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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Mar 24. 2019

머라이어 캐리에게 전화가 왔다.

나른하고 특별한 오후의 기억

그해 여름 난 유니버설 뮤직 산하의 데프잼에서 인턴으로 근무 중이었다.


처음엔 마케팅 부서에 들어갔다가 내가 원하던 A&R부서로 옮겨서 LA Reid와 Karen Kwak의 어시스턴트, 당시 머라이어 캐리의 남편이자 지금은 전 남편이 된 닉 캐논의 어시스턴트 등 세 사람의 업무를 돕는 게 내 일이었다.


그 당시 캐런 곽은 (리아나에게 Umbrella라는 곡을 찾아주고 스타덤에 올린 장본인. 어셔와 저스틴 비버를 발굴하고 당시 데프잼의 수장으로 있었던 LA Reid의 오른팔 격이었던 캐런 곽은 한국인 교포 2세다) 로스앤젤레스 출장이 잦아서 거의 자리에 없었고, 나는 데프잼과 니클로디언(Nickelodeon)에 각각 사무실을 두고 있던 닉 캐논의 어시스턴트와 가장 가깝게 일했다.


닉 캐넌과 그 후에도 십 년 가까이 함께 일한 어시스턴트의 이름은 돌리(Dollie)였는데, 나는 돌리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녀를 커버했다. 한 번에 15분 이상 자리를 비우지 않도록 했는데, 그나마 그녀는 옆에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도 있었지 LA Reid의 비서는 아티스트에게서 직통으로 걸려오는 전화가 하도 많아서 점심시간에도, 화장실에 갈 때도 하루 종일 귀에 통화용 이어폰을 끼고 있어야 했다.


어쨌든 자리에 없는 일이 잦았던 캐런 곽의 어시스턴트 자리가 내 자리였는데, 그날도 나는 회사로 보내진 수많은 데모 음반을 돌려보내는 작업을 하며, 전세계에서 걸려오는 가수 지망생, 프로듀서 지망생의 전화를 받고 데모 음반을 보내봤자 왜 소용이 없는지 등을 설명해주며(어차피 들어보지 않고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돌려보내는 방침이라) 지루하게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리의 자리에는 닉 캐넌의 가족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도 종종 있었는데, 그의 할아버지가 특히 사무실에 자주 전화했다. 손자와 직접 통화가 되지 않으면 사무실로 전화해서 그의 안부를 묻곤 하셨다. 돌리가 잠깐 밖에 나가야 하는 일이 생겼고, 그날은 유난히 일이 없고 한가한 오후였기에 나에게 자리를 맡기고 30분가량 자리를 비웠다. 원래는 돌리 옆자리에 다른 어시스턴트도 있는데 그날은 그녀도 없어서 나 혼자였지만, 퇴근이 한 시간도 안 남은 시점이라 별 부담 없이 앉아있었다. 앉은 지 5분도 채 안 돼 전화가 걸려왔다.


"Hello, Nick Cannon's office."

"Hi, this is Mariah."


오 마이 갓


데프잼에서 일 년 가까이 일하며 통화한 사람들 중 가장 유명인과 가까웠던 사람은 제니퍼 로페즈의 매니저였다. 당시 앨범을 낸 가수, 래퍼와 프로듀서들, 발매를 앞두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직접 보는 일은 많았지만 이렇게 아티스트가 한 전화를 내가 직접 받을 일은 없었다.

이 자리 앞으로 제니퍼 로페즈도 지나가고 리아나도 지나갔다. 캐런 곽의 오피스 문에 쓰여있는 "Well behaved bitches seldom make history"

이름을 말하지 않았더라도 알아차렸을 목소리. 수화기 너머에서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매니저, 어느 부서의 누구 등 수식어가 필요 없는, 퍼스트 네임과 목소리만으로 정체성이 압도적인, 내가 어릴 때부터 팬이었던, 그토록 원하던 소니뮤직에 들어가지 못하고 유니버설에 오게 되었을 때, "그래, 카니예 웨스트와 머라이어 캐리가 있는 회사니까, "라고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던 최애 아티스트.


"Oh, hi Mariah? How may I assist you?"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아는 상황에서 입으로만 자신 있게 뭘 도와줄까 말하는데 입이 바짝 말랐다. 심장이 뛰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상냥하게 물었다.


그녀가 뭐라고 말했는지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지 만, 닉과 통화가 안된다며 자리에 있냐고 물었던 것 같다. 사무실에 없다고 하자, 지금 어디에 무슨 일로 나가 있는지 묻는데, 나로선 거기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눈 앞이 깜깜해지며 돌리가 기적적으로 그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오길 바랄 뿐이었다.

회사에서 아티스트의 전화를 받았을 때 해야 할 업무 지침 같은 건 없었다.


다만, 딱 하나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만 한 가지 확실히 있었는데, 바로 아티스트를 통화대기(Hold)에 두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티스트 전화는 절대 hold에 두면 안 돼. 그거 하나만 기억해."

라고 들었는데, 홀드 하는 대신 뭘 어떻게 하라는 지는 슬프게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으음... 머라이어 진짜 진짜 미안한데, 널 잠깐만 hold에 둬도 될까?"


LA Reid의 어시스턴트 K에게라도 전화를 돌릴 생각이었다. 머라이어는 우리 회사의 중요한 메인 아티스트였고, 매일 아티스트의 직통전화를 받는 K는 분명 머라이어가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줄 수 있으리라. 머릿속으로 홀드는 절대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입으로는 홀드를 말하는 심정은 정말 참담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티스트인데, 이렇게 통화를 하게 됐는데 할 수 있는 말이 이거뿐이라니.


순간 싸하게 정적이 흘렀다.


"하, 내가 안된다고 하면 홀드 안 시킬 거야?"

머라이어 언니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태연히 웃으며 한 말이 내 귀엔 "나를 지금 통화 대기시킨다는 거야?"라는 말로 들렸다. 순간 그날이 인턴십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녀가 세련되게 거절하는 걸 들으니 아차 내가 실수를 하고 있구나 싶어 등골이 싸해졌다.


나는 원래 전화통화를 두려워해서 어떤 직장에 가도 가장 피하는 게 전화받는 일이다. 누군가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면 늘 중요한 사람들의 전화를 받게 되는데, 그 전에도 다른 부서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 당연히 알아야 할 이름을 몰라서 몇 번이나 물어보며 실수를 해 혼났던 적이 있었다. 당시 전화를 받아야 했던 사람은 무려 본 조비를 키워냈다고 하는 마케팅 부서 시니어 임원이었고, 걸었던 사람은 유니버설의 CFO였나, 하여간 회사의 엄청 중요한 두 분의 통화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내가, “네 이름이 누구라고? 어느 부서 누구라고?” 하며 결례를 한 것이다.


머라이어가 자기가 No라고 하면 대기 안 시킬 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실 나는 미스터 캐넌의 어시스턴트가 아니고 캐런 곽의 인턴인데, 지금 돌리가 잠깐 자리를 비워서 커버하는 중이고, 돌리 옆에 다른 어시스턴트도 (하필) 자리를 비워서 내가 미스터 캐넌의 스케줄은 지금 확인할 수가 없다. 미스터 캐넌이 오전에 출근은 했었는데 점심시간 이후 자리를 비우신 중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라고.

MTV 빌딩 내의 닉 캐논 사무실. 미스터 캐논은 오늘도 외출 중입니다만...

그렇게 말하니 그제야, "아~ 그렇구나." 라며 자기가 몰랐다고 암 쏴리 미안하다며 그냥 이따 본인한테 다시 전화 걸어보겠다고 웃으며 훈훈하게 끊었다.


통화를 끝내고 나서도 넋이 나간 채로 멍을 때리고 있으니 돌리가 돌아왔다.


"아무 일 없었지?"

"머라이어가 전화했어."

"진짜? 머라이어가? 뭐래?"

"몰라, 근데 내가 머라이어한테 홀드 하면 안 되냐고 했어. 그랬더니 자기가 싫다고 하면 홀드 안 할 거냐고 하더라. 나 쫄았어."

"하하하, 진짜 머라이어가 그랬어?"


돌리는, 걱정 마. 머라이어 쿨해. 그냥 장난하는 거였을걸. 이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걱정했던 것처럼 잘리지도 않았고 그다음 날 출근한 닉 캐넌도 아무 말 없이 지나갔고 나한테는 수많은 인턴십 해프닝 중 하나로 남았다. 다만 몇 년을 지나 생각해보니, 전화통화를 할 기회도 흔치 않은데 그냥 미친척하고 "I love you Mariah!"라고 해볼걸 싶은 생각은 조금 든다. 아쉬움이 크다. 아마 지금 그런 상황이 생기면 그렇게 할 것 같다. Hi, Mariah I love you. I grew up listening to you. You're awesome! 실없는 소리일지 몰라도 나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 되고, 그녀도 잠깐이나마 즐거워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땐 그런 얘기를 하면, 아니 데프잼에 왠 또라이가 들어왔어 하며 당장 LA Reid한테 전화걸어서 그 이상한 인턴 자르라고 할 것 같았다. 


늘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것도 문제다. 항상 소주 반 병 정도 마신 듯 느긋하고 긴장 안 하는 성격이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살 수 있다면 내 인생 훨씬 흥미진진 해질 텐데.


이런 비슷한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

당시 유니버설 뮤직 내의 마스터링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건물에는 모타운과 유니버설 산하의 다른 레이블이 있어서 아티스트들이 오가는 일이 잦았다.


그날은 오전 시간에 엄마와 통화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한국 시차에 맞춰 전화를 했는데, 4층의 스튜디오에서 통화를 하니 자꾸 전화가 끊겨서 잠깐 1층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엄마한테 밖에 나가고 있다고 하니 엄마는 나중에 통화하자고, 일하는 중이니 그냥 다시 타고 올라가라고 했다. 그래서 타고 온 엘리베이터로 다시 올라가려고 했는데,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안 내리고 가만히 서 있으니 그는 내가 내리길 조용히 기다리는 듯했다. 그냥 타라고 하려다가 왠지 모를 포스에 나도 모르게 내렸는데, 그 사람이 타고 그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 덩치 큰 사람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간 그는 바로 내 인생 탑 3 아티스트 중 한 명인 스티비 원더였다. 문이 열렸을 때 내가 본 사람은 그의 보디가드, 혹은 매니저였을까.

내가 망설이다 얼떨결에 내린 엘리베이터에 보디가드가 타고, 그 뒤를 따라 천천히 따라가는 검은 옷을 입은 스티비 원더가 내 어깨를 스치고 들어가는걸 바라보며 문이 닫히기 전 몇 초간 나도 다시 엘리베이터를 탈까 얼마나 고민했던지.


순간 흥분하고 울먹울먹 하니 엄마가 왜 그러냐고 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가 지금 내가 내린 엘리베이터에 탔어!"라고 하니 엄마는 "그럼 너도 따라 타! 같이 타고 올라가!" 하는데 이미 늦었다. 나는 그럴 수 없는 입장이었다. 맨하탄 거리에서 봤거나 스타벅스에서 마주쳤더라면 쫓아가서 어떻게든 말을 걸 용기는 있었다. 분명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거기는 회사였고 나는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는 아티스트여서 왠지 조심스러웠다.


수많은 다른 인턴들처럼 페이도 없이 일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늘 조심스러웠다. 긴 무급 인턴십 끝에는 어떻게든 정직원이 되고 싶었기에 사소한 실수라도 하지 않으려고 늘 긴장하고 숨쉬는 것도 조심했다.


음악을 적극적으로 듣고 음악에 관련된 공부나 일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명쯤 인생과 가치관에 영향을 크게 미친 뮤지션이 있을 텐데, 나에게는 그중 한 명이 스티비 원더였다. 뉴욕에 살면서 머라이어 캐리, 데스티니스 차일드, 비욘세, 알리샤 키스 등의 콘서트에는 다녀올 기회가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콘서트는 내 버킷리스트에 머물러 있다. Talking Book 앨범에 있는 You and I라는 곡은 너무 아름다워서 노래 끝부분에 가면 언제나 어김없이 코끝이 찡해진다.


통화를 끝내고 스튜디오에 올라가서 방금 스티비 원더를 봤다고 하니 다들 즐거워했다. 인사를 하면 받아줬을 텐데 왜 하지 않았냐며, 미스터 원더는 원래 친절하고 유쾌해서 네가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서 팬이라고 말을 걸었으면 너를 안아주고 즐겁게 받아줬을 거라고 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보고 싶었던 분인데 실물을 봐서 소원성취는 했지만 아쉬움이 크다.



머라이어 캐리가 이달 초에 A No No라는 신보를 발매했다. 나는 요즘은 케이팝을 위주로 듣고 있는데 오랜만에 나온 그녀의 신곡을 들으니 왠지 옛날 생각이 났다.


언젠가 봤던 배틀 트립에서 방송인 박소현 님이 중국에서 발레 공연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었다. 학창 시절 내내 발레리나라는 꿈을 꾸다가 부상으로 발레를 그만두고 나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발레공연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미지 출처 KBS

그녀만큼 오랜 세월을 바치진 않았지만, 나에게는 팝 음악 시장이라는 곳이 그런 존재같다.


한국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 팝 음악 시장에서 일하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왔고, 그곳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아름답지도, 절대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메이저 음반사, 스튜디오, 저작권 협회 등에서 3년 넘게 무급으로 일하며 음악 관련 회사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인턴십 경력을 쌓았는데도 취업은 쉽지 않았다. 내 경력이 길어지는 내내 음반시장의 규모는 줄고 있었고 수많았던 레이블 회사들도 사라졌다. 인터넷의 발달로 음반과 오프라인 시장이 위축되어 오래 일한 사람들도 해고되고 일자리 수는 반으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했더라면 어느 한 곳에 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서너 번 인터뷰에서 떨어지고 나니 그동안 일하면서 견뎌왔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동안의 노력이 다 쓸모없게 느껴지고,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열심히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우직하게 믿은 나를 자책했다.


미국에서 취업의 걸림돌이던 신분이 해결되고 난 후에는 깨끗이 더 마음 정리가 되어, "음악시장으로의 도전은 여기까지"라고, 내가 해보고 싶었던 건 다 해봤다며 마무리 지었다.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번아웃(Burn out)된 채 떠난 셈이다.  인생 새로운 챕터를 열기 위한 아름다운 이별이라고 포장했다. 그 후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살았다. 어쩌다 소니뮤직이나 유니버설 뮤직의 구인광고가 보여도 그냥 지나쳤다. 그 후 미국 팝 음악은 듣기도 싫고 요즘 핫한 음악이 뭔지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걸 보면, 그렇게 정리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나보다.


박소현 님이 20년 만에 발레 공연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이제 그녀가 그동안의 응어리진 마음과 화해하고, 다시 예전처럼 애정어린 마음으로 발레를 대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과 청춘을 바쳤던 꿈과 예기치 못한 이별을 하고 나면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응어리가 진다. 쉽게 화해할 수 없다.


나도 내 십 대, 이십 대를 꿈으로 가득 채웠던 음악들을 그 이후엔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그때의 음악을 들으면 너무 가슴이 아리고 서러울 것 같았다. 결국 아름다운 이별은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콘서트도 더이상 다니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예전 그 시절의 글을 가까스로 쓸 수 있게 된 걸 보면, 나도 내가 사랑했던 음악들과 그 시절의 꿈과 낭만을 영영 잊은 채로는 살고 싶지 않았나 보다. 올봄엔 그 시절 나를 꿈꾸게 했던 음악을 하나씩 찾아 들으며 그때의 상처 받은 내 마음에 화해의 손길을 건네봐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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