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지극히 사적인 기억을 가두는 계절이다. 여름은 발음도 ‘여-’ 하고 무엇이든 부르려다가 이내 ‘-름’ 하며 하려던 말을 삼키는 느낌이 든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기억들은 대체로 사적이면서도 강렬하고, 그만큼 자신만의 것을 떠올리게 하는 은유가 많은 계절이다. 나의 여름은 불타는 초록색이고, 살아있는 계곡물이고, 정신이 아득한 매미소리이고, 능소화가 핀 담벼락이다. 머릿속에 사진첩이 있다면 여름의 지분이 가장 많을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도, 가장 힘든 시간도 여름 속에 있는 것 같다. 나만의 여름들을 조금만 열어 글로 남겨두고 싶다.
아름다운 여름은 서툰 봄이 지나면 온다. 일터에서 온갖 사투를 벌이다 보면 짧은 여름휴가를 맞이하게 되는데, 봄이 바쁘고 어려울수록 여름은 빛난다. 나는 매년 어느 사막 같은 날이면 반드시 계곡에 간다. 녹음이 짙은 산속에서 펄떡대는 계곡물을 온몸으로 맞은 후, 햇빛으로 달궈진 평평한 바위에 누워 구름이 가는 속도를 본다. 물놀이를 끝내고 라면을 끓여 먹으면 그게 또 그렇게 맛있고, 밤에는 고기와 새우를 구워 먹으며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별들을 본다. 나는 그 여름의 하루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한 것이다.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은 다만 빛나는 여름을 최대한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렇게 계곡에서 소중한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사뭇 진지한 태도로 다시 일터로 돌아갈 힘을 얻게 된다. 나의 아름다운 여름은 주로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여름은 한편으로는 가장 힘들었던 날들도 떠오르게 한다. 내게는 공부를 하던 시간이 그렇다. 나의 이십 대는 미련한 공부의 시간으로 가득했고, 참 막막하고 기약이 없었다. 특히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에서 비탈을 오르며 도서관으로 향할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뜨거운 거리에 서서 사방에서 우는 매미 소리 속에 갇혔을 때 그대로 기절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참으로 시끄러운 계절에 나 혼자 조용하고 외로웠다. 외롭고 괴로워서 어쩌면 겨울 같은 시절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역시 여름이 맞았다. 나는 다시는 그렇게 맹목적으로 한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몇 해를 바치지 못할 것이다. 극단적이고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한 여름. 꿈을 향하던 시간도 지나고 보니 여름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열심히 하지 않는 시절에도 여름은 낭만과 설렘을 준다. 여름은 무모한 사랑에 대한 영화나 책, 노래들을 감상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비포 선라이즈’, ‘위대한 개츠비’, ‘시간을 달리는 소녀’ 같은 여름이 배경인 영화들을 다시 보고, Sarah Kang의 ‘Summer Is for Falling In Love’ 같은 곡을 들으며 그 대책 없는 감정을 마음에 얹어본다. 낭만의 정서가 지배하는 여름. 여름에는 지금 사랑하는 것들과 과거에 사랑했던 것들을 모두 떠올릴 수 있다. 행복한 기억이든 힘든 기억이든 여름에 속한 것들은 낭만적이고 소중해서 오래 마음에 품게 된다. 잊히지 않는 것들의 다른 이름은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