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2학기, 중국 생활의 끝을 향하여

서러운 월세 살이

by 환한

2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가장 먼저 한 것은 역시나 '또' 이사를 가는 것이었다. 벌써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듯 머물었던 유학 사기꾼(이 궁금하다면 이전의 포스트로) 지인의 집과 대련 의과대학 기숙사, 양광 아파트와 완허를 거쳐 다섯 번째 이동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애매한 시기에 이사를 한 덕에 잘 곳 걱정 없이 집을 알아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같이 살았던 룸메는 앞으로도 1년이 남아 집을 알아보는데 어려움이 덜했지만, 나의 경우 반년(실제로는 4개월) 밖에 남지 않아서 난감했다. 루미 언니와 친했던 중국 친구의 도움으로 양광 아파트 살짝 옆에 있는 신축 원룸을 보러 갈 수 있었다. 아직 공사가 안 끝났나 싶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던 9층 건물. 언제 한 번은 전기가 끊겨 1층에서부터 9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던 원룸이었다.


위기 1. 위조지폐


같은 건물에 여러 원룸을 가지고 있던 젊은 집주인 부부를 만나 원룸 하나씩 두 개의 집을 계약했다. 채광이 좋은 원룸 하나, 채광이 좋지 않은 원룸 하나, 이렇게 두 개였는데, 해를 좋아하던 루미 언니가 햇빛이 들어오는 집으로, 해를 영 좋아하지 않는 나는 해가 들지 않는 집으로 가기로 했다.


집을 찾은 것은 좋았는데, 뜻밖의 어려움이 닥쳤다. 갑자기 집주인을 통해 '내가 지불한 돈이 은행을 통한 진짜 지폐라는 걸 증명하라'는 연락을 온 탓이었다.


전말은 이랬다. 지금은 큐알 코드니 위챗 송금이니 모바일 송금이 상용화되어있(다)는 중국이지만, 내가 중국에서 살았던 2010년대 초만 해도 모든 거래는 현금을 이용해서 이루어졌다. 나의 한 달 생활비는 약 25만 원. 약 1,200위안에서 1,300위안의 많지 않은 돈이라 중산 광장에 있던 시티은행 ATM을 통해 학비를 인출할 때 함께 받거나, 아무튼 현금을 인출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계좌 이체할 수 있는 중국 계좌가 있지도 않았던 상황. 그래서 4개월치의 월세를 지불하기 위해 한국에서 환전 후 그야말로 '돈다발'을 들고 갔었는데, 집주인에게 내가 건넨 돈 중에 백 위안 한 장이 '위조지폐'였다는 웃지 못할 스토리였다.


중국은 시장 내에 유통되는 위조지폐가 워낙 많아 (환전할 땐 꼭 큰돈, 작은 돈 섞기!!) 백 위안이나 오십 위안은 잘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는데, 은행에 위조지폐를 가져다주면 조사를 해준다던가, 보상을 해준다던가 하는 것 없이 그냥 폐기를 한다고 한다 (물론 카더라인지 진짜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난데없이 백 위안 한 장을 못쓰게 된 집주인이 중국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물어댄(이라고 쓰고 쏘아 댄이라고 읽는다)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가져간 지폐는 평소대로 농협을 통한 게 아니라 엄마에게 250만 원을 빌려간 지인이 본인이 아는 사설 환전소에서 중국 돈으로 환전한 뒤 준 돈이었고, (사설 환전소가 문제라는 말이 아니라) 내게 영수증과 같은 증빙 자료가 없어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저걸 어떻게 증빙해야 하나, 애써 이사 갈 곳을 찾았고, 돈도 다 넘어간 상황인데 못 가게 하려나 하고 고민이 깊어질 즈음 걸려온 '다 괜찮다'는 전화.


어떻게 된 건가 하니, 집을 계약할 때, 1층 출입문 키를 만들기 위해 50위안을 추가로 내야 했고, 네가 내니, 내가 내니, 나중에 내니, 어떻게 하니 하다가 내 돈뭉치에서 루미 언니 것 까지 카드 2개 100위안을 먼저 지불하고, 소액 지폐가 필요했던 남편 집주인이 본인 지갑에 있던 100위안을 빼내 돈뭉치에 섞은 뒤 나와 룸메가 건넨 10, 20, 50위안 지폐를 본인 지갑에 넣으면서 돈이 섞였고... 이를 잊고 있다가 기억해 낸 남편 집주인 분이 '그게 내 돈이었구나' 하면서 일이 처리되게 된 것이었다.


위기 2. 보증금 반환 문제


이사 갈 집이 확정이 되었으니 이제 할 일은 원래 살던 집의 집주인에게 이를 말하고 보증금을 환급받는 일이었다. 평소, 뜬금없이 문을 따고 들어오거나 (세상에 왜 안 열리지? 하면서 미친 듯이 키를 돌려대던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온수기가 고장 났을 때 본인은 고쳐줄 필요가 전혀 없으므로 (우리나라로 따지면 보일러가 고장 난 거랑 같은 상황인 것 같은데...!) 우리가 지불하라고 했던 그녀이므로 썩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번엔 마주해야 했다.


집을 구한 것이 이제는 나가고 없는 예전 룸메였으므로, 별다른 정보 없이 이사를 들어왔던 지난날을 후회하게 된 건, 집주인이 동네에서 유명한 '유학생 등 처먹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였다. 알고 보니,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거나, 더 뜯어내는 일이 비일비재한 사람이라는 말에 보증금을 달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Clara_Cho_China 1482.jpg 1년 동안 전혀 따뜻하진 않지만 포근한 보금자리가 되어준 나의 완하 아파트.


결론부터 말하자면, 1개월치 월세였던 3천 위안의 보증금 중에 우리가 돌려받은 것은 1850위안. 이제까지 이 집주인의 집에 살았던 유학생들 중 최고 금액이었고, 최초였다. 온갖 좋은 타이틀을 다 갖다 붙여도 부족하지 않을 쾌거였다.


루미 언니가 향초를 피우다 태우는 바람에 더 좋은 것으로 바꿔 놓은 커튼(더 좋은 걸로 바꿔 두었는데 왜 더 비싸졌는지는 모르겠지만)부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저 걷어내기만 하면 되는 촛농, 그리고 언제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낡았던 전자레인지가 고장 난 것도 아니고 그저 1년 동안 좀 더 낡았을 뿐인데 그런 걸로 감가상각을 하던 집주인의 어이없는 '깎기 시도'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주방을 보고는 그 증상이 더 심화되었다.


어느 평범한 날 아침, 양광 아파트부터 멀쩡히 쓰던 전기밥솥이 내 눈앞에서 펑! 하고 합선으로 인해 그야말로 '터진' 후 밥솥이 있던 쪽의 주방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상황이었는데, 분명히 '전기와 같은 집 구조적인 부분의 고장은 집주인 본인이 고치겠다'던 약속과 다르게 얼마를 받아낼 수 있을까 머리가 빙빙 돌아가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집주인의 돈 뜯어내기 시도는 어이없게도 우리가 우리끼리 마주하기 어렵다며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했던 룸메이트의 남자 친구가 하릴없이 집을 슬렁슬렁 돌아다니다가 내려가 있는 두꺼비집을 올려준 덕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는데, 우리 몰래 다시 두꺼비집을 내리려던 걸 몇 번이나 제지한 덕분에 1850위안이라는 거금을 역사상 최초(?)로 받게 된 것이었다.


18살 소녀가 최초로 마주한 차가운 세상의 현실이자 집 없는 삶은 서럽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보증금을 뺀 이후로 남은 것은 바로 이삿짐을 옮기는 일. 작디작은 트럭을 가진 용달 기사님은 루미 언니와 내 짐을 실으며 어지간한 4인 가족의 짐보다도 훨씬 많다면서 연신 고개를 저어댔었다. 같은 건물 같은 층으로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짐을 빼는 것은 쉬웠지만, 가장 어려웠던 건 1년 반 동안 공유해왔던 그릇과 냄비 같은 생활집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따로 살긴 해도 결국은 같은 학교에서 같은 수업을 들으며 같이 저녁을 먹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살림살이를 나눈다는 건 당연하게 주방에만 가면 있었던 게 없어지고, 빌려야 되고, 번거로워진다는 걸 의미했다. 결국 외식만 하면 알레르기가 올라와 집에서 밥을 곧잘 해 먹던 내게 큰 솥과 냄비 몇 개가 넘어왔고, 넉넉하게 여러 개 있던 컵과 그릇, 수저는 정확하게 반씩 나눠 가졌다. 새로 사야 했던 것도 있었는데, 주로 둘이 같이 사용했던 빨래 걸이 같은 것들이었다.


CAM00701.jpeg 이제 겨우 이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사진은 완전 귀국 짐을 싸던 때인 아이러니


원래 살던 집들과 달리 새로 지은 집이라던 이곳은 한국의 바닥난방, 보일러처럼 따뜻한 바닥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항상 춥기만 했던 중국에서의 세 번째 겨울은 참 따뜻했다. 항상 신고 있던 실내화도 벗어던졌다. 신발을 벗어 놓는 현관과 집의 경계가 모호하던 중국의 아파트들이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아주 치열하게 바닥청소를 했다. 닦고, 닦고, 또 닦아서 맨발로 걸어도 발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했다. (루미 언니도 같은 생각을 했던지, 언니 집도 그렇게 되어 있었다. 찌찌뽕이다.)


CAM00698.jpeg 생일 선물로 받았던 나무는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던 이 집에서도 잘 자라주었다.

유학 생활을 하면서 유일하게 홀로 살았던 이 집에서 나는 편입 신청을 했고, 합격을 했다. 내 공간에 대한 중요성도 배웠다. 청소도 스스로 해야 하고, 음식물 쓰레기도 내가 버려야 하고, (잘 없었지만) 벌레도 직접 잡아야 했지만, 내 주방에서 내 마음대로 요리를 해 먹고, 내가 원할 때 화장실을 쓸 수 있는 생활은 가족이나,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생활공간의 일정 부분을 내어 주고 사는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이사였고, 어쩌면 시작보다도 더 중요한 마무리를 지어야 했던 2학년 2학기. 오래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이 집에 살았던 때가 종종 생각난다. 전기와 수도가 끊긴다고 해서 미리 만들어뒀던 김치볶음밥과 기숙사를 통해 학교에 가던 아침, 문을 열어 놓은 것을 모르고 노래를 불러대서 같은 층에 살던 오빠가 ㅋㅋㅋ 웃으며 알려주러 온 일. 기숙사 앞에서 샹차이 없는 렁미엔과 마라촬을 사 먹던 일. 집 옆에 공원에서 놀았던 일, 노트북 와이파이가 고장 나서 다행히 큰 화면을 가지고 있던 옵티머스 뷰로 과제를 끝냈던 일까지 모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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