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녀가 혼자서 간 온천여행은 도전 그 자체였다.
원래 혼자서도 잘 놀고 쇼핑도 혼자 잘 다녀서 나 혼자 여행을 가는데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일정을 맞출 수 있는 여행 메이트가 없다면 기꺼이 혼자서 가리라며 자신만만하게 일본 여행 일정을 짜고 호텔을 예약하다 야심 차게 료칸에서도 1박 하기로 했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온천이나 대중목욕탕을 즐겨 이용한 적이 없다. 엄마가 데려가니 따라가야 하는 곳이었을 뿐이다. 고등학생이 되어 더 이상 매번 가지 않아도 됐을 때 어마어마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 후 20대 초에 한국을 떠나 십 년 넘게 외국생활을 하다 보니 더더욱 대중목욕탕을 갈 기회가 없었고, 한국에 방문하면 한두 번쯤 가는 게 전부다.
대전에는 유성온천이 유명한데, 온천을 좋아하는 언니는 이틀에 한 번씩, 컨디션에 따라서는 매일 갈 정도로 대단한 마니아다. 언니와 유후인 온천에 갔을 때 처음 가 본 노천온천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서, 혼자 가는 여행에서도 일정에 온천을 넣었다.
오카야마와 구라시키를 가기 위해 구입한 간사이 와이드 패스로 가 볼만 한 온천마을은 기노사키와 아리마 온천이다. 아리마 온천은 기노사키보다 규모가 크고 훨씬 더 유명한 곳이었지만, 기차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는 게 귀찮아서 기차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기노사키로 선택했다.
기노사키 온천은 내 여행 일정 중 세 번째 목적지였는데, 두 번째 여행지인 구라시키에서 5박을 하며 기노사키 일정이 다가올수록 부담이 커졌다. 2년에 한 번 가는 한국에서도 온천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외국에 가서 그것도 혼자서 간다니. 내 평생 혼자는 대중목욕탕에 가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니와 엄마를 따라가면 늘 일등으로 나가려고 하는 내가 왜 온천을 넣었을까. 여행 갈 생각에 너무 신나 생각 없이 계획을 짠 탓이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온천을 일정에 넣은 것에 대한 후회와 부담이 커졌다. 고민을 하며 온천 순례는 하지 말고 숙소에서만 묵고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까지 부담을 느낀 이유는;
1. 다들 커플이나 가족단위로 올 텐데 나만 혼자라 심심하고 외로울까 봐
2. 혼자서 대중목욕탕을 가는 게 처음이라, 여럿이 갈 때와 달리 혼자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모를까 봐
3. (가장 큰 이유) 문신이 있는 사람은 살색 패치를 붙여야 하는데 그게 물에 젖으면 쉽게 떨어진다. 그게 떨어져서 민망하게 쫓겨나는 상황이 생길까 봐.
라고 정리할 수 있지만 결론은 그냥 소심한 성격 탓이다.
그럼에도 기노사키 온천에 가고 싶었던 건 우선 소토 유메 구리(外湯めぐり)라는 이곳만의 독특한 온천 순례 시스템이 호기심을 자극했고, 두 번째는 구라시키와 비슷하게 버드나무가 늘어진 평화롭고 고즈넉한 시골마을의 정취를 직접 보고 느끼고 싶어서였다.
기노사키 온천마을 내의 료칸에 묵으면 7개의 모든 온천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패스를 준다.
마을을 거닐다 보면 유카타를 입고 온천 순례를 다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알록달록한 유카타를 입은 사람들이 고요하고 예스러운 마을의 정취와 그림같이 어우러져 마치 다른 시대와 장소에 와 있는 것 같다.
당일치기 온천 관광객들이 떠나고 료칸 이용객들만 남은 밤에는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유카타를 입고 있다. 조용해진 밤거리를 걸으면 마치 백 년쯤 전의 이국으로 시간여행을 와 있는 듯한 감성에 젖어든다.
체크인을 하며 신중하게 유카타를 골랐다. 서너 가지 디자인 중 하나를 고르는 줄 알았는데 열 가지도 넘게 있어서 쉽게 고르기 어려웠다. 뭐가 예쁜 건지, 뭘 보고 골라야 하는 건지도 몰라서 패턴과 색깔만 얼른 보고 대충 집어 든 결과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
유카타 사이즈는 체격이 아니라 키에 맞게 고른다.
유카타는 "옷자락이 복사뼈 정도까지 오는 길이가 베스트"라고 쓰여있다. 키가 165cm~168cm이면 L이 맞는다. 170cm 정도인 나는 일본인 직원이 보기에 L도 짧다며 LL이 맞다고 했다. LL 사이즈라니 자존심은 상했지만 168 이상인 분들은 처음부터 L 사이즈를 입어보는 걸 추천한다.
반대로 하는 건 고인(故人)들에게 입히는 방식이라고 하니 주의하는 게 좋겠다. 나는 두 번 다 틀리게 입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았다.
이틀 동안 돌아다니며 수많은 유카타를 보니 여자들의 유카타는 색깔이 쨍하고, 밝고 화려할수록 더 예뻤다. 혼자 다니는데 튀는 게 싫어 베이지 색을 골랐는데, 사이즈를 바꾸러 갔을 때 LL 사이즈는 연보라색 하나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골랐지만 여행이 끝나고 사진을 보니 화사한 연보라 색이 베이지보다 더 예뻤다.
언젠가 또 유카타를 선택하게 된다면 그저 색깔과 무늬가 화려하고 색이 화사한 걸로 고르겠다.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시냇가 위에 늘어진 버드나무도 보고, 유카타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 구경도 하며 사진을 찍었다. 지도를 보며 일곱 개의 온천들 중에 가장 흥미로운 곳과 숙소와 가까운 곳 위주로 선택해 각 온천의 위치를 파악했다.
기노사키 온천 역 바로 앞에 위치한 사토노유(外盪さとの湯)는 일본 최대의 역사온천으로 대욕장, 사우나와 기노사키 온천마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노천온천까지 있어 여행객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원천에서 지장보살이 나왔다고 해서 그 이름을 딴 지조우유(地蔵湯), 가장 규모가 작은 소토유인 야나기유(柳湯), 마을 한가운데 있어 접근성이 좋고 에도시대 중기에 천하제일이라 해 붙여진 이름의 이치노유(一の湯)도 인기 소토유 중 하나다. 미인탕으로 알려져 여성 여행객들에게 큰 인기를 끄는 고쇼노유(御所の湯)는 통유리로 설계된 대욕장이 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기노사키 마을에 있는 온센지(온천사)의 스님이 천일 기원한 곳에서 온천이 나왔다고 하는 만다라유(まんだら湯), 황새가 다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 늪지가 온천이 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코우노유(鴻の湯)까지 돌아보면 7개의 소토유를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출처: 겟어바웃 트래블 웹진 "유카타를 입고 거니는 기노사키 온천마을")
기억을 되짚어보면 미인탕이라고 불리는 고쇼노유, 황새가 상처를 치유했다는 코우노유, 마을 한가운데 있는 이치노유 등 세 군데에 간 것 같다. 미인탕 외에는 동선이 짧고 이동이 간단한 순으로 택했다.
동네를 둘러보고 방에 들어왔는데 저녁식사까지 아직 한 시간도 넘게 남았다.
학창 시절 운동회를 하면 아침부터 하루 종일 달리기 계주에만 온 정신이 쏠려있었다. 반 대표로 나가서 뛰어야 하는 계주가(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끝나고 나서야 운동회를 즐길 수 있었다. 이 온천 순례는 그 달리기 같았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혼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이 무리한 일정을 넣었다. 가족 여행자들로 가득할걸 알면서도 이 곳에 내가 나를 던진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이제 와서 온천 순례를 하지 말까 하는 나약한 생각은 말도 안 된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날 그렇게 못나게 키우지 않았다. 나는 씩씩하게 온천 세 군데에 다 가서 만끽하고, 새로운 경험이 주는 추억을 가득 안고 내일 이곳을 떠날 것이다.
마을에 하나뿐인 편의점에 가서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사 왔다. 우여곡절 끝에 유카타도 사이즈에 맞게 바꿔서 입고, 이제 나 홀로 온천여행의 첫 관문인 저녁식사 시간이 왔다.
내가 묵은 료칸은 전통적인 료칸과 달리 혼자 묵을 수 있는 침대방이 있어서 예약했는데, 저녁식사는 2층의 레스토랑에서 하고 아침식사는 1층 카페에서 제공됐다. 예약한 시간에 유카타를 입고 레스토랑으로 내려가니 가족단위로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내가 예약해둔 테이블 하나만이 비어있었다.
난생처음 솔로 여행을 간 곳이 일본이라 좋았던 건 마음 놓고 혼밥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여행 내내 호텔 조식 뷔페도 혼자 잘 먹고 우동도 모스버거도 잘 먹고 다녔는데, 료칸의 코스 저녁 요리는 좀 부담스러웠다. 최대한 멀쩡한 외모라도 갖추자며 화장을 지우지 않은 채 유카타를 입었다. 레스토랑에 내려가 영어로 인사를 하고 여유로운 척 4인용 테이블에 앉았다.
가족들끼리 온 사람들 사이에서 혼밥이 시작됐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아마추어처럼 폰을 들여다보며 먹기는 싫다. ‘고독한 미식가’처럼 오롯이 식사에 집중하는 콘셉트로 간다. 음식 메뉴는 이미 정해져 있어서 순서대로 나온다. 애주가는 아니지만 혼자서 먹는 만찬을 더 풍요롭게 할 겸, 지금 이 식사와 이따 혼자서 온천에 갈 부담을 떨칠 겸 사케를 한 병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술이 먼저 나와 비장하게 원샷을 때렸다. 평소에 반주도 하지 않고, 마음먹고 하는 음주는 일 년에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지만 지금 여기서 기댈 수 있는 거라곤 술뿐이었다. 그 와중에 사케는 어찌나 잘 골랐는지 목 넘김도 부드럽고 라이트 바디에 달콤해서 쭉쭉 들어간다.
기노사키에서 보낸 하루 동안 혼자 여행 온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을 정도로 이곳은 가족 여행지였다. 옆 테이블에 십 대 딸 둘이 있는 네 가족은 이미 온천 순례를 끝내고 왔는지 볼은 벌겋고 머리는 젖은 채로 즐겁게 고기를 구워가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 나도 온천 끝내고 와서 밥 먹는 거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긋지긋한 소심함을 떨칠 수가 없어 계속 더 따라 마시다 보니 첫 번째 병을 다 비웠고, 음식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색함도 매끄럽게 해주지 않나.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건 북풍이 아니라 따뜻한 태양이었다. 술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에 취해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빈 속에 한두 잔 들어가니 이미 내 집같이 편했는데, 맛있는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그 리듬이 끊기지 않도록 곁들여 마셨다. 왠지 음식도 더 맛있게 느껴졌던 건 기분 탓인가.
이래서 사람들이 반주를 하는구나.
반주(飯酒)
주로 저녁상에 반주가 따르는데, 반주는 식사할 때 식사 전에 술을 한두 잔을 마셔서 피로를 풀고 식욕을 돋우게 하려는 데 그 뜻이 있다. 이러한 관습은 가정에서 술을 빚기 시작할 때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반주로 쓰이는 술은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이 맑은술을 쓰는데, 계절에 따라서 봄·가을·겨울에는 약주류, 여름에는 약소주류를 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피로를 풀고 식욕을 돋우는” 반주의 역할과 매력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처음엔 음식이 나오는 족족 파워 블로거/인스타그래머인 척 각도를 바꿔가며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사진을 찍었는데 중간부턴 사진 찍는 것도 잊은 채 온전히 음식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즐거운 식사를 끝내고 온천 순례를 나왔을 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카타 겉에 입은 두터운 외투에 툭툭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첫 번째 목적지이자 숙소에서 가장 먼 온천으로 향했다. 낮에 지나치며 봤을 때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첫 번째 온천은 몸풀기 용도, 20분 정도로 짧게 끝내고 나왔다.
두 번째 온천에 갔을 때는 씻을 필요 없이 바로 노천탕으로 나갔는데, 앉아서 보니 탕의 한가운데 걸터앉은 백인 여자가 알록달록 오색 문신으로 가득 찬 상체를 탕 밖으로 내놓고 양팔은 머리 위에 올리고 하이 파워 포즈(High-Power Pose)를 취하고 세상 편하게 앉아 있었다.
보디랭귀지라는 건 생각보다 파워풀해서, 문신을 빼면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금발의 젊은 여자인데도 탕 한가운데 높은 곳에 앉아 저러고 있으니 어쩐지 주변의 공기가 싸했다.
그걸 보고 나와 세 번째 온천에 가니 이제 나도 내 문신에 붙인 패치가 떨어질까 봐 하는 걱정이 깨끗이 없어졌다. 문신 금지 문구는 붙여놓지만 실제로 돌아다니며 단속을 하지는 않는구나 싶어 내가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을 했는지 깨달았다. 마지막 노천탕에서 느긋하게 앉아있다 나왔다.
목표했던 세 번째 온천까지 끝내고 나오니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그치고 밤은 깊어져 있었다.
온천 순례를 다니는 사람들 옆에서 나도 평화로운 시골길을 천천히 걸었다. 긴 시간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나오니 전신 마사지라도 받은 듯 피로가 풀리며 개운해졌다. 언니는 이런 맛에 온천을 다니는구나.
숙소를 향해 여유롭게 걷다 어느 문 닫은 식당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았다.
얼음이 되기 직전인 것처럼 찬 복숭아 물을 천천히 마시며 자판기 옆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열을 식혔다. 비가 그친 밤하늘도 올려다보고, 옛날식 가로등에 비쳐 더없이 운치 있는 버드나무도 봤다. 개운하고 깨끗해진 몸으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기차 타고 이동하고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머릿속에 들었던 불편한 마음, 부담, 외로움 등 소모적인 감정들이 온천물과 함께 씻겨 내려갔다. 벚꽃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밤이었다.
숙소에 가자마자 곯아떨어져 꿀같이 단 잠을 잤다.
다음엔 혼자보단 누군가와 같이 오면 더 재미있을 곳이지만, 혼자서도 이 정도는 하고 다닐 수 있다는 걸 깨달아서 좋았다.
평생 두고두고 기억할만한 추억 하나 만들고 떠납니다.
벚꽃이 흐드러진 기노사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