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방황하는 시간이 있지만, 나의 방황은 일을 시작한 지 약 2년 남짓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일을 하는 것에 비해 의미나 보람을 느끼기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그 방황하는 마음은 가느다랗고 길게, 그리고 조금씩 희미해지는 모양으로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잘 살아내기 위해 이 감정을 말리고 다독여왔다.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이 오답 같은 날이 많았다. 도무지 사랑하기 어려운 나의 전공, 목적도 없이 최선을 다해 일하고 남김없이 소진되는 일상, 혼자 있을 때 느끼는 끝도 없는 공허함 같은 것들 때문에. 나는 이 일을 왜 하는가, 어떤 인생을 이상적이라고 여기는가 등과 같은 질문에 답하려고 애썼다. 나의 경우 일을 하는 의욕이나 동기가 단지 돈을 버는 데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질문과 답이 중요했다. 답 찾기가 너무 어려울 때는 생각을 비우고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질문은 잃고 답은 내 손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한 힘듦은 사실 오래전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나의 타고난 능력으로는 잘할 수 없는 종류라는 걸 교생 실습을 할 때부터 알았다. 숨소리 하나, 말을 시작하는 용기부터도 매 시간 리셋하듯 한 땀 한 땀 노력을 해야 겨우 보통의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이 싫으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나는 그저 이걸 잘하고 싶을 뿐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일을 계속하려면 정신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줄 사고의 전환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일하는 것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소모적인 활동이라는 생각이 있었고, 그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나무가 자신의 낙엽을 양분 삼아 뿌리를 튼튼하게 하듯, 일터에 가는 것도 제 살 깎아 거름을 뿌리며 살아남는 상황이라고 인지했다. 운동을 하면 몸이 아프지만 결과적으로 더 건강해지듯, 일을 하는 것도 사실 삶 전반에 미치는 결과값이 좋다.
우선 일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는 것이 사회성을 잃지 않게 한다. 삶의 시작점에 서 있는 학생들을 매일 보면서 초심의 색깔 같은 걸 볼 수 있고, 보다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람에게 필요한 정서적 지지가 모두 다르다는 것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누군가에게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선택지에 조차 없을 수 있음을 조금씩 알아간다.
일을 한 후 기분을 좋게 유지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내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감각을 예민하게 느끼려고도 한다.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마음이나 시간, 필요한 것들을 학생들에게 주며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얻는다. 내가 겪은 지겨운 공부 경험을 학생들을 돕고 이해하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학생들이 수험 생활 중 느끼는 힘듦에 상당한 공감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들이 합격의 순간에 느끼는 그 기쁨과 설렘이 나에게도 물처럼 밀려 들어온다. 그런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내 삶 또한 생동력을 얻는다.
모두와 잘 맞을 수도 없고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떤 날은 존재감 없이 배경같이 서 있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 던져져도 결국에는 밝은 부분을 쫓자고 다짐하곤 한다. 그래서 어느 날은 학생들이 힘들어 감정이 바닥 끝까지 곤두박질 치다가도 또 어느 날은 학생들과 웃고 대화하며 안 좋은 일은 없었던 것처럼 굴면서 지낸다.
온갖 흔들림을 겪으며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이 일은 경력이 쌓여 나를 먹여 살리는 적당한 명함이 되었다. 흔들리게 만든 일이 오히려 나를 일으켜 세우니 그 아슬아슬한 방황의 선을 앞으로도 잘 넘어 다니고 싶다. 처음처럼 아주 열심히는 못하지만, 이 일을 곁에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