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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Jul 13. 2022

살림은, 부수적인 것이라 생각했었다

어딜가서 뭘하든, 당신은 살림을 해야 한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파머스 마켓에 간다. 매 주 오전 일찍부터 오후 4시 정도까지 열리는 파머스 마켓에서는 과일, 채소, 고기, 각종 유제품 등을 직접 생산해서 판매하는 사람들이 장을 펼친다. 처음에는 가격이 저렴해서 놀랐는데,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품들은 슈퍼마켓 등으로 넘어가지 못한 2급 제품들이거나 유통기한이 너무 짧게 남은, 예를 들어 너무 익은 과일 등이다.



나야 일인분만 구입하니 많이 살 필요도, 오래 저장이 필요한 것을 살 필요도 없고, 굳이 예쁜 것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 파머스 마켓을 애용한다. 새벽부터 매 주같이 나오는 익숙한 얼굴들을 보는 것이 내심 반갑기도 하고, 온갖 종류의 치즈나 디핑소스 등 갖가지 것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특히나 날씨가 좋을 때는 장을 보는 겸, 산책 겸 해서 나와서 오븐구이 치킨이나 키블링(생선튀김), 감자 후라이(?) 등으로 간식도 사먹는다. 갓 튀겨낸 튀김이나 갓 구운 달콤한 스트롭 와플은 토요일 기분을 한껏 업 시켜주기 충분하다. 그리고 언제나 구경하기 행복한 꽃가게들과 한아름 꽃을 사가는 사람들.


장을 보고 와서는 장 본 것들을 정리해 넣는다. 주말이니 창문을 활짝 열고 방 청소를 하고, 빨래도 돌린다. 벌써 이불 빨래 한지 한 달이 지나서, 오늘은 베개와 이불 커버까지 다 벗겨내야 한다. 쓰레기통도 비우고 새로운 봉지를 씌운다. 쓰레기는 언제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불어나는 걸까? 엄마의 말이 새삼 생각난다. 쓰레기 늘어나는 것처럼만 돈이 늘어나면, 돈 걱정 할 일이 없겠다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혼자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한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꾸려나간다는 것이 이렇게 귀찮은 일인 줄 처음 알았다. 말 그대로 그때까지 나는 학생으로써 ‘공부에만 집중’했으니까. 엄마가 억지로 깨울때 일어나서 이미 준비 되어 있는 교복을 입고, 차려진 아침밥을 쑤셔넣고, 학교에 다녀 오면, 저녁이 차려져 있거나 간식이 준비되어 있고, 방은 청소되어 있고, 깨끗한 침대는 포근했다. 나는 오로지 나의 ‘중요한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온전히 가장 중요한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내조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것이 소중한 줄도 모르고 당연하게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한참 시간이 흐르고서야 알게 되었다.


깨끗한 옷을 옷장에서 꺼내 입기 위해서는 빨래를 돌리고, 널고, 개고, 옷장에 정리하는 과정이 있어야 했고, 삼시 세끼가 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해서 밥상을 차리기까지의 과정이 있어야 했다. 물론 그 이후에 설거지와 주방정리까지. 쾌적한 방에서 살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쓸고 닦고, 주기적으로 먼지도 털어주고 닦아주고, 이불빨래도 해 주어야 한다. 화장실 청소,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에어컨/히터 청소, 공과금 내기, 드라이 맡기기, 집에 문제 생기면 연락해서 고치기 등등… 그냥 사는 일 자체가 왜 이렇게 바쁜거야!





서울에서 퇴사를 준비할 때, 이미 나는 자취 7년차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 하는 건지 몰랐다. 나는 언제나 출근해서 학교나 회사에 가기 바빴고, 요리나 집안일 따위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다. 간신히 호더가 아닌 ‘정상’적인 범주의 생활을 유지할 뿐이었다. 쓰레기가 차면 버리고, 더러우면 청소하고, 밥은 거의 사 먹는 생활. 그때까지도 과거의 엄마의 ‘내조’를 잊지 못하던 나는, 그래서 더 비참했다. 이런 소소한 일들 말고, 나는 지금 ‘중요한 일’(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을 해야 하는데, 회사를 다니느라 모든 에너지를 다 쓰고 있고, 그나마 남은 에너지는 이런 자잘한 일을 처리하느라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회사 후 집안일 하고 나면 피곤해서 잘 시간밖에 없었다. 이런 일들이라도 안하면, 살 것 같은데, 너무 귀찮아 죽겠는데, 누가 대신 해 줄 사람 없나? 그래서 남편들이 내조해줄 ‘아내’를 찾는 건가? 나도 아내가 필요해.

하지만 아내든, 고용된 가정부든, 내조를 받기 위해서는 나는 돈을 더 벌어야 하고, 그만한 돈이 나에게는 없다.



회사와 집안일, 이라는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간신히 해야만 하는 일들만 하면서 사는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하는 삶을 원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삶’으로 노선을 변경하기로 했다.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도 해 보고,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일을 했고, 다양한 곳들에서 살았다. 원룸 자취도 했고, 아파트 쉐어도 했고, 룸 쉐어도 했고, 하우스 쉐어도 했다. 공유 부엌도 있었고, 개인 부엌도 있었다. 그런데 어딜가서, 어떻게 누구와 살든, 변치 않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집안일’ 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들’은 변함 없었다는 말이다. 중국의 기숙사에서도 매 주 빨랫거리를 들고 기숙사 빨래방으로 가서 코인을 바꾸는 귀찮은 과정을 거쳐 (가끔 코인을 먹으면 열받는다), 빨래를 돌려야 했고, 호주의 셰어하우스에서도 비싼 세탁기 값을 아끼기 위해 난생 처음 100% 손 빨래라는 걸 하면서도 땀냄새 안나는 셔츠를 원한다면, 꼬박꼬박 빨래를 해서 널어야 했다. 어딜 가든 배가 고프면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해야 했고, 쓰레기를 비워야 했다.




나는 무언가, 남에게 보여줄 만한, 성취를 이루는 것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일이든, 공부든, 여행이든, 작품활동이든. 살림같은 소소한 것들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부수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살림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일이든 공부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빨래도, 설거지도, 청소도 못할 지경에 이르면, 인생의 성취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건, 안해도 살 수 있지만, ‘살림’은 멈추면 살 수가 없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살림은. 그렇게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기도 하다. 죽을 때까지 살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반복되는 요리와, 빨래와, 청소 속에서?



어쩌면 살림은, 어린왕자가 말했던, 우물가로 물을 마시기 위해 걸어가는 일 같은 건지도 모른다. 약장수는 말했다. 약을 먹으면 갈증이 해소되어 하루에 물을 마시러 가는 오십 삼분을 절약할 수 있고, 그 시간동안 훨씬 더 중요한 일(뭔진 모르겠지만) 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어린왕자는 그 오십 삼분을 우물가로 천천히 걸어가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리는 데에 쓰겠다고 말했다. 나는 어린왕자에게 공감하며, 나도 그렇게 살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새에 ‘어른’이 되어, 우물로 물을 마시러 갈 시간 따위는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걸까. 그래서 나는 우선 순위를 좀 바꾸기로 했다. ‘살림’에 더 포커스를 맞춰보기로 했다.

살림조차 할 여유를 주지 않는, 회사와 도시를 떠나.






서울을 떠나고, 자취생활 8년차가 되어서야 나는 나의 ‘살림’, 그러니까 ‘일상’의 순간순간들에 집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위해, 어떤 맛있는 걸 먹을지 고민했다. 어떤 날은 따뜻한 된장찌개, 어떤 날은 차가운 콩국수. 퇴근길에 집 앞 야채가게와 과일가게에 들러 간단히 장을 본다. 요리를 하고, 맛있게 먹고, 설거지를 하면 어느새 밤이다. 운동을 가기도 하고, 밤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주말에는 청소하고, 빨래하고, 햇볕 아래 누워있고. 새로운 섬유유연제 냄새에 감동하고, 인터넷에서 본 새로운 레시피를 시도해 보기도 한다. 강아지가 있으면 산책도 하고, 고양이가 있으면 놀아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게 뭐가 대단한 일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다들 당연하게 살아가면서 꾸려내는 일상의 삶인데. 그런데 의외로 이런 일상을 ‘잘’,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아내는 사람은 정말 별로 없다. 다들 우울증을 겪고 무기력증에 빠지며, 공황장애와 수면장애는 너무 흔하다.

중간 중간, 살림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었기에, 살림을 놓아버린, 쓰레기가 천장까지 쌓인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길 수 있다. 일상의 반복됨에 지쳐버린 적이 있었기에, 일상에 짓눌려 미래는 커녕 눈앞이 캄캄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


매일 매일, 잠깐이라도 행복함을 느끼면서, 혼자서 씩씩하게 삶을 꾸려 나가고,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는(?) 것.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삶인 것이었다. 그렇게 사는 것만으로도 할 일이 많고, 충분히 바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성취해 내는 것이 없어도. 내게 주어진 인생을  ‘잘’ 살아내는 것.

내가 원하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다.

혼자서도 '잘' 살 줄 아는 사람. 자신을 가꾸고, 집안을 가꾸면서.  

좋은 직업에, 돈 잘번다는 사람은 그나마 찾기 쉬운데,

누구의 내조도 없이, 혼자서 잘 사는 법을 아는 사람은 오히려 정말 찾기가 힘들다.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으로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한국의 경쟁 사회를 떠나서야 알게 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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