 열정이 사라진 어느 날에도 열정이 있던 나를 소환할 수 있다. 거기까지 가서 공부하고 노력했던 나는 삶에 최선을 다하던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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