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음에도 함께 있지 않은 우리들.
지난 토요일, 오래간만에 찾아온 여유를 만끽하고자 근처 영화관을 찾았다. 다닥다닥 붙어서 보는 것 말고 좀 더 넓고 편하게 (특히 팔걸이!!) 보고 싶어서 컴포트관이 있는 메가박스로 향했다.
신과 함께, 공조에 이어 이번 달 들어 세 번째로 선택한 한국 영화, 목격자. 해외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어머니께서 혹여 싫어할까 IPTV로 서비스되면 보려고 했던 영화인데, 먼저 알아보고 이야기를 꺼내 주셔서 주저 없이 예매하였다. 개인적으로 해외 영화보다는 한국영화를 선호하는 편인데, 특히 목격자처럼 한국의 사회, 문화가 끈적하게 녹아있는 경우,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뻔한 내용의 영화라고 할지라도 영화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몰입도에서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이성민, 진경, 김상호. 한국 영화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얼굴이었기에, 사실 배우에 대한 기대는 높지 않았다. 이미 많이 접했던 배우들이고, 알고 있는 연기 스타일이었다. 바로 며칠 전 '공조'에서 이미 인사한 바 있는 이성민 배우. 대사를 치는 호흡이나 억양, 말투까지 배우를 생각하면 귓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는 진경 배우의 음성, 조금 기대되는 것이 있다면, '착하고 생활력 있는 청년'이미지인 배우 곽시양의 악역 연기 정도? 어쩌면 나는 그저 할 일 없는 토요일 저녁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아무 기대 없이 영화관으로 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내가 느끼는 막연한 공허함, 외로움, 그리고 걱정은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를 여실히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파트'가 있었다.
범죄 수사물 광인 나에게 망치 살인범은 전혀 새로운 소재가 아니었고, '결국은 아빠가 이기고, 살인범은 잡힐 거야'하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시나리 오또 한 가지고 있었지만, 고개만 살짝 돌려도 보이는 수많은 아파트 단 지과 뒷산은 나를 영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아파트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세 명의 목격자. 아파트 값 떨어질까 봐 쉬쉬하는 주민. 내 가족이 다칠까 봐 걱정하는 내 집이지만 은행집인 아파트를 소유한 대한민국 보통의 가장. 전기톱으로 무자비한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마를 지하 1층, 1층, 2층, 다락방과 강아지가 있는 넓은 마당에서 상대해야 하는 금발 백인 여성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 끝없는 계단을 내려와야 하고, 긴 복도로 여러 집이 줄지어 있고, CCTV가 달린 엘리베이터가 있는 우리네 아파트라서 더 깊이 몰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문 앞에 놓여있는 봉지마저도.
과거, 8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인의 주 주거 형태는 아파트가 아니었다. 개인 주택, 아니면 다가구 주택.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반찬 심부름이 매일의 일상이고, 집에 부모님이 안 계실 때 자연스럽게 옆집 문을 두드리던 때. 하지만 아파트의 등장 이후, 이 틀에 박히고 균일화된, 전국 어느 도시를 가도 전혀 색다를 바가 없는 성냥갑 같은 길쭉한 건물들이 우리 삶에 들어오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도 차즘 변하게 된다.
아파트는 우리에게 생활의 편의와 개인의 자유를 제공한다. 농경사회에서 농사짓는 일부터 지붕을 올리는 일까지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갔던 공동체 문화 중심의 과거와 달리, 우리 말고 남이 특히 나의 '집'이라는 공간 안에 침범할 일은 거의 없다. 아파트 관리는 관리인이, 고장 난 물품은 AS센터가, 김치와 반찬은 반찬가게에 밀어 두고, 아이 케어는 돌봄 선생님께. 이렇게 살다 보니, 내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시대가 왔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몰려 살고 있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 가장 외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보여주는 측면이다. 그리고 영화 '목격자'는 그런 우리의 사회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나는 아파트가 아닌 주택에 살고 있다. 만 19년째 한 곳에서, 같은 사람들과 쭉 살아가고 있다. 앞집 할머니와는 19년째, 옆집 이모와는 8년째 '이웃사촌'으로 서로 돕고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앞집 강화 아주머니와 슈퍼 이모는 20년 넘게, 언덕 위 할머니는 25년 넘게 이 자리 이 곳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동네 사람들은 저 집에 아들이 몇 있는지, 결혼한 딸내미 손주가 몇 살이 됐는지, 심지어는 어느 집에 숟가락 개수까지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다. 이런 우리 동네에도 차츰 외지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국인 인구수도 눈에 띄게 늘었고, 아침에 출근할 때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람들의 수가 점차 늘고 있다. 과거, 대문을 열어 놓고 자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던 도둑 없는 안전한 마을이었는데, 그들이 위험한 것이 아님에도, 교류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상대에 대한 무지는 묘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인지 살려달라고 울부짖어도 어느 누구 하나 내다보는 이 없는 영화 속의 우리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엄마, 내가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면 누구 하난 내다볼까?'하는 질문에 '그럼! 감히 누가 우리 소현이 건드리는 거냐고 뛰쳐나올걸?' 하던 엄마. 여기서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문다. 우리 동네에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지면? 골목골목 어두운 이 동네에서 과연 나를 위해 소리라도 쳐 줄까?
어쩌면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살고 있지만, 모두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