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사람
스무살 언저리에 나는 친구들에게 자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물었다. 처음 몇 번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던 친구들도 내 질문이 반복되자 지겨운 티를 냈다. 하긴 나도 모르는 나를 친구들은 어떻게 알겠는가. 더이상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란 사람. 어렸을 때 외동딸 티낸다는 말이 싫어서 늘 무난한 성격으로 포장해야 했고, 그 포장 안에 숨어 살았던 나는 어떤 성격의 사람일까.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할까.
시간이 많이 흘러 스무살 때보다 나를 바라보는 나만의 눈이 생긴 것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그래서 기록해 본다. 나란 사람.
일단 삶의 지향점,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라고 해야할까?
- 단정하고 세련되게 살기.
때때로 생각하며 나 자신을 환기 시키는 말.
- 나나 잘하자.
자 그럼 좋아하는 것부터.
-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 하늘이 맑은 날이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파랗고 푸르고 깨끗한 그런 하늘과 그 하늘 위에 둥실거리는 구름. 속상한 날에도, 우울한 날에도 그런 하늘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 꽃 : 직장에서 내가 쭈구리처럼 느껴지는 날, 나는 꽃집에 들러 꽃을 사온다. 꽃을 사와 식탁 가운데 꽂아 놓고 그 앞에 앉으면 낮에 있었던 쭈구리의 시간은 지나고 이제 안전하고 포근한 시간이라는 걸 느낄 수가 있다.
- 커피는 커피잔에 : 지금은 소화기관이 약해져서 커피를 잘 안 마시지만 커피는 커피잔에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머그컵은 안되고 텀블러도 별로다. 컵과 컵받침이 한 셋트로 된 커피를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마시는 것이 나는 좋다. 그래서 체인점 커피보다는 동네의 작은 커피집을 사랑한다.
- 뜨개질 : 머리가 복잡한 날엔 뜨개질을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퀼트로 가방이나 인형을 만들어 주곤 했었는데 이제는 눈이 안보여서 퀼트는 어렵고 대신 뜨개질을 한다. 여전히 가방을 만들고 지갑을 만들기도 한다. 아무것도 없던 실에서 무언가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 좋고, 틀렸다면 풀었다가 다시 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올 가을엔 스웨터를 뜨는 게 목표다.
- 서점 : 책은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책들이 가득한 곳, 그 무질서 속의 질서, 책과 함께하는 문구류와 필기구들. 그 속을 어슬렁 거리며 손끝으로 책을 스치며 지나가면 미풍이 부는 들판에서 나뭇잎을 만지는 느낌이 든다.
- 달리기 : 나의 달리기 코스인 경복궁 한바퀴 돌기. 이건 너무 좋아서 따로 글을 써봐야 겠다.
좋아하는 것들을 써보니 꽤 많다. 그럼 이쯤에서 싫어하는 것.
- 호로록 거리며 음료 마시기 : 뜨거운 음료를 마시는 옆 사람이 호로록 소리를 낸다면 뭐라고 말은 못하고 눈을 감는다. 그 소리가 너무나 싫다. 호로록 소리를 의식하지 못했던 남편은 내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고치게 되었다. 내가 없을 때도 누군가 옆에서 호로록 거리며 음료를 마시면 '와이프가 있었으면 또 얼굴을 찡그리겠네'라고 혼자 생각한다고 한다.
- 신발 꺽어신기 : 발을 신발에 쏙 집어 넣던가, 아니면 꺽어신지 않아도 되는 슬리퍼를 신던가. 누군가 신발을 꺽어신은 모습을 본다면? 역시 눈을 감는다.
- 음식끼리 서로 섞이는 것 : 어렸을 때 도시락을 싸던 시절에도 그랬는데 점심 도시락을 열었을 때 반찬끼리 섞여있으면 너무 싫었다. 지금 직장의 구내식당은 식판을 이용하는데 그때도 반찬이 칸을 넘어서 다른 반찬과 섞이지 않도록 엄청 조심해서 담고 있다.
우울한 날엔.
우울하거나 슬프거나 속상하거나 기분이 나쁜 날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은 내가 갖고 있던 감정을 확대해는데 우울하거나 슬픈 기분을 확대하고 싶진 않다. 대신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고 잠을 잔다. 그러면 잠결에 스치는 향기에 속아서 초라했던 나란 사람은 없어지고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잠을 자게 된다. 그리고 일어나면 새로 시작이다.
행복한 날엔.
행복한 날엔 이어폰으로 바이올린 연주곡을 듣는다. 양인모의 '우아한 영혼'을 시작으로 쇼스타고비치의 '왈츠 no.2'로 이어지는 유튜브 재생목록을 듣고있자면 마음이 붕 뜨면서 가보지도 못한 오스트리아의 시골길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모든 게 나다. 괜찮은 모습, 옹졸한 모습, 멋진 모습, 초라한 모습, 왜 저려냐 싶은 모습까지. 그 모든 게 나라는 사람이다. 조금 더 아껴줘야지. 잘 토닥이면서 좀 더 단정하고 세련된 사람이 되자고 잘 달래가면서 살아야지. 그게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