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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Feb 13. 2019

맛집보다 즐거운 이국에서 장 보기

슈퍼마켓과 푸드코트는 유명 맛집 이상의 재미가 있다

현지인으로만 살던 시절엔 몰랐다. 슈퍼마켓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출처: 구글 이미지)

20대 초중반 유학생 시절 한국에서 친구들이 종종 놀러 오곤 했다.


뉴욕은 관광지가 많으니 취향에 맞게 갈 수 있는 곳들을 추려서 주어진 기간에 많이 갈 수 있도록 최대한 효율적으로 동선을 짜는 게 내 역할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흥미로웠던 건 슈퍼마켓에 가서 좋아하는 그들의 리액션이었다. 


어느 날 하루 일정이 끝나고 유니언스퀘어의 홀푸드 마켓에 잠깐 들렀는데, 거기서 너무 좋아하는 걸 보고 그 친구의 취향이 독특하다 싶었다. 그 후에 다른 친구가 아예 "미국 슈퍼마켓에 데려가 줘" 했을 때, 그리고 거기서 자기가 과일이나 치즈를 고르는 모습을 파파라치 컷처럼 뒤에서 옆에서 다양한 각도로 찍어달라고 했을 땐 살짝 당황스러웠다.


뉴욕에 갈 데가 얼마나 많은데 왜 굳이 슈퍼에서 피망을 들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예쁘게 잘 찍긴 해야겠고 어차피 뉴요커들은 별 신경 안 쓸 테지만 소심한 마음에 좀 창피했다.

나도 처음 미국에 와서 영화에서만 보던 차이니즈 테이크 아웃 음식을 실제로 보고 신기해했던 시절이 있었다. 

미국 영화와 드라마에서만 보던 미국식 중국음식을 꼭 먹고 싶다고 해서 이것저것 주문해서 사진을 수십 장 찍었던 친구도 있었다. 이건 나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신기했던지라 이해가 갔지만 슈퍼마켓에서 사진을 찍는 건 당시 여행할 여유 없이 바쁘게 살고 있던 내 눈에는 왠지 요란스럽게 보였다. 물론 워낙 슈퍼마켓에서의 반응이 좋아, 나중엔 뉴욕 오는 친구들마다 홀푸드 마켓에 여행 코스처럼 데려가긴 했지만.


여행자의 마음은 다 비슷한가보다. 처음으로 유럽에 가서야 나는 얼마나 내가 슈퍼마켓과 파머스 마켓에 열광하는 사람인지 알게 됐다.

슈퍼에 가지 않았으면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을 독일식 팬케익.

요즘 시대에 이국적인 음식점이야 어디에도 있다. 서울에도 이태리 인들이 운영하는 이태리 식당, 일본인이 운영하는 일본 식당, 터키인들이 만드는 케밥집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독일이나 프랑스 음식점은 뉴욕에도 많다. 일본음식은 초밥, 타코야키부터 파스타와 베이커리까지 꽤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는 곳들이 차고 넘친다. 


그러나 프랑스 슈퍼에 파는 치즈나 요구르트, 오스트리아나 독일 시장에 파는 생선과 제철과일은 현지에 가지 않으면 접할 수 없다. 난 여행을 할 때 현지인들 옆에서 그들이 사는 걸 곁눈질하며 장보기를 즐긴다. 

현지 슈퍼에서만 살 수 있는 아이템을 사 먹는 재미. 나는 푸딩 종류를 참 좋아하는지 푸딩 사진이 나라별로 있다.
낮은 기대치와 즉흥성이 주는 효과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검색해서 찾아간 곳보다 때마침 밥 먹을 타이밍에 지나다 무심코 들어가서 좋았던 적이 더 많다.


독일 백화점 푸드코트에서의 점심

잘츠부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독일을 건너 프랑스까지 가는 여정에서, 독일의 큰 기차역 중 하나인 슈투트가르트에서 두세 시간 여유가 있었다. 역 근처의 백화점에서 구경을 하다 푸드코트를 지나는데 점심시간을 좀 지난 시간인데 사람들이 꽤 있었고, 갓 나온 음식 냄새와 따끈한 열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딱히 식사를 할 계획은 없었는데 음식을 담는 주부들, 유모차를 끌고 쇼핑 나온 커플들, 회사원인 것 같은 사람들의 평범해 보이는 일상을 보니, 나도 그들의 일상에 들어가 그 분위기를 만끽해보고 싶어졌다.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기차역이 바로 코앞이지만 거기서 점심을 먹는 사람들은 떠들썩한 기차역과는 마치 다른 시공간인 것처럼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뉴욕의 지하철에서 지도를 보며 상의하고 내릴 역을 확인하는 관광객들 사이에 앉아 조용히 눈 감고 음악을 듣는 뉴요커들처럼.


미국에선 본 적 없는 음식들. 모양이 다른 이국의 식재료들. 처음 맡아보는 음식 냄새와 그냥 봐서는 맛을 알 수 없는 소스와 양념들. 이건 도대체 무슨 요리일까? 어떤 맛이 날까? 생각하며 하나씩 고르는 게 레스토랑에서 메뉴판을 보고 고르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남편과 떨어져서 각자 마음에 드는 것들을 집어 담고 나중에 테이블에서 서로가 고른 음식들을 먹어보고, 상상했던 맛이 나는 것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맛이 나는 것들을 먹으며 내가 여행에서 추구하는 건 그런 소소한 발견과 일상적인 경험이란 걸 깨달았다. 처음 가보는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먹는 게 그렇게 즐거운 것일 줄이야.

여행이란 그렇게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재미를 찾고 느껴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슈투트가르트 푸드코트에서의 점심. 어떤 맛이 날지 모르는 음식을 골라 하나하나 먹어보는 것 그 자체가  여행이었다.

그날 먹은 음식들은 어쩐지 낯선 맛이었지만 기대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그때의 사진을 다시 보면 어떤 맛이 났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의 신나는 감정들만은 생생하다. 이국적인 언어가 들려오고 처음 맡아보는 향기가 났던 곳. 한가한 평일 오후 독일 어느 백화점 푸드코트에서의 낯설고 신선한 경험.


여행에 다녀와서 마음속에 오래오래 간직하는 추억은 크고 대단한 걸 보는 것보단 그렇게 짧고 사소하게 흘러간 순간들이었다.



오스트리아 딸기의 추억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 생가와 주변을 돌아다니느라 피곤에 절어 호텔로 돌아가던 그날 저녁은 아직 겨울같이 추운 4월 말이었다. 


파머스 마켓을 지나는데 뉴욕에서도 흔히 보는 길거리 장터지만 이곳만의 특별한 게 있을 것 같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마켓으로 들어섰다. 과일 판매대 가득 놓인 딸기는 두 종류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은 미국에서도 흔히 본 평범한 색과 퀄리티의 딸기였고 다른 한쪽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어느 하나 상처 난 게 없어 보이는, 하나하나 정성껏 만든 모형같이 완벽한 딸기였다. 가까이 가자 코에 달콤하고 신선한 딸기 향이 확 느껴졌다. 딸기가 이렇게 향이 진한 과일이던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슈퍼에서 과일을 사고 가장 실망했던 게 딸기였다. 미국의 딸기는 딱딱하고 과즙이 별로 없고 신 맛이 난다. 바닥에 떨어뜨려도 어디 한 군데 찌그러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단단하다.


내 기준에는 한국 과일이 제일 맛있지만 눈으로 봤을 때는 이 오스트리아의 딸기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왼쪽의 칙칙한 딸기와 오른쪽의 완벽해 보이는 딸기, 가격 차이가 두배였지만 자연히 오른쪽으로 눈이 갔다. 우리가 그쪽 딸기에 관심을 보이자, 매대 뒤에 서있던 아저씨가 한마디 했다.


"이쪽은 이태리 딸기(맛없어 보이는 딸기), 이쪽은 오스트리아 로컬 딸기."


마치 "봐, 네가 눈이 있다면 당연히 이쪽을 사겠지"라고 말하는 듯한 아저씨 목소리는 로컬 딸기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그럼 굳이 이태리 딸기는 왜 파시나 싶을 정도로. 미국에선 이태리 물건이나 식재료가 고급으로 여겨지고 확실히 미국 현지 식재료보다 프리미엄이 붙은 가격에 팔린다. 


미국에서 이태리제는 식재료를 떠나 가구, 패션 등 수많은 분야에서 최고급으로 여겨지는 곳에 살다가 초라하고 칙칙한 이태리 딸기를 만나니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내가 유럽에 왔구나, 미국과는 다른 곳이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막상 또 이태리에 가면 그곳에서 파는 현지의 딸기는 환상적으로 맛있을 것이다, 이곳의 잘츠부르크 로컬 딸기처럼.


아저씨가 손짓과 눈짓만으로 강력하게 추천한 딸기를 사서 호텔에 돌아와 한 입 베어 먹는 순간 상큼한 딸기향과 과즙이 입안 가득 채웠다. 이런 딸기를 매해 먹을 수 있다면 내 삶이 좀 더 행복해질 것 같은 맛이었다. 내가 한국에만 살았어도 남의 나라 딸기에 이렇게까지 흥분하지 않을 텐데. 그동안 미국에서 사 먹은, 그나마 좀 더 맛있을 것 같아 돈 더 주고 샀던 유기농 딸기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미국 딸기를 먹어본 사람이라면 분명 공감하겠지만 미국 딸기는 딸기를 안 좋아하고 잘 안 먹게 만든다.


어느 나라에 가서 어떤 과일을 먹어도 미국보다는 맛있는 걸 보면 미국 과일은 진짜 맛이 없나 보다.

아, 과일이 맛있는 나라에서 살고 싶어라.

"이쪽은 오스트리아 로컬 딸기", 하는 아저씨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첫 유럽 여행지의 슈퍼마켓에서 다양한 간식과 과일을 맛본 후, 다음 어느 여행지를 가도 나는 슈퍼마켓과 시장을 꼭 둘러보게 됐다. 물가가 비싼 도시에 살다 보니, 어디를 가도 뉴욕보다 가격이 저렴해서 계산할 때마다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모든 것을 비싸게 지불하고 뉴욕에 살고 있는가 싶을 만큼.


편의점보다 한수 위, 일본의 슈퍼마켓

한국에서도 편의점, 대형마트, 재래시장에서 살 수 있는 것들이 각각 다른 것처럼 외국여행을 할 때도 각각의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을 찾는 재미가 있다. 일본 여행을 가면 보통 편의점을 자주 이용하게 된다. 일본의 편의점이란 공항부터 시작해서 기차역과 호텔 인근에 로손, 세븐일레븐 등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어서, 일본 여행을 하며 편의점을 안 가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일본 편의점 인기 템들을 정말 좋아하는 나도 여행 기간이 길어지니 편의점이나 식당에서 먹는 음식이 질리는 타이밍이 왔다. 평소 한식 다음으로 많이 먹는 일식인데도 2주 넘게 먹다 보니 달달한 간장 베이스의 음식이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호텔에서 좀 멀더라도 편의점이 아닌 슈퍼마켓을 찾아서 다녔다.

여행자가 된 지금, 나도 찍는다 슈퍼마켓 사진.

일본의 편의점엔 분명 편리하게 살 수 있는 것들이 많지만, 슈퍼마켓에 가면 또 다른 신세계가 펼쳐진다. 


편의점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다 있고 거기에 술과 음료 종류도 훨씬 다양하고 고양이, 강아지 용품도 갖추고 있다. 일본에서 흔히들 쓰는 마스크도 편의점보다 더 옵션이 많고 가격도 저렴하다. 수많은 조리된 음식들에는 매장에 나온 시간이 적혀있고, 밤이 되면 가격이 할인된다. 편의점에선 볼 수 없는 채소와 과일들이 있는 건 물론이고, 다양한 반찬과 생선회 종류도 있다. 김치도 한번 사봤지만 한국인 입맛엔 너무 달아서 다시는 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외국에서 여행할 때 추천하는 색다른 경험*


해외여행 중에 평소에 하는 일상적인 것들을 해보면 색다른 재미가 있다. 현지의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는 것, 여행 간 곳의 날씨와 스타일에 맞는 옷을 현지에서 사서 입고 다니는 것,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술을 마시고 기분 좋은 정도로 취해서 거리를 걸어보는 것,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현지의 노래방을 체험해보는 것 등이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낯선 장소에서 익숙한 일을 했을 때 마치 현지인이 된 듯한 느낌이 극대화되어 짜릿한 기분전환이 된다.

고르는 재미가 있었던 일본 슈퍼마켓에서의 장보기. 일본 딸기와 토마토를 맛보는 시간.

독일인이 열광하는 채소를 만나다

독일의 마지막 여행지였던 뮌헨에 도착했을 땐 5월 초였다.


호텔에서 가까웠던 마리엔 광장에 파머스 마켓이 섰는데, 그중에 신기했던 게 흰 아스파라거스였다. 아스파라거스는 이제 한국에서도 쉽게 살 수 있고 미국에선 흔하디 흔한 채소인데, 독일에서는 그게 굉장히 특별한 것처럼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너도나도 흰 아스파라거스를 팔고 있었다. 처음 한두 군데 지나칠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곳의 모든 상인들이 다들 하나같이 똑같은 걸 팔고 있는 걸 보고는 진심 아스파라거스 페스티벌이 열린 줄 알았다.


뉴욕에서도 유니언스퀘어의 마켓에서 가을에 사과 철이 되면 인근의 사과농장에서(뉴욕은 미국에서 워싱턴 다음으로 사과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주(州)다) 온 상인들이 여기저기서 똑같은 사과를 팔지만, 이렇게 모든 매대에서 하나같이 아스파라거스만을 파는 건 본 적이 없었다.

호텔 방에 키친이 있었다면 나도 사서 뭐라도 해 먹어 봤을 독일의 흰 아스파라거스

마리엔 광장 이외에도 남은 여정 동안 가는 곳마다 있었던 흰 아스파라거스 슈파겔(Spargel)이 궁금해져 검색을 하니, 독일인들이 가장 열광하는 채소이자 식재료 중 하나로 그 시기가 마침 슈파겔 시즌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매년 4월부터 6월 중순~말까지가 독일에서 채소의 왕이라 불리는 슈파겔 철인데, 삶은 감자와 햄 종류에 홀랜다이즈 소스를 뿌려 먹는 게 가장 기본적인 요리방법이라고 한다.


나중에 뉴욕에 돌아온 후 슈퍼에 흰 아스파라거스가 보이길래(그 전에도 있었겠지만 이제야 보였다) 한번 사서 해 먹어봤는데 질기고 맛이 없었다. 아마 독일의 슈파겔은 분명 더 연하고 풍부한 맛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며 다음번에 또 그 시즌에 가면 어떻게든 현지식으로 요리된 슈파겔을 꼭 먹어보겠다고 다짐했다.


지난 여행의 사진을 훑어보면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기억보다 더 소소한 재미가 있었던 게 바로 그런 곳들이다. 퇴근한 직장인들과 주부들 옆에서 그들이 어떤 브랜드의 주스를 많이 사는지, 어떤 맛의 요구르트를 사고 그 계절에 어떤 과일이 인기인지 옆에서 구경하고 나도 먹어보는 것. 가끔은 그들 사이에 껴서 관광객처럼 말고 현지인처럼 일상을 만끽하며 지내다 오는 게 가장 오래 잔상이 남는 여행의 추억이다.


독일인들이 봄에 흰 아스파라거스에 열광한다는 건 아마 그 시기에 독일에 가지 않았다면 영원히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다른 세상에 대해 발견하는 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짜릿하다. 슈퍼마켓 MD라도 되고 싶은 건지 점점 나이를 먹어서인지, 나는 외국 여행 가서 장보는 게 백화점 쇼핑보다 점점 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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