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과 실업난을 이겨내는 청춘들에게
학위 논문 예심이 얼마 남지 않아 자료 준비로 며칠 밤을 새우고 맞는 주말, 이대로 또 컴퓨터 앞에 앉으면 뇌가 터질 것만 같아서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보고 싶은 영화는 많았지만, 모든 걸 다 재치고 바로 이 것, '국가부도의 날' 선택. 실패한 역사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드럽고 잔잔한 영화보다야 이런 시사점이 있는 영화를 더 좋아하는 편이라 이것저것 먹을거리도 구매하고 신나는 (?) 마음으로 영화관으로 향했어요.
필자는 IMF를 직격탄으로 맡은 세대가 아닌, 그 세대를 부모로 두고 있는 2010년대 청춘의 한 사람으로, 그 날의 실패한 역사를 이 영화에서 어떻게 담아내고 있을까, 많이 기대하고 기대했습니다.
이렇게 바리바리 사들고 입장할 때까지만 해도, 영화보다 화나서 먹는 걸 잊을 정도로 분노가 폭발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가장들이 회사에서 내쫓기고, 자살률이 40프로를 넘겼다는 암흑 같은 그 시절. 불과 20여 년 전이건만,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내가 97년의 그 날에 대해 아는 것은 바로 사회시간에 배웠던 '금 모으기 운동' 뿐이었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비정규직이 판을 치게 된, 그것으로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청춘들까지도 고통받고 있는 그 일이 97년, 아니 그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개탄스럽기도 합니다.
금 모으기 운동은 필자처럼 90년대 생이라면 으레 간접적으로든 들어봤을 법한 내용입니다. 글쓴이의 경우, 사진 앨범을 둘러보다가 양 손, 아니 열 손가락이 모자라 발가락에도 끼워져 있는 금반지를 보면서 어머니께 도대체 저 많은 금반지는 다 어디 갔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너 목걸이 하나만 빼고, 집에 있는 금은 다 모아다가 냈지" 하셨었죠. 이에 대해 영화를 본 후의 제 생각을 묻는다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영화를 한 번 보고 오는 게, 지금 제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영화에는 크게 네 부류가 등장합니다. 나라와 국민을 지키려는 한시현 팀(김혜수 분), 곧 죽어도 대기업은 소듕하지만 소시민은 나 몰라라 재정국 차관 라인(조우진 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윤정학과 아이들(유아인 분), 그리고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 소시민 한갑수(허준호 분).
한시현 '팀'은 한국은행 통화정책팀 팀장과 팀원들로, 다른 일에 정신 팔려 열흘도 전부터 수 차례 올린 보고서도 보지 보지 못한 '윗사람'은 못 보는 당시 한국 경제의 거품과 위기를 제대로 읽어 낸 인물입니다. 당장 위기를 대중들에게 공개하고, 소시민들의 피해를 줄여주고자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싸움에서 지고 만 정의로운 인물이죠
연기 구멍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이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그랬지만, 특히 한시현 팀의 모두는 제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좋았습니다. 뚫지 못할 벽이라는 걸 어쩌면 알고 있었음에도, 국가의 녹을 먹는 한국은행의 직원으로서,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감과 신념을 가지고 열정으로 임했던 사람들이죠. 잠도, 퇴근도 포기하고 매달립니다.
두 번째, 하버드 동문님을 참 좋아하시는 재정부 차관 라인입니다. '라인'이라고 칭한 이유는, 이 인물이 대기업 참 좋아하고, 동문 참 좋아하고, 기회 참 좋아하는 인물이라 그렇습니다. 통화정책팀을 '은행원'들이라고 칭하고, 여자인 한시현 팀장에게 돈 세고 계산기나 두드려야 할 여자가 감성적으로 정책에 관여하려고 한다며 극 초반부터 끝까지 고압적이고 일관적으로 성차별적인 인물입니다. 한시현 팀장이 하는 일마다 상극의 입장을 가지는 인물로 이 인물의 모태가 된 인물은 97년 김영삼 정부에서 재정부 차관이었다가 이명박 정부에서는 장관을, 그러다가 대우조선해양 투자 압력 행사로 징역살이를 하고 있는 강만수가 꼽히고 있더라고요.
세 번째는 소시민이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거나, 돈이 많아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엄청난 부를 쌓는 기회주의자들입니다. '윤종학과 아이들'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모든 것들이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진 윤종학'의 머리와 '돈이 있는 두 사람'의 돈이 합쳐지면서 매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죠.
이들도 윗분들의 농간에 피해를 볼 수 있는 소시민이지만, 돈이 많은 소시민이거나, 정부의 농간에 속지 않는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자입니다. IMF 당시 피해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죠.
영화를 다 본 후에 만약 윤정학이라는 인물이 한시현팀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화를 보기 전에 다음의 포스터를 봤기 때문인데, 무슨 이유에 선지 저 네 명이 나라를 구하려고 난리를 치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지만...ㅎㅎ
하지만 윤정학이라는 시대를 읽을 줄 아는 인물이 한시현 팀에 있었어도, 역사는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윗사람들에 의해서 막히고, 내쫓기고,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에 놓였을 테니까요.
그리고 마지막,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면 모두가 잘 살게 될 거라 믿었던 중소기업 사장 한갑수입니다. 우리네 아버지와 많이 닮은 인물로, 그저 직원들 챙기고 일만 할 줄 알았던 소시민 갑수의 얼굴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면... 그냥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영화가 흘러가는 과정에서 IMF 없었어도 우리나라는 언젠가 큰 혼란을 겪었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대출받는 과정이며 절차가 복잡하고 수익성을 비롯한 많은 것을 따지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수익성이 있든 없는 은행에서는 본 은행이 보유한 재산보다도 더 많은 금액을 내어주고, 사업은 현금이 아닌 어음으로 돌아가죠.
하지만 우린 IMF 상황에서 우리가 금융 구제를 받는 게 아니라, 자체적으로, 자력으로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또한 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국민들에게는 국가가 부도나기 며칠 전까지 괜찮다 괜찮다 거짓말을 하고 밀실에서 모든 걸 일사천리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알 권리가 보장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소시민들을 위해서 정부는 힘써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속지 않겠다
윤정학은 말합니다. 절대로 속지 않겠다고. 속인 것 같겠지만 속지 않겠다고. 속지 말아야 함을 알아야 하는데, 이 영화를 보고 있는 2018년에 20대를 보내고 있는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역사는 반복되고, 실수 또한 반복되죠. 준비하지 않으면 대비할 수 없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위기에 처하고, 그저 보이는 것만을 믿고, 삶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위기에서 손 한번 뻗어보지 못하고 휩쓸려버릴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