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도 나이 들지 않는 어린 시절 방의 물건들을 본다. 그중에서도 일기장은 나이가 박제되어 있는 아이템이다. 읽는 데 다소 인내심이 필요할 수 있는 청소년기의 일기장은 거의 읽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고등학교 시절에 썼던 일기장을 꺼내보았다.
그때의 일기는 주로 기분이 안 좋을 때 쓰곤 해서 좋은 얘기는 찾기가 어렵다.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좋아하는 애가 내 마음을 몰라줄 때, 친한 친구가 영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할 때, 마지막으로 부모님이 융통성이 없으셔서 힘들 때. 가장 재미있는 주제는 단연 첫 번째 주제이지만 오늘은 세 번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최근 학생들로부터 내가 융통성이 없어서 조금 힘들다는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이 새삼 너무 놀라웠다. 나야말로 규칙과 기준을 강조하는 어른들에게 불만이 많았던 학생이었으므로.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의 부모님은 꽤 엄한 분들이셨다. 부족한 것 없이 자란 편이지만 감정적으로 서로 따뜻한 말을 나누는 것은 딱히 우리 집 스타일이 아니었다. 일상생활 속 여러 행동 중 하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한 원칙이 명확했고 학업과 관련 없는 것들은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간단한 예로 먹기 싫어도 식사는 꼭 정해진 시간에 함께 해야 했으며, 컴퓨터에는 부모님만 아는 비밀번호가 걸려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으므로 성적이 안 좋은 친구와 어울려 노는 것이나, 내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 같은 일은 시간 낭비의 개념으로 타박을 받았다. 대부분의 부모님이 그러셨을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부모님께서 정해 놓은 하면 안 되는 일이나, 꼭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꽤 답답해하고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막연히 권위적인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흔적이 일기장에 가득했다. 들어주는 어른이 될 것이고,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 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여전히 많은 부분 동의하긴 하지만 최근 나는 그 시절의 생각에서 상당히 많이 떠나왔다는 걸 느끼고 있다.
꽤 오랜 시간 중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미우나 고우나 생계를 해결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에 교원으로서의 가치관은 내 삶에 크게 스며들 수밖에 없다. 모든 교원들이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교원들은 학생과의 적당한 거리감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나 싶다. 나는 그동안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학생들에게 굉장히 휘둘리면서 많은 심적 고통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냥 귀를 닫고 원칙을 고집해야 내가 편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는 어릴 적 내가 그토록 되지 않겠다던 권위적인 어른의 단상이라는 걸 갑자기 깨닫는다.
돌아 돌아 젊은 시절 부모님의 얼굴을 닮아가는 내 앞에 한층 부드러워진 부모님이 계신다. 불 같이 무서웠던 엄마가 나에게 거의 화를 내시지 않고 져 줄 때면 많은 생각이 든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걸까, 아니면 부모님 당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 기제로서의 기준이었을까. 어느새 부모님이 이해되어 융통성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면죄부를 씌우다가도 어디까지가 이해 가능한 범위인지 고민하게 된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 중에 하나는 너무 많은 기준들을 세웠다가 그중 몇몇의 무용성을 생각하며 스스로 세운 기준들을 다시 내려놓는 과정이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막연히 앞으로 새롭게 만나는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까지 완고하게 굴 것인지 새삼 고민해 보는 밤. 학창 시절의 내가 다소 변한 나를 마음에 들어 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