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수포와 구순염
나는 컴퓨터 공학, 그중에서도 프로그래밍을 전공했다. 각종 과제, 특히 프로그램을 짜는 과제는 거의 매번 며칠씩 밤을 새워가며 완성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과제를 시작하기 전, 나는 아예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렌즈대신 안경을 쓰고 랩실에 자리잡았다. 특히 과제 제출이 임박하면 잠잘 새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밥 먹을 여유조차 없다. 대충 초콜릿바나 음료수 따위로 배를 채워가며 프로그램을 짰다. 과제를 제출하고 나면 나는 없는 돈을 털어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가 그대로 쓰러져 잠 들었다. 이런 생활이 한 학기에도 몇 번씩이나 반복되었다.
졸업반이 되었을 때 나는 자취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살고있었는데, 엄마는 나의 이런 불규칙한 생활이 몹시 못마땅하셨을 것이다. 다시 한번 생활패턴 엉망, 식습관도 엉망. 운동 또한 전혀 하지 않으니,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될 수 밖에. 철마다 달고사는 감기는 그닥 놀라운 일도 아니었지만, 이번엔 새로운 증상이 생겼다.
입술에 뭔가 생긴 것이다. 겉으로는 딱히 보이는 것도 없고 그저 뭉근한 것이, 아프다기보다는 가려운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 입술 한 쪽이 부어오른 모습이 그냥 웃겨 보였다 (그치만 웃을 일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이른바 입술수포, 혹은 입술 헤르페스라 불리는 질환이었다. 며칠 지나면 낫겠지 생각했는 데, 가렵기도 하거니와 부풀었던 곳이 터지며 입술 주변 피부까지 옮아가기 시작했다. 가려움은 점점 그 정도가 심해졌고 환부도 점차 넓어졌다.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은 나는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았다. 연고를 바른다고해서 곧바로 낫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려움은 좀 가라앉았고, 열흘 남짓이 지나서야 겨우 나았다.
입술 수포는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질환인데, 스트레스나 면역력 저하시 재발하곤 한다. 감기의 끝 무렵이라든지, 피곤하거나 컨디션이 저하될 때면 불쑥불쑥 나타난다. 몇 번 겪어보니 증상이 겉으로 드러나기 전에 이미 그 조짐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시클로버 연고는 그렇게 나의 상비약이 되었다. 고함량 비타민B 영양제의 존재를 알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처음 발병 이후 20여년이 훌쩍 지난 현재까지도 입술수포는 으레 치르는 연례행사다. 안타깝게도 완치 개념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 번 발병하면 가라 앉았다가도 또 재발하기 때문이다. 그냥 남은 삶 동안 ‘반려 질병’처럼 데리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아예 한 번도 안 나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터지는 사람은 드물다. 일종의 불치병이다.
아프기도 하고 가렵기도 한데, 무엇보다 사람얼굴이 너무 더러워 보인다는 큰 단점이 있다. 그렇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컨디션 조절 잘 하고, 비타민도 잘 챙겨 먹고, 아시 클로버 연고를 잘 구비하고 있다가 조짐이 보이면 재빨리 발라주고. 단지 그렇게 할 뿐이다.
피곤할 때 입술이 부르트는 것은 헤르페스 (herpes, 단순 포진) 바이러스로 인한 것인 데, 한 번 감염되면 평생 우리 몸의 숙주 세 포에 잠행하는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다 몸 이 피곤하면 잠행하던 바이러스가 다시 빠 른 재생산을 시작해 세포가 터져 죽으면서 입술이 부르트게 되는 것이다. (<송기원의 생명공부>, 송기원, 사이언스 북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