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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Sep 28. 2019

브런치 일 년, 일상의 변화

마음껏 쓸 곳이 생겨 행복합니다.

2018년 6월 말의 금요일.


날씨가 부쩍 더워져 습한 데다 비도 조금씩 내린 날, 웨스트 빌리지에서 친한 동생을 만났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이태리 식당 Olio e Piú에서 크림이 아닌 계란으로 만든 정통 까르보나라를 먹기로 한 날. LGBT 주간이라 형형색색 차려입고 무대화장처럼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수많은 "남자 언니"들의 메이크업 스킬이 어찌나 뛰어난지, 우리도 여자로서 지지 않게 분발하자며 웃었다.


까르보나라 파스타에 샴페인 한잔씩 마시고 Olio e Piú 를 나섰을 땐 비가 오고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브라이언트 파크까지 걸었다.

비가 그쳐 촉촉한 잔디밭 옆의 테이블에 앉아 종이컵 안에 식은 루이보스티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동생은 지난 일 년 여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나도 작년에 브런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어. 지원해보려고 했었는데 출판 경력을 묻더라고. 안될 거 같아서 그냥 말았지.”

“아니야. 언니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어. 경력을 묻긴 해도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언니 정도면 충분히 될 거니까 무조건 지원해 봐. 언니는 무조건 될 거야.”


그녀는 한국에서 유명한 힙합 매거진에 수년간 칼럼을 쓴 화려한 경력이 있었다. 그에 비해 난 내로라할 경력이 없어서 일 년쯤 전에 브런치에 대해 듣고 한번 해보려다가 지원을 통해서만 뽑는다고 해서 포기했었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될 것 같으면 시도조차 않는 게 내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브런치 플랫폼에 대한 강력추천과 권유를 듣고 집에 가는 길엔 왠지 모를 설렘이 가득 차 올랐다. 새로운 연애가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날 밤 비장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써 내려갔다. 이 정도면 내 글솜씨 수준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호기롭게 글을 두어 개 쓰고, 내가 대필작가로 써서 출판되었던 책의 링크와 나름 예술혼을 불태워 운영 중인 인스타그램 주소도 넣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수다를 떨기에 제격인 한 여름밤의 브라이언트 파크

지원서를 보내고 며칠간 설레는 마음을 안고 기다렸지만, 삼일쯤 후 떨어졌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브런치의 거절 이메일이 어찌나 깍듯한지, 그 짧은 몇 줄이 내가 급하게 써 올렸던 글보다 더 정성껏 쓰인 느낌이었다. 내가 쓴 글이 볼품없게 느껴지던 순간.


친구의 말을 듣고 당연히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받은 소식이라 놀랐고, 좀 더 신중하게 쓸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검색을 해보니 꽤나 많은 실패 후기가 나왔다. 떨어진 게 분명 나 혼자는 아니어서 조금은 위로가 됐다.


다양한 후기를 읽고 나서야 나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주제와 콘텐츠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번에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진지하게 고민하기로 했다. 한 달 여간 에 걸쳐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을 몇 편 썼다.


내가 일을 쉬고 나서야 깨달았던 직업이 주는 정체성, 뭔가를 시작할 때 습관처럼 늦었다고 생각하곤 하던 것에 대한 고찰, 내가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깨달은 된 것들에 대한 글. 그렇게 네 편의 글을 심기일전하여 쓰고 다섯 번째 글을 시작하려다 문득, "이 정도면 조금은 준비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계획 없던 두 번째 지원을 했다. 이번에는 인스타그램도, 대필로 썼던 책의 링크도 넣지 않고 샘플로 쓴 글만 포함한 채였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나는 분명 필력이 아직 딸리는 것이니, 한동안은 쓰지 말고 읽기만 하자고 마음먹었다.


즉흥적으로 두 번째 지원을 하고 나서 처음보다 더 떨리는 며칠을 보냈다. 아, 좀 더 신중하게 두어 달쯤 있다 할걸 하는 생각과, 이렇게 쓴 글이 떨어지면 나는 브런치와 인연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충돌하며 일상에 집중한 며칠 후, 아침에 연 이메일 인박스 속 눈에 띄는 한글 제목의 이메일이 있었다.

가슴 떨리던 이메일. 그녀의 말대로 출판 경력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브런치가 원했던 건 출판 경력이나 필력보다는 콘텐츠 그 자체인 것 같다. 더 다양한 시점, 의견, 이야기로 브런치에 다채로움을 더할 수 있는지 여부가 기준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렇게 브런치의 작가가 되어 서랍 속에 써 두었던 글을 모두 올리고, 드디어 첫 글을 써서 올린 게 8월 중순이었다.


그즈음 난 서른 살 넘어 들어간 영문학과에서 창작 문예 공부를 하며 스물한두 살 애들과의 경쟁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어차피 시작한 공부 하루라도 빨리 졸업하자며 여름학기를 듣고 있었는데, 브런치를 시작하기 직전에 선택한 과목이 논픽션 쓰기 수업이었다.


없는 세상을 만들어서 허구의 인물을 그려내는 소설과 달리, 내 생각과 삶에 대해 쓰는 논픽션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막상 브런치의 작가로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앞으로 뭘 쓰면 좋을지 고민하던 시점이기도 했다. 내 단편소설보다 내 에세이를 읽은 반 친구들과 교수님의 반응이 훨씬 더 뜨거웠기에, 브런치에도 그런 글을 쓰기로 했다.

처음 메인에 올랐던 글들은 뉴욕의 가을과 여행에 관한 글이었다.

브런치의 글감, 주제와 소재

가장 먼저 쓰고 싶었던 건 어른이 되어가는 데서 오는 혼란과 배움에 대한 것이었다. 어릴 땐 어른이 되면 모든 일에 능숙하고, 세련되고, 현명한 성인이 되어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나의 시각. 나이만 먹는다고 성숙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내 의견. 나이 듦에 대한 고민과 고찰을 담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 쓰던 탐구생활에서 따와 매거진 이름을 정했다.


한편으론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써보고 싶어 여행과 걸그룹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쓰는 글을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쓰자는 주의지만, 브런치 메인 페이지와 다음에 노출이 되어 조회수가 폭발하는 것을 보고 나니 그런 곳에 먹히는 글 위주로 써야 하나 싶은 유혹이 들 때도 있었다.


분명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독자가 부담 없이 흥미롭게 읽는 글들에 차이가 있긴 하다.

개명 후 일상의 변화에 대해 쓴 글

브런치의 가장 좋은 점은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갖는 지적이고 깨어있는 독자들을 상대로 마음껏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브런치의 독자들은 작가들 이상으로 지적인 호기심이 넘치는 지식인들이다.


공유의 즐거움

인스타그램이 없었을 때에도 우리는 보기 좋은 음식이 나오면 사진을 찍고, 풍경이 아름다우면 사진을 찍었다. 나 또한 아름다운 게 눈에 들어오면 버릇처럼 사진을 찍었다. 인스타그램을 시작하고 나서 좋았던 건, 그중에 진짜 예쁘고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잘 나온 사진만 엄선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진을 올릴 곳이 생긴 것이다.


브런치 또한 마찬가지다.


평소에 생각하는 것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들, 잊고 싶지 않은 여행의 추억에 관해 써서 올릴 공간이 생기니 비로소 세상에 내 목소리를 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독한 집순이에 친구도 많지 않고, 사교적이지 못하고 소심하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고, 다양한 경험을 했고, 평생 밥 먹듯 책을 읽으며 살아왔다. 브런치에 열심히 써 올린 글이 읽히고, 누군가 "공감이 되네요."라고 말을 해주는 경험은 힐링 그 자체였다.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가 하나 생겨 이해받고 인정받은 느낌이랄까.


내가 열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쓸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 그게 브런치가 주는 가장 큰 일상의 변화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작가가 된 기분이다.


캡슐호텔 첫 경험에 관한 글. 다음에 올라가는 글은 조회수가 폭발한다

다음에 노출되었던 모든 포스팅들, 브런치 첫 페이지에 노출되었던 순간 모두 출간한 기분이었다. 내가 뭐라도 된 듯 들뜨고 설레고 영광스러웠다.


참고로, 글이 메인 페이지나 추천글에 올라가도 브런치에서 알려주지 않는다. 브런치 팀의 시크한 매력이다. 그러니 조회수가 심상치 않다 싶으면 어디에 노출되었는지 직접 찾아야 한다.

처음 몇 번은 늦게서야 알았거나, 가족이나 지인이 앱을 켰다가 보고 연락해줘서 알기도 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어느 글의 조회수가 갑자기 올라간다 싶으면 앱을 열어서 확인하곤 했는데 어느 날 여러 글들의 조회수가 맥락 없이 막 올라간 날이 있다. 내 글이 아닌 내 브런치 페이지 자체가 소개되었던 날이었다.



필명을 쓸 것인가 본명을 쓸 것인가. 작가 이름.

나는 개명에 대한 글을 따로 썼을 정도로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메일 주소, 인스타그램 아이디 등 네이밍에 있어 오랫동안 고민하고, 영어 이름 개명할 땐 1년 넘게 고민했다. 브런치에서는 내 한국 이름을 썼다. 필명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고, 영어 이름과 한글 이름 중에 고민하다 결국 브런치는 한글 플랫폼이기에 한국 본명을 쓰기로 했는데, 훗날 이 한글 이름을 쓰길 잘했다 싶은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본명이 아니라 필명이었다면 조금은 덜 와 닿았을지도 모른다. 내 이름과 사진이라 더 내 글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첫 번째는 브런치 메인에 내 글이 아닌 내 이름이 올라갔을 때였다. 글이 올라갈 때는 글 제목이 뜨지만, 내 프로필 사진과 이름 석자가 올랐을 때 비로소 영어 이름으로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다음의 여행 페이지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애초에 브런치 페이지를 지인들에게 알려주진 않았다. 내 남편도 내가 쓴 글을 읽지 않는데 친구들은 오죽하랴. 특히 인스타 등 SNS를 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는 더욱 알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한국에 사는 친구에게 톡이 왔다.

연락이 뜸했던 동창에게 이런 톡을 받을수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찾았냐고 물어보니 친절하게 캡처해서 보여줌.

다음에서 여행지 검색을 하고 있었는데 내 이름의 글이 있어서 동명이인일 거라 생각했단다. 그러다 글을 클릭하고 브런치 페이지에 들어가니 내가 맞아서 신기하다며 거의 일 년 만에 연락이 왔다. 이런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예전에 다니던 초등학교 친구도 글을 보고 연락이 왔고, 언젠가 잠깐 같이 일했던 지인도 글을 보고 메일이 왔다.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본명에 사진까지 올렸기에 나를 알아봤을 거다. 앞으로도 쭉 본명을 고수하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지금 쓰려고 하는 글이 메인에 올랐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으로 써도 전혀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고, 그냥 힘 빼고 설렁설렁 쓴 글이 메인 페이지에 올라 조회수가 폭발할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에도 그냥 쓰는데 의의를 두자, 아무도 안 읽어도 써서 남겨두자 했던 타투에 관한 글이 오랜 시간 꾸준히 많은 조회수를 올리다 결국엔 메인 페이지에 올랐던 글들 보다도 더 많이 읽혔다.


결국 내가 글 쓰면서 갖는 기대감이나 반응에 대해 예상하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내가 열정을 갖고 있고, 열심히 쓸 의지를 충만하게 하는 주제라면 쓸 가치가 있는 글이다.


당연히 떨어질 거라고 생각해 시도도 못했던 내가 1년 동안 여러 글을 써서 인터넷 세상의 지적이고 세련된 브런치라는 공간에 공유할 수 있어 더없이 영광이었다. 조바심 내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지난 1년간의 마음 변치 않고 더 열심히 더 꾸준히 써 내려갈 생각이다. 혹시 브런치에서 읽기만 하고 쓸 생각은 못하는 예전의 나 같은 분이 있다면 진심을 담은 글로 꼭 작가 신청을 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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