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초등학교 때다.
나는 그날도 방안에 앉아서 망할놈의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었는데,
작은 창으로 보이는 하늘이 너무도 푸르렀다.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과 날아다니는 새가 오히려 내가 있는 이 곳을 감옥으로 느껴지게 만들었었다. 그 당시 부모님과 선생님의 의도는 방에 가두면 빨리 집중해서 문제집을 풀고 나오는 것이었겠지만, 수학보다 문학에 더 가까웠던 나는 안 풀리는 문제집 앞에서 한숨만 들이쉬고 내쉬면서
오히려 아무 방해 없이 새가 되어 저 하늘로 날아가는 상상만 잔뜩 했더랬다.
하루종일 앉아있는 교실에서도 눈부신 창 밖의 세상은 언젠가 이 학교를 졸업하면, 누릴 수 있는 멋진 세상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언제나 창 안에서 창문 밖의 세상을 꿈꿨다.
성인이 되면서 드디어 '창문 밖'의 세상을 즐긴다는 마음에 들떴지만,
이제는 아무도 나를 가둘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두근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가 자발적으로 창 안으로 들어갔다.
시험공부를 해야 하니까, 취업준비를 해야 하니까.
도서관 창 밖으로 보이는 내리쬐는 햇살과 흩날리는 벚꽃.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깨달았다.
여전히 나는 사무실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운 좋게도 나는 고층 빌딩 오피스에서 일할 기회들이 있었다.
세상이 발 밑에 있는 뷰, 반짝이는 한강이 보이는 뷰.
하지만 여전히, 그 세상은 나에게 창 밖이었다.
그렇게 크고 밝은 통창 앞에서도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창 밖만 보면서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때문에.
회사와는 달리, 내가 그때까지 살았던 집들은 모두 아파트나 원룸이었고, 대부분 창 밖의 뷰는 형편없었다.
더구나 내 힘으로 수도권에서 구할수 있는 창문은 바로 앞이 벽으로 막힌 창문이거나 지하/반지하였다. 나는 나에게 어울리는 수준의 창문은, 그 정도인줄 알고 그냥 만족했었다.
여기서 뛰쳐나가면 아예 창문은 커녕 몸 누일 곳도 없는 홈리스가 될까봐 차마 두려워서 그 창문 너머로 나가기가 두려웠었다.
창문이 없다는 건, 나를 지켜줄 벽이 없다는 말이니까.
벽 안쪽에서 창문만 넘겨다보며 살든지, 아니면 벽도 없고 창문도 없는 곳으로 나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여기서 답답해하면서 죽든 나가서 바람 맞고 죽든,
죽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까지 하고 나서야 나는 용기를 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드디어 내가 상상만 하던 창문 밖 세상으로 나와서,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창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국립공원의 폭포를 보며 잠들 수 있는 창문이 있다니. 큰 창틀에 앉아 덜컹이며 지나가는 야간 열차를 보며 하루를 정리할 수 있는 창문이 있다니. 빨간머리 앤처럼 머리위로 여는 경사진 창문이 있다니. 나도 이렇게 정원이 보이는, 크고 아름다운 창문을 가질 수 있다니..!
십년 전의 나는 상상도 못하던 곳들에, 나는 살았고, 머물렀고, 떠났다.
나에게 언제나 '갇혀있음'을 상징하던 창문은 이제,
나를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창이 되었다.
내가 감히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던
눈부신 아침 햇볕이 가득 들어오는 나무 창문을 활짝 활짝 열면서,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드네.
바깥의 공기와 소리를 방 안에 채우면서
나는 이렇게 세상속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커다란 잠재력을 우리 속에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너무 인생을 진지하고, 심각하고, 한 가지에 얽매여서만 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들, 창문 안에서 바깥만 바라보고 한숨쉬면서 사는게 당연하다길래
원래 다들 그렇게 사는 건 줄만 알았다.
근데 굳이 나의 집에, 다른 사람과 같은 창문을 넣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집도 창문도 사람마다 다르니까.
오늘처럼 오랫만에 날씨가 좋은 평일.
광합성을 하러 야외 까페 테라스에 앉아 일하러 가볼까.
행복하다.
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