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도, 추위도 잘 타는 나는 늘 선선한 가을을 좋아했다. 그런데 5년 전부터 초여름이라는 계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초여름만의 독특한 팔레트를 사랑하게 되었다.
5월 초부터 중순까지. 내가 좋아하는 초여름은 이때다. 온도는 초가을과 비슷하지만 습도 80%의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이라, 초가을 못지않게 쾌적하다.
매해 봄, 거리마다 피어나는 매화와 벚꽃, 목련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다. 꽃이 진 거리에는 잠시 화사함이 사라지고 여백이 생긴다.
그 자리를 연두빛 잎들이 빠르게 채워간다. 꽃잎 틈에 숨어 있던 잎사귀들이 점점 풍성해지며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풍경을 보면, 어린 생명체의 성장을 지켜보는 듯한 기특함이 인다. 꽃과 함께 세상에 나왔지만 더 주목받는 친구에 가려졌던 이파리들. 그러나 때가 오면 거리 전체를 덮을 만큼 번성한다. 꽃눈이 맺히고, 봉오리를 지나 한 송이 꽃이 피어나는 것만큼이나 아름다운 장면이다.
성장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사람이든 식물이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맘때가 되면 자전거를 타고 서울식물원을 자주 찾는다. 대로변 자전거도로를 달리다 사람을 피해 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세 주변이 고요해진다. 잘 정비된 자전거도로와 함께 멋진 건축물이 하나둘 나타난다. 코오롱 원앤온리타워, LG아트센터. 차분하고 단정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거리다.
봄볕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엔 딸을 내보낸다는 말이 있다. 초여름 역시 봄 다음에 오는 시기라, 해가 가장 높은 오후 12시에서 3시 사이 건물 외벽은 햇빛을 머금고 원래보다 더 풍부한 색으로 빛난다. 이게 건축가가 의도한 색이 아닐까 싶어, 자전거를 멈추고 셔터를 누른다. 내가 본 색에 가장 가까운 톤으로 사진을 보정하며 초여름을 기록한다. 코오롱타워의 외벽엔 날개 모양 구조물이 덧대어져 있다. 빛을 받으면 색과 그림자가 함께 춤춘다.
봄날, 시어머니 등쌀에 떠밀려 밭을 매던 며느리가 잠시 허리를 펴고 정자나 개천 근처 돌 위에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억울한 마음이 조금은 풀렸기를.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해가 늦게 지는 초여름 저녁. 식물원 근처 카페에 있다가 노을 질 무렵 집으로 향한다. 발산역까지 이어지는 길엔 퇴근 후 회식을 나온 사람들을 위해 파란 플라스틱 원탁과 빨간 간이 의자가 놓여 있다. 그 틈 사이로 여름을 알리는 특유의 싱그러운 내음이 흐른다.
초여름은 그만의 낭만을 품고 있다. 보름쯤 지나면 후끈한 여름 바람이 거리를 채우겠지. 짧게 주어지는 이 시기를 오래, 찬란하게 기억하고 싶다. 생활 반경이 학교와 집으로 좁혀졌지만, 이맘때면 어김없이 작은 일탈을 감행하게 되는 이유다.
이번 초여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