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아이의 억울한 기억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빠의 잦은 전근 때문에 나는 초등학교를 세 군데나 다녔다.
언니와 남동생은 아빠와 같은 초등학교를 거의 6년이나 다녔는데, 나는 아빠가 한참 전근 다니시던 타이밍에 딱 맞물려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가뜩이나 소심하고 말도 없는 성격에 전학 갈 때마다 모두들 앞에서 내 소개하는 것도 스트레스였고, 친구 사귀기도 힘들었다. 그 시절엔 전 학교 친구들과 연락이 닿을 방법도 별로 없었기에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초등학교 동창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 부럽고, 나에게 초등학교 시절은 계속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들만 흐트러진 퍼즐 조각들처럼 남아있다.
3학년 때였을까.
2학년 때 아산에서 대전으로 전학을 가서 일 년 정도 새 학교를 다녔던 시점인가 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소극적이고, 조용하고, 처음 보는 어른이 "말을 못 하는 아이인가?" 할 정도로 말이 없고 목소리도 작았다. 전학 한 번 갈 때마다 더 주눅 들고 쪼그라들었다. 수업시간 중에 화장실을 가면 큰일 나는 줄 알아서, 초중고 12년 간 쉬는 시간 이외에는 화장실을 가 본 적이 없다. 손 들고 "화장실 다녀오면 안 돼요?" 하는 건 나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화장실에 가느니 그냥 참다가 죽는 게 나았다. 튀는 것도, 눈에 띄는 것도 싫어했고, 엄마가 도시락에 깜빡 젓가락을 빠뜨렸는데 같이 먹는 친구한테 빌려달라고 말을 못 하고 그냥 굶은 적도 있다.
아, 나는 왜 그렇게 소극적이었을까.
그렇게 얌전했던 성격은 여중, 여고를 나오며 완전히 달라졌지만, 20대 후반까지도 나는 여전히 남자들과는 대화를 잘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자연히 연애경험도 많지 않다. 지금 나를 아는 사람이 들으면 믿기 힘들 나의 과거.
어쨌든, 그때 다니던 대전의 초등학교 앞에는 문구점이 두세 군데 있었는데, 도시 아이들은 문구점에서 외상이라는 걸 하더라. 예전 학교에서는 외상이란 걸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하긴 그 땐 아빠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아직 1학년이라 내가 문구점에 혼자 가서 뭘 산 적이 없어서 몰랐는지도 모른다.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어느 정도 적응하고, 문구점에서 정말 급할 때 나도 외상을 서너 번 정도 했다. 처음에는 말을 꺼내는 게 어려웠지만, 친구들이 하는 걸 자주 봐서, 그리고 등교길에서야 기억난 준비물을 못 가져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생존을 위해 없는 용기를 쥐어짜서 외상으로 준비물이나 문제집 같은걸 두어 번 샀다.
외상을 하면 내 이름과 학년반, 그리고 전화번호를 적었는데, 외상값을 갚으면 지워주는 시스템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며칠 혹은 일주일이 넘게 지나서 돈을 갚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모든 외상을 한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는 길에 갚았다.
그날도 전날 문제집을 사며 외상을 하고 다음날 아침 외상값을 갚기 위해 문구점에 들렀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늦봄이나 여름쯤이었는데, 그날따라 아이들이 유난히 바글바글했다. 날씨는 덥고 비는 오고 문구점은 미어터지는데 주인아저씨는 어디 가시고 아주머니 혼자서 아이들을 감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상 다음날 아침에 깔끔하게 갚는 게 내 원칙이라, 어떻게 해서든 그날, 그 순간에 갚아야만 했다.
시끌벅적 초딩지옥 같은 문구점을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서 내 이름을 말하며 외상값을 갚는데, 다른 때는 아주머니가 내가 보는 앞에서 이름을 지웠는데 그날은 너무 바빠서 계산하느라 정신이 1도 없었다.
외상 노트 자체가 아주머니 앞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이름을 안 지워주냐는 표정으로 조용히 쳐다보니, "으응, 아줌마가 이름 기억했다가 이따 지워줄게. 걱정하지 마." 하며 나를 안심시켰다.
워낙에 바쁜 상황이었고 나도 학교에 늦으면 안 되니 그냥 알겠다고 하고 빠져나왔다.
그렇게 학교에 갔고, 시간이 한참 지나 겨울이 되었다.
겨울방학을 며칠 앞두고 있던 날인데, 수업 중에 갑자기 교실 뒷문이 스르륵 열렸다.
웬 아저씨가 문을 열더니, 선생님을 향해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며, 그 학생 반이 맞냐는 것이었다.
나는 웬 처음 보는 아저씨가 나를 찾아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정말 소스라치게 놀라서 뒷문으로 튀어 나갔다.
계단 쪽에 서 있던 아저씨는 문구점 외상값을 갚지 않아 찾아왔다고 했다. 그 시점에는 한 학기 내내 외상을 한 적이 없었고 너무나 예전 일이라, 솔직히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저 외상 한 안 했는데요..."라고 하니 노트에 적힌 내 이름과 날짜를 가리키며 이거 보라고, 내일까지 꼭 갚으라고 말했다. 6개월도 전에 있던 일인가 보다. 어른이 되고 나서 6~7개월은 몇 주 전처럼 짧게 느껴지지만, 일생이 겨우 9년인 아이에게 6개월은 영겁의 세월같이 까마득했다.
나는 모든 외상을 다음 날 갚은 기억만 있지, 외상하고 갚지 않은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갚은 증거가 없었고 아저씨는 물증을 가지고 있었다.
내일까지 갚으라며 아저씨는 떠났고, 그 짧은 대화는 아주 신속하고 프라이빗하게 이루어졌다. 그 아저씨가 나를 다그친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나를 놀려댄 것도 아닌데, 나는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날 하루가 어떻게 흘러 가는지 느낄수도 없이 하루가 흘러갔다.
그날 밤 엄마한테 돈을 또 받아 그다음 날 아침 등교길에 돈을 갚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솔직히 많이 억울했는데.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나는 이미 세상을 초월한 사람처럼, 마치 어른처럼 판단하곤 했다.
갚았다고 따져봐야 그쪽엔 증거가 없고, 내 앞에서 지우게 하지 않은 내 탓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한테 얘기해봐야 어른들끼리 부딪힐지도 모르고, 괜히 일 크게 만들 거 없이 그냥 내 선에서 해결하자,라고 생각했다.
그 학교에 전학 간지 한 달 만인 2학년 때는 선생님한테 뺨을 맞은 적도 있다.
그날 엄마가 몸이 안 좋아서 엄마가 머리 묶어주길 기다리다 비 오는 날 15분 정도 지각을 했다. 2학년 1학기 초여서, 솔직히 시간이나 지각에 대한 개념이 아직 없었던 것 같다.
우산을 쓰고도 비를 흠뻑 맞으며 뛰어갔는데, 교실에 들어가자 할머니 담임선생이 앞으로 나오라고 한 후, 거북이 등껍질같이 두꺼운 손으로 내 뺨을 철썩 때리는데 눈 앞에서 불이 번쩍했다.
삼십 대 중반인 지금까지도, 내 평생 뺨을 맞아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또래보다 키도 덩치도 작은 나는 겨우 8살이었다. 그 전 학교에는 아빠가 같이 다니고 있었는데, 여기는 아무도 없었다.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나는 집에 가서 얘기하지 않았다. 엄마는 당시 갓난쟁이 남동생 육아로 바빴다. 어차피 맞았는데 엄마 아빠한테 굳이 말해서 일 키울 필요 없다,라고 생각해서 그냥 지나갔다.
이십 대가 훌쩍 넘어 엄마한테 그 얘길 처음 하니 엄마는 기겁을 하고 너무 미안해했다. 그때 너 전학 보내고 경황이 없어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해서, 찾아오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나 보다. 아이고 엄마가 잘못했다, 말을 하지 그랬니.
언니를 초등학교 내내 아빠와 같은 학교에 보낸 엄마는 한 번도 선생님을 찾아뵙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 전엔 학교 관련된 건 아빠가 이미 먼저 들어서 훤히 알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 직원들까지 모두 언니의 존재를 알았다. 동생도 아빠와 6년동안 같은 학교를 다녔다. 나는 아빠가 없는 학교에 다니니 관심이 필요했는데 엄마는 그걸 모르고 지나갔다. 둘째인 나는 이래저래 치이고 운이 나빴다.
조금만 더 어린아이답게 행동했으면 좋았을걸.
아저씨, 저 돈 갚았는데요. 바로 다음날 갚았는데 아줌마가 바빠서 나중에 지운다고 해놓고 안 지우신 건데요,라고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엄마 오늘 학교에 늦었는데 선생님이 나 교실 앞으로 불러서 뺨 때렸어. 눈 앞이 번쩍하고 교실 바닥으로 나가떨어졌어. 그리고 남자애들이 내 물건 가지고 도망가서 내가 쫓아서 뛰어가면 선생님은 나만 혼내. 걔가 나를 먼저 건드린 거라고 해도 나만 손바닥을 맞아. 선생님이 매번 이유를 만들어서 나를 혼내는 것 같아. 엄마가 선생님한테 연락해봐. 아빠가 학교에 전화해봐,라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나야 이래저래 억울한 일은 있어도 큰 풍파는 없는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미국에서는 어렸을 때 성추행이나 폭행을 당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성인이 되어 겪는 대부분의 정신적 질환은, 어릴적의 트라우마를 뿌리삼아 생겨난다.
글쓰기 수업에서 자전적 에세이를 쓸 때, 한반에 서너명은 꼭 학대당한 어린시절 이야기를 쓴다. 글을 읽는 본인도 감정에 복받혀 울고, 듣는 학생들과 교수도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한 학기에 꼭 한번은 있다.
아, 세상엔 어른이 없는 곳에서 아이들에게 막 대하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돌아보면 우린 이미 가치관과 자아가 성립된 인격체였는데, 그걸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
공개적인 곳에 이렇게 써 놓으니 왠지 딱딱했던 기억의 조각이 조금은 말랑해진 느낌이기도 하고.
애 늙은이라 오히려 나이 먹으면서 더 어려지고 용감해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