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하는 자세
나는 책이 좋다. 읽는 것도 좋지만 사는 것도 좋아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도 좋아한다. 논문 때문에 교수님 사무실에 가면, 개인 사무실보다도 마치 도서관에 온 것만 같이 책장에 빽빽하게 꽂힌 수백 권의 책을 더 부러워하는 'nerd'다. 의류 브랜드 장바구니는 텅텅 비어있어도, 온라인 서점은 갖고 싶은 것들이 넘쳐나는, 종이향 물씬 풍기는 사람이다. 아니,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사람으로 비치고도 싶다.
어릴 때부터 나는 책을 좋아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도 내 방 책꽂이에는 책이 한가득이었다. 유치원 다닐 땐 몬테소리를 비롯한 동화책 수백 권이, 초등학교 들어갈 땐 삼국유사. 삼국사기.. 세계문학전집은 아동용, 청소년용, 성인용으로 다 가져본 것만 같다. 그 분야도 다양해서 세계사, 세계 문학, 한국 문학, 동화, 과학, 철학... 책장 두 개가 꽉 차고도 모자라, 신발장 세 개를 비워 책을 채워 넣고도 남을 정도였다. 학교에서도 차에서도 집에서도 얼마나 책만 끼고 살았던지, 담임선생님이 엄마에게 '검사 좀 받으러 가라'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왜 그랬나 생각해보면, 음악을 전공하느라 학교도 종종 빠지고 친구들과도 함께 어울리지 못하던 어린 시절, 유일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 사람들은 왜 싸우고, 왜 울고, 왜 화를 내는지, 책은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공주님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예쁜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 갈 수 있었고, 의인 전을 읽을 땐 내가 내 몸에 불을 붙여가며 분노와 울분을 터뜨리며 세상과 싸울 수 있었다. 책을 읽느라 밤을 새기도 하고, 다음 권이 궁금해서 틈만 나면 서점에 들러 기웃대기도 했다. 다행인 건 이런 내 마음을 잘 알았던 부모님이 적어도 책을 사는 것만큼은 아끼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몇 백권 전집을 사주고도 또 책을 사달라면 군말 없이 서점으로 향하는 그런 부모님 밑에서 나는 읽고 싶은 것 다 읽어 가며 책벌레로서 최고의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책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든 알람을 꺼 놓는 주제에, 서점 앱은 딩동 할 때마다 들어가서 무슨 신작이 나왔나 기웃대고, 논문 때문에 바빠서 읽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앞으로 '읽을 책이 모여있는 작은 책장'을 만들어 한 권씩 채우는, 책과 함께하는 나날을 나는 살아가고 있다.
한국인의 독서량이 세계 최하위권이라고 하는 이 시대에 나는 지난 주말에만 네 권의 책을 읽었다. 두 권은 과제 때문이었다고 해도 지인의 결혼식에 가면서 시간이 비길래, 엄마와 카페에 갔다가 마침 사람이 얼마 없고 조용해서, 등등의 이유를 붙여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서 정말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읽었다 -고 말하지만 사실 결말이 궁금해서 중간에 멈출 수가 없긴 하다)
그런데, 나의 이런 다년간의 책 사랑은 바로 어제 지하철에서 만난 이름 모를 아저씨에게 무참히 밟혀 버렸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지 않고 핸드폰을 보고 있어서'가 그 이유였다. 내가 예민한 거겠지라고 아무리 내 잘못으로 돌리려고 해도, 아직 어린 사람이라 그게 잘 되진 않는 모양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섭섭하고 화나는 마음만 커지고 만다.
이 일의 전말은 이렇다. 오전 10시, 아침 등원 지도까지 합치면 8시 반부터 오후 네 시까지 오전 오후 수업을 치른 뒤 (결석하고 싶었는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선생이라서... 내가 담임이라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서울에 올라가 학교 도서관에서 무거운 책을 잔뜩 빌리고, 한국어 모의 수업이 이뤄지는 장소로 또다시 이동할 때였다. 막바지 논문 작업을 하느라 일주일 내내 평균 새벽 4시에 잠을 청했던 나는 많이 지쳐있었고, 그래서 지하철로 이동하는 10여분 동안 책 대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루이 X통 가방'. 20대인 나와는 어쩌면 동떨어져 보이는 검색어이지만 엄마 가방을 알아보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이곳저곳 어떤 게 괜찮을까 꽤나 열정적으로 봤었던 것 같다. 유학생활 마치자마자 거의 바로 월급쟁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원 다닌다고 엄마에게 좋은 가방 하나 못 사드린 게 못내 아쉬워서, 다시 돈이 궁한 박사생이 되기 전 선물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때,
"이야, 요즘 사람들은 핸드폰만 쳐다보고 책 같은 건 들여다도 안 보는데 말이야."
갑자기 내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큰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복식호흡을 할 때 생기는 배의 움직임이 느껴졌을 정도로 붐비는 지하철에 있던 나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남자를 쳐다봤다.
"아가씨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책 들고 있는 젊은 사람들 없는데. 다들 핸드폰만 보고 있지."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방금 전 역에서 지하철에 올라 탄 한 아가씨가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보였다. 책을 읽는구나 하고 다시 눈을 화면으로 돌리는데 이제는 말하는 걸로도 모자라, 아가씨를 직접 쳐다보며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역시 여자는 책을 읽어야 돼요. 여자 손에는 책이 있어야지. 아가씨, 아주 훌륭하시네요. 책이! 아주 좋은 거예요. 여자의 손에는 책이 참 잘 어울려. 책이 있어야 참 이쁘단 말이에요 아주 훌륭한 일 하는 겁니다. 저거 보세요. 이야, 요즘 이런 사람 없는데 말이야. "
문간 앞에는 내 또래의 여자가 그 아가씨와 나밖에 없었으므로,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아가씨에게로, 그리고 나에게로 와 꽂혔다. 약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내 옆의 아저씨는 20대 어린 여자가 명품백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안 좋아 보였겠구나 하는 생각에 죄송하다고 이야기하려는데, 문득 내가 내 핸드폰으로 내가 보고 싶은 것 보고 있는데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뭐라고 하건 말건, 나는 핸드폰을 끄지도, 화면을 바꾸지도 않고 하던 행동을 그대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그 아가씨가 먼저 내리고, 그 남자도 곧이어 하차하였다.
모의수업을 하기 위해 준비한 교안과 단어카드, 그리고 아직 읽지 못한, 어쩌면 또다시 새벽 네시에 잠이 들게 할 도서관의 책들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지하철에서 내가 핸드폰을 보고 있었던 것이 그렇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이었을까. 그 짧은 10분이라는 시간에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들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또 책을 읽으려고 시간을 만들고. 선생으로서, 그리고 대학원생으로써 눈 뜨면 글을 읽고 공부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그 몇 분이 나를 책도 안 읽고 생산적이지도 않은 그냥 그저 그런 머리 빈 20대 여자로 만든 것만 같았다. 속상한 마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울기라도 할 것처럼 다다닥 쏘아댔다.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나는 너무 속상하다고.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던 엄마가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라고 했다. 어차피 그들은 모르니 내 마음만 속상하다고. 그러고 보니 운전할 때, 택시에서, 나는 계속 그런 상황을 맞닦뜨렸었다. 19년 동안 산 우리 집 가는 길인데 운전 6년 차인 내게 운전을 할 줄 모르니 길 보는 눈이 구리다며 자기가 더 잘 안다고 핀잔을 듣는다거나, 좌회전 신호를 받고 제 신호에 들어갔는데, 골목길에서 돌진하던 남자가 갑자기 들어가서 밥이나 하지 왜 운전대를 잡아서 자기를 화나게 하냐고 윽박을 지르거나, 외국인 동료가 주문하는 것을 곁에서 도와주고 있는데 갑자기 싼 여자가 된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수없이 고민한다. 이 때 내가 '아저씨! 저 매일 책 까고 사는 사람이고요. 가방에도 책이 네 권이나 있고요. 오늘도 두 시간 자고 논문 쓰고 애들 가르치고 온 선생님이에요! 아주 눈만 뜨면 흰 종이에 검은 글씨 보는 사람이니까, 저한테 책 가지고 뭐라고 하지 마세요!'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하지만 항상 이러다 한 대 맞는 거 아냐? 하고 그 고민은 별 소득 없이 끝나고는 한다. 며칠 지나면 잊히겠지, 별로 신경 쓰지 말자고 되뇌면서 속으로 감정을 삭히고 삭힌다. 나서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내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어차피 또 그런 상황을 만나게 될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항상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입이 쓰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참,
"아저씨, 저 책 좋아해요.
어쩌면 그 아가씨보다 훨씬 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