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두 살 생일을 맞이하여
이번 생일도 별로 신이 나진 않았다.
무언가 한가지라도 이룬 느낌이 있어야 신이 나지.
사실 야심차게 여행갈 계획은 세우고 있었는데, 여행은 커녕 논문 인터뷰에 치여서 생일이고 나발이고 정신이 하나도 없이 지나갔다.
안 그래도 생리까지 겹쳐서 컨디션은 저조하고, 바쁘다고 미리 생일 축하 모임을 가져서 처음으로 생일 당일날 혼자 보냈고, 생일 초도 처음으로 안 불어본 생일이었다.
그것까지도 그러려니 했는데,
나와 제일 친했던 친구가, 그래도 나를 이 곳에서 버티게 해주었던 사람이,
내 생일날 영영 남미로 떠났고(이제 언제 볼지 모른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믿는 동앗줄로 붙잡고 있던 마지막 인턴십마저,
정확히 나의 생일에 탈락 메일을 보냈다.
이전에도 별로 운이 좋지 않은 생일은 보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당일에 모든 일들이 일어나진 않았다고!
인턴십에 탈락한 건 참으로 울적했다.
솔직히 최종합격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인터뷰라도 좀 보게 해줘 연습이라도 하게. 왜 인터뷰조차 기회를 주지 않는거지?
서류 통과도 안된 건 물론 지금까지 수십건이고,
서류 통과했는데 또! 인적성에서 탈락하면서 나의 과거의 악몽들이 떠올랐다.
인적성은 무조건 걸리는 나.
나의 능력이나 경력이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여기저기 돌아봐도 내가 원하는 잡의 포지션은 흔치 않다 하고,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잡은 내가 원하지 않는 포지션이다.
결국 여기서 타협해야 하나?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정착'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공식적으로 사주에 역마살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섣불리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이것저것 경험해보지도 않고 덥석 결정해버리고 싶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만나보지 않고 평생 같이 할 한 사람을 결정할 수 없었고,
여러 나라를 다녀보지 않고 평생 살고 싶은 나라를 결정할 수 없었고,
이것 저것 해보지 않고 평생 할 만한 일을 결정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신기했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그냥 결정해버릴 수 있는거지?
나에게 있어 어느정도 안정된 삶 이나 정착을 상징하는 닻은 세가지가 있다.
내가 살 집, 나와 함께 할 가족, 그리고 나의 커리어.
나는 지금까지 이 세가지 닻 중에 하나라도 내릴 곳을 찾아 다녔다.
이제 나도 서른이 넘었고, 어딘가에 닻을 내리고, 뿌리를 박아 나름대로 나무로 성장하고 싶은데,
세가지 다 쉽지 않다.
내가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는 짝꿍을 만나야 하는데,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니까 우선 미루고
집을 사기 위해서는 어딜 가든 돈이 필요한데 돈이 없으니까 그것도 우선 미뤘다.
가장 먼저 내가 확실히 성장할 수 있는 커리어와 일을 찾아 시작하면
그 일에 맞춰 거주지도 정하고, 거기 살면서 짝꿍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커리어를 시작하기 위해 내가 원하던 공부를 시작했는데
정작 나의 커리어는 과연 어디서 어떻게 시작될 것인가.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걸까?
대강 집 사는것에나 초점을 맞춰서 아무 일이나 해서 돈 을 모으고,
나이가 들기 전에 빨리 결혼 하는 것에나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집도, 가족도 있을텐데
뭐한다고 '일' 에 욕심을 부렸는가.
내가 '일'에 욕심을 부렸던 이유는 아마 '자아실현'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떠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지 단순히 결혼한 사람/엄마/아내 혹은 '집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자아실현과 나의 '일'을 연관지어 생각하면, 과연 지금 내가 추구하는 커리어가 정말로 나의 자아실현에 도움이 되는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원하는 '커리어'라는 것도 결국 막연히 어떠한 '조직'에 들어가서 특정 분야의 업무를 하는 것인데,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좀 더 '쉬운 길'을 찾는 것일 뿐이다.
내가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건 너무나 골치아픈 일이니까.
그냥 만들어져 있는 것에 들어가서 거기서 열심히 일하고 월급이나 받고 싶다고.ㅎㅎㅎ
물론 이건 현재 일 안하는 사람의 생각이고
정작 조직에 들어가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갈려 나간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분명 몇년 있다가 돈 조금 모으고 나의 퇴직을 준비하기 시작할 것이다.
회사 안다녀도 살 수 있는 삶, 프리랜서나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꿈꾸며.
아마도 이런 성향이 이미 인적성검사에서 보이니까 나를 안뽑는 거겠지.
한편으로는 나를 안 뽑는게 당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미 회사같은 조직에서 원하는 어느정도 틀에 맞춰진 사람에서 한참 벗어난 사람이다.
회사에서는 동그라미를 원하는데, 어디 괴상한 모양을 가진 사람이 와서는 왜 내가 여기 안맞냐고 소리지르고 있으면 답답할 노릇이지.
심지어 그 괴상한 모양 - 나 자신ㅋㅋㅋ - 을 만들기 위해 나는 일부러 회사라는 틀에서 튀어나왔는데
이제 와서 다시 그 괴상한 모양을 가지고 회사에 들어가려고 하는게 웃긴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도 괴상한 모양을 찾는 회사가 있지 않을까 조금 기대했다. 하지만 어디든 어떤 회사든 거대조직은 보수적이고 어느정도 획일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같은 괴상한 모양은 그들에게는 너무 급진적이라고!!
어쩌면 상대방은 나를 보면서, '아니 저 사람은 충분히 회사에 들어오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을 사람 같은데, 왜 굳이 여기 들어오려 하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못나서 나를 뽑지 않는게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서 훨씬 더 큰 가능성이 보여서. 현재 그 가능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아무데도 닻을 내리지 못하고 돌아다니는게 이제 지치고 피곤해서
그냥 쉽게 얼른 닻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한계까지 깨야 하나보다.
나는 결국 '회사'에 들어가서 '월급'받으면서 돈 모으면서 살 거라는 나의 한계.
내가 아무리 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외쳐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으면
그냥 내가 직접 해서 보여주는 수 밖에.
나의 인생은 나밖에 살아온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내 다음 길을 알려줄 사람이 없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야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닻을 내리든 돛을 올리든,
서른 셋이 될때까지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