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요를 통해 세계를 만날 수는 없나요?
2021년 9월 현재. 내가 경기민요에 입문한지도 어느덧 20년 하고도 반년이 뚝딱 지났다. 그동안 강산은 두 번 정도 바뀌었고, 새천년을 살아갈 새나라의 어린이는 10대 소녀가 되고, 20대 청년이 됐다. 스마트폰이 카세트테이프와 MP3를 대신에 제 역할을 하게 된 시간 동안 나는 중국과 미국, 스페인을 거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20년 동안 어느 때는 경영학도가, 어느 때는 커뮤니케이터가 되었다. 선생님도 해보고, 회사원도 해 보고, 대학원생도 벌써 두 번이나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부캐 곁에는 부동의 본캐, '경기민요'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경기민요 소리꾼 클라라입니다 :)
그럼 미국에서 국악을 배운 건가요???
혹자는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하지도 않은 내가 무슨 국악인이냐고 비아냥대기도 하고, 혹자는 좋은 머리로 유학까지 다녀왔으니 이제 네 갈 길을 찾아가라고들 말하지만, 애초에 나를 해외로 이끈 것은 지극히 한국적이고 고전적인 '국악'이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만한 순간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동경하던 사람을 만났을 때나, 시험에 통과해 간절히 바라던 무엇이 되었을 때 일수도 있다. 간절한 휴식을 찾아 떠난 여행지에서 만난 무엇이 될 수도 있고, 바닥으로 떨어져 낙심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밀어준 손처럼 극적인 순간일 수도 있다. 내 짧은 인생에도 여러 번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다. 그중 최고를 고르라면 난 자신 있게 첫 해외 공연을 위해 비행기를 탔던 2004년 10월의 첫 날을 꼽을 것이다.
사실 8일 동안 두 번의 공연과 한 번의 국가 간 이동을 해야 했던 그 연주 여정은 고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악기와 메이크업 가방, 그리고 크나큰 악기 가방들 때문에 입국 수속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출국 당일 현지에서 공연을 해야 했기 때문에 짐을 풀지도 못한 채 바로 분장을 해야 했다. 지금에야 영어를 할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고작 Hi, how are you? 와 기본 의사소통이 전부였고,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선 현지 코디네이터 선생님을 통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내게 남은 것은 필리핀 대학생들과 아리랑을 부르던 것, 베트남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꽃다발과 박수갈채를 받았던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통해 세계를 마주했던 일, 바로 그 순간이다.
나는 그 후에도 여러 번 해외 공연을 갔다. 이듬해에는 중국 연길과 북경으로, 2006년에는 중국 제남으로, 2008년에는 일본 오사카로. '문화교류'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서로의 음악을 듣고, 들려주고, 배우는 일은 참 신나는 일이었다. 유학을 하는 중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한복을 입었다. 미국 한가운데 콜롬비아에서도,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도 아리랑을 부르고, 얼씨구를 외쳤다. 내가 한국인이기에 할 수 있는 일. 민요를 통해 세상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신나고 짜릿했다.
"우와, 그게 한국 노래예요? 무슨 뜻이에요?"
2015년 유월의 화창한 초여름 햇볕 아래, 신기한 듯 나와 가야금 언니가 하는 양을 바라보던 한 외국인 소녀가 물었다. 2004년을 시작으로 자그마치 13년 동안 해외 각지에서 노래를 불렀음에도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마치 누구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이었다. 차분히 그날의 공연을 되돌아보았다. 곡 정보 설명은커녕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도 중국이니 일본이니 할 것만 같은 외국인 진행자가 있었고 (거의 순서만 읊는 정도였다), 공연은 가사나 설명을 띄워 줄 스크린은커녕, 마이크가 나오는 게 다행인 야외에서 이뤄졌다. 열렬한 호응이 터져 나왔던 부분은 가야금 연주에 맞춰서 비틀스의 'Let it be'를 불렀을 때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래'여서 였다. 한국 전통음악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너무 불친절한 공연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도 오페라나 오리지널 뮤지컬을 원어로 듣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각국에서 현지 언어로 현지 배우들과 공연이 구성되려면 전 세계적인 인기라는 탄탄한 기반이 있어야 한다. 본토인 한국에서마저 재미없고, 지루하고, 오래된 데다 한 물 갔다는 민요는 오리지널 뮤지컬과 비교할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한국어와 영어는 발음이 다르므로 번역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감정과 감성, 그리고 깊이가 그대로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민요를 영어로 바꾸려는 이유는 1시간 여의 긴 공연에서 '마지막 한 곡'이나마 외국인 관객들에게 친절하고 싶어서다.
몇 년 전, 외국인 관객들을 위해서 민요를 번역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내게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건 미친 짓'이자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사철가를 영어로 부르고, 한국 학생들을 위해 영어로 민요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몇 년 사이에 '미친 짓'과 '쓸데없는 짓'은 '세계화'의 트렌드에 맞춰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어릴 때 노래 조금 한지 몰라도 이제는 꼬부랑 말하니까 이번 생에는 영어만 하고 다음 생에 노래하라는 말을 들을 바에야, 경기민요 하는 사람 중에 영어 제일 잘하는 내가 제일 먼저 뛰어들어봐야 되겠다.
내게 진짜베기 베트남 쌀국수는 왕창 들어간 고수 때문에 비누 맛이 나고, 필리핀의 수도 이름이 마닐라인 것은 연꽃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을, 동남아의 도로는 차보다 오토바이가 더 많다는 것을, 그리고 한국은 이 크나큰 지구에 작디작은 나라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은 여행도, 유학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지극히 한국적이고, 지루하고, 한물갔다 말하는 국악이었다. <영어로 부르는 경기민요>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