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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May 25. 2019

그 시절의 향기

냄새란 건 한편으론 타임머신 같아서

한국 음식에는 마늘이 참 많이 들어간다. 마늘이 안 들어가는 요리가 거의 없을 정도여서, 어느 요리를 해도 다진 마늘을 넣는 순간 비로소 "한국 음식" 고유의 익숙한 향이 나기 시작한다.


남편은 떡국을 유난히 좋아해서 설날이 아니어도 떡국을 자주 끓인다. 특히 겨울에 떡국을 끓이며 창문을 조금 열면 찬바람이 훅 들어와 떡국의 냄새와 오묘하게 섞인다. 찬바람에 섞인 뜨거운 떡국 냄새를 나는 어린 시절 냄새라고 부른다. 그럴 땐 "이건 내 어린 시절(childhood) 냄새야", 라며 왜 그렇게 부르는지 설명하길 좋아한다. 몇 번이고 했을 얘기지만 처음 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이 가장 즐거운 옛날 이야기.


찬 겨울바람에 섞인 한국음식 냄새라면 뭐든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빠가 발령지를 서울이 아닌 대전으로 택했던 이유는 아빠의 고향과 가까워서였다. 아빠는 국가유공자 가산점이 있어서 서울로 신청을 했더라면 아마 서울로 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럼 내 인생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서울로 갔으면 세 시간도 훨씬 넘게 걸렸을 걸, "이라는 아빠는 모든 여자들이 두려워하는 효자이자 장남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대부분의 방학 동안 시골에 내려가 지냈고, 추석이나 설날엔 연휴 내내 그곳에서 보냈다.


대전에서 금산을 지나 한참 가야 나오는 진안군의 작은 마을은 많은 집들이 인삼농사를 지었다. 아빠의 고향은 같은 동네는 물론 다리 건너 옆동네 사람들까지도 이름과 얼굴을 알고, 한 사람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할아버지 댁은 앞마당 뒷마당이 있고, 내가 초등학교 때까지 소와 돼지, 닭들을 키웠다. 동네 한가운데 넓은 땅을 차지하는 큰 집이었다. 동네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안씨였고, 먼 친척인 집들도 많았다. 명절 때 시골에 내려가면 곧장 아빠와 동네를 돌면서 집집마다 인사를 다녔는데, 어떤 집이 친척집이고 어떤 집이 이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모두 가까웠다.


증조할머니는 내가 중학교 때까지 살아계셨다. 


명절이 되면 대전과 서울, 전주 등에서 가족들이 모여들어 큰 집이 복작복작했다. 큰 방이 여섯 개나 있는데도 모자라 삼촌들은 옆집에 가서 자기도 했다. 설날 아침에는 방 두세 개에 나눠 식사를 했는데, 명절날은 하루 종일 상다리가 접힐 일이 없을 정도였다.


고산지대라 겨울에는 대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추워서 나는 최대한 방 안에서 있었지만, 가끔 엄마 심부름을 하고 부엌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불에 고구마나 밤을 구워 먹는 재미도 있었다. 가끔 판을 크게 벌려 고기라도 구우면 기름진 냄새가 마당까지 퍼져 부엌에 들어올 일이 없는 아빠도 들어와 맛을 봤다. 그렇게 먹는 고기는 명절상 위에 차려진 어떤 요리보다 더 꿀맛이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우리 가족은 그렇게 부엌에 잠깐 모였다 또 흩어졌다.


설날 아침 한복을 입고 추위에 떨며 나오면 마당엔 온통 떡국 냄새로 가득했다. 집에서 빚은 만두와 고기가 들어간 떡국의 진한 냄새가 차가운 공기를 메웠다. 시골마을 설날 아침의 향기다.


떡국은 냄비채로 들고 안방에 차려진 상 옆에 놓인다. 식지 않게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 끓이면서 퍼주기도 한다. 상은 보통 두 개 정도 차리는데, 하나에 대여섯 명씩 앉아서 먹는다. 처음엔 꽉 차있지만 먼저 먹은 사람이 하나 둘 자리를 뜨면 점점 공간이 생긴다. 증조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나는 늘 할머니의 상에서 먹었다.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들과 아빠가 드시는 그 상은 나름 상석이었지만 나는 불편하기도 했다. 젓가락질을 왜 못하냐고 지적이라도 받으면 위축되어 숟가락으로 반찬을 먹었다. 언니가 삼촌, 고모들과 먹는 상의 분위기가 편해 보여 부러웠다.


떡국을 먹고 있으면 식사를 일찍 마친 이웃의 어른들과 친척 분들이 인사를 한다고 들어온다. 창호지를 바른 안방 문은, 제사를 지낼 때나 이미 차려진 음식상이 들어가고 나갈 때는 양쪽 문을 열지만, 평소엔 왼쪽 문만 사용한다.

식사를 늘 일등으로 마치는 증조할머니는 식사를 끝내고 늘 오른쪽 문 앞에 앉아 밖을 보고 계셨다. 오른쪽 문에는 특별히 투명한 아크릴 판으로 밖을 볼 수 있게 해 놓은 조그만 칸이 있었다. 딱 할머니가 앉아있을 때 눈높이에 맞게 뚫어서 만든 투명 문은, 내가 기억도 못하는 어릴 때부터 거기에 있었다. 거동이 힘든 증조할머니는 그 손바닥만 한 창을 통해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시곤 했다.


문을 잘 열지 않는 겨울엔 그 손바닥만 한 투명판이 할머니가 바깥세상을 보는 유일한 창이었다. 우리 가족이 연휴 첫날에 집에 오는 것도, 연휴 끝에 대전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 문을 통해 보셨다. 당신 아들들이 새 양복을 입고 화려한 과일바구니를 들고 집에 오는 것도, 옆집 박 선생님이 인사하러 들어오는 것도 그 문으로 집안의 누구보다 먼저 보셨다.


떡국을 먹고 있으면 이웃 할아버지나 아저씨가 내 또래 초등학생 손주 손을 잡고 오셨다. 도시에서 온 이웃집 친척들이 원피스나 양복을 차려입고 오기도 했다. 시골의 집들은 네 집 내 집의 개념이 없는 듯 남의 집도 편하고 자연스럽다. 인사를 하러 가도 대문을 쓱 열고 집 앞까지 걸어간다. 신발을 벗고 올라와 "식사하시나?" 하며 내 집처럼 문을 쓱 열고 들어오는 것이다.


식사 중 손님들이 들어오며 문을 열 때마다 한겨울 황소바람이 들어온다. 음식으로 가득한 방 안의 공기 속에 바깥바람이 훅 들어오면, 식사 내내 코가 익숙해져 몰랐던 음식 냄새가 새삼스레 확 느껴진다. 그렇게 문이 열릴 때마다 맡았던 냄새가 내가 기억하는 그 시절의 냄새다.


인사를 하러 오신 어른들이 안방에 들어오면, 식사를 했건 안 했건 떡국 한 그릇씩을 권했다. 떡국 들어갈 배가 없으면 과일, 떡, 집에서 담근 수정과나 동동주를 대접했다. 우리가 이제 막 식사를 시작했을 때 누군가 오면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방이 가득 찼다. 어린 마음에 문이 열릴 때마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니, 누가 더 오기 전에 빨리 먹고 옆방에 가서 설날 특집 방송을 보고 싶은 생각만 굴뚝같았다.


그렇게 사람이 가득 찬 설날의 아침식사는 계속해서 인사하러 들어오는 분들 덕에 몇 시간이고 계속되어, 부엌에서 일을 해야 하는 맏며느리인 엄마는 아침 시간을 훌쩍 넘어 식사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엄마는 명절 때마다 몸살이 나서 집에 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안 계셔 몇 년 간 비워져 있던 집은 흉물스럽게 변해 동네 사람들이 철거해달라고 아빠에게 민원을 넣었단다. 미루고 미루다 아빠가 기술자를 불러 철거하고 난 집은 평평한 흙밭일 뿐이었다.


아빠가 태어나고 자랐던 집.

증조할머니는 그 집으로 시집와 자식들을 낳고, 손주와 증손주까지 보시고 그 집 안방에서 돌아가셨다.


한 때는 명절에 4대가 한 상에 앉아 식사를 하며 복작거렸던,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고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며 활기가 가득했던 집. 언젠가 내가 뛰다 코를 정면으로 부딪혀 쌍코피를 흘렸던 마루가 사진에 어렴풋이 보였다. 마지막을 기록하고 싶었던 아빠의 아쉬움을 나라도 오래 간직하고 싶어 몇 년 동안 폰에서 지우지 않고 있는 사진.

언젠가 아빠 고향집의 모형이라도 만들어주고 싶어 저장했지만 집의 형태가 잘 보이지 않는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따고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해서 뭐라도 된 양 우쭐해져 있던 11월의 어느 날 아빠가 보내온 사진은 머나먼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지금 내 눈앞의 하늘이 눈부시고 단풍이 찬란해서. 지금 내가 멋진 대도시에서 내 삶을 살고 있느라 바빠서. “아빠 많이 슬프겠다, 나도 이렇게 서운한데” 라며 위로했지만 아빠의 먹먹할 심정이 내 일처럼 크게는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 비가 와 쌀쌀했던 날 떡국을 끓이는 데 냄새를 맡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틈만 나면 찾아오던 그 시절 시골에서 보낸 명절의 기억들. 한 방을 가득 채우고도 계속해도 들어오던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얼른 연휴가 끝나 집에 빨리 가고 싶었던 젓가락질이 서툴었던 여자애는 삼십 대를 훌쩍 넘어 머나먼 타국에 살고 있다. 증조할머니도, 할아버지들 할머니들도 많이 돌아가셔서, 한국에 가면 산소에나 가야 찾아뵐 수 있다. 살아계신 분들은 누구인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알 수 없다. 할아버지 손잡고 들어오던 아이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을 세월이니까.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던 그 시절의 설날은 이제 보니 나에겐 십 대 후반까지의 몇 년 동안만 주어졌던 풍경이었다. 증조할머니와 수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동네의 친척들과 이웃들, 그리고 내 또래의 어린애들이 가득하던 그 시절의 그곳은 그때만 잠깐 존재했던 장소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명절마다 매번 시골에 따라가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차멀미를 하며 가는 것도 힘들고 시골집은 화장실 가기도 씻기도 불편했으니까. 그러다 외국에 와서 십 년 넘게 살다 보니 아빠의 고향인 시골집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고 추억 속에만 있는, 왠지 가끔 꿈에 나타나는 장소가 됐다.


그때 스쳐간 이름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얼굴들이 가끔 눈물 나게 그리운 날이 있다.

머나먼 이국의 아파트 주방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에 섞인 뜨거운 떡국, 김치찌개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고 한국 시골냄새라고 좋아할 때. 그 시절의 분위기와 냄새가 아직 이렇게 생생한데도 다시는 어떻게도 돌아갈 수 없는 시공간이라서. 그때만 딱 있었던 건데 모르고 지나친 것 같아 아련하고 서글프다.


지금도 그런 소중한 시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이 아름다운 도시. 내가 감사함도 없이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 별 감흥이 없는 지금의 일상이 머지않아 또 눈물 나게 그리운 날이 올 지도. 평생 내 옆에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내 옆의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더 감사하고 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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