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모든 길은 결국 이어진다

네덜란드 - 암스테르담, 틸부르흐

by ClaraSue



십년전, 대학교 2학년이던 나는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가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1년간 미국에서 공립고등학교 교환학생 생활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미국이 아닌, 그 당시 미국인들이 동경하던, 유럽으로 가고 싶었다.


이제와 돌아보니 그 때, 우리 학과에서 강력하게 지원했던 프로그램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있었다. 그런데 불어를 제 2외국어로 공부하고 미국 물(?)을 먹었던 나는 '네덜란드는 무슨', 모든 미국인들의 로망이던 'Paris, France'를 무조건 주장했다. 기대처럼 파리에서 공부했던 건 아니고, 그 때 우리 학교에서 처음으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시작한 툴루즈 비즈니스 스쿨 1기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미국 해외생활, 대학 자취생활을 해 보았다는 자신감에 프랑스에서 자취생으로 사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겠어? 라고 자신만만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버리한 철부지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내가 다 컸다고 자신만만했다) 미국에 있을 때는 적어도 호스트 패밀리라는 보호막이 있었다는 것을 (그래도 힘들다고 울었지만) 나 혼자 온전히 프랑스에서 모든 바람을 다 맞아 보고서야 알았다.

재정 문제부터 시작해 (월세+공과금 부터가 한국보다 세네배 들었고, 물가도 너무 비쌌다), 언어 문제 (영어가 아닌 기초 단계로 돌아간 불어를 쓰면서 다시 멍청이가 된 느낌을 받는 것은 끔찍했다), 문화 적응까지 (음식도 그렇고, 미국인보다 더 거만하고 차갑게 구는 프랑스인들, 만연한 인종차별) 나는 두손 두발 다 들고 한 학기만에 포기를 선언했다.


그 때 돈이 없어서 유럽 여행도 제대로 못하고 겨우 프랑스, 이탈리아만 갔다 왔는데 프랑스에 얼마나 정이 떨어졌는지(?)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으로 두번 다시 얼씬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속에 '내가 정착하고 싶은 꿈같은 사회는 어디일까' 를 언제나 품고 있다 보니, '복지 천국'이라는 북유럽 국가들을 한번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정말로 북유럽은 남녀평등과 성소수자 인권이 높고, 세금이 높은만큼 삶이 윤택하고, (네덜란드는) 대마와 매춘을 합법할 만큼 오픈마인드의 사회인걸까?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판단하고 싶었다. 그래서 유학 준비를 하면서 북유럽쪽에 크게 관심을 두고 살펴 보았고, 드디어 나는 석사 유학 겸 북유럽 사회를 관찰하려 네덜란드로 떠나게 되었다.


코로나때문에 이어지던 일년간의 방구석 유학 끝에 드디어 나는 고대하던 비행기를 탔다.

네덜란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지도 못한 채.

(구체적인 이야기는 매거진으로~~)


https://brunch.co.kr/magazine/dutchweekdiary



코로나의 여파로 네덜란드 전체가 새 학기 학생들의 주거 문제로 들썩이고 있었다. 작년에 집을 구하지 않았던 학생들이 올해 집을 구하고, 새로운 입학생들도 집을 구하면서 평소보다 두 배로 수요가 오른 것이다. 수요가 오른 만큼 집세도 올랐고, 거주지 퀄리티는 떨어졌다. 사람이 살만한 곳인가 아닌가는 지금 따질 때가 아니었다. 다들 한 몸 누일 곳을 찾지 못해, 특히 외국인 유학생들은 임시 거주지에 묵어가며 미친듯이 방을 찾아 다니고, 심지어 홈리스들도 생기는, 네덜란드 전국적인 문제였다. 원래도 암스테르담이나 우트렉 같은 대도시들은 새학기가 시작할 때 학생들의 집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학생들 뿐 아니라 일반인도 주거지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기로 악명높은 도시들이다) 이번에는 모든 곳이 다 그랬다. 나는 그 난리통의 한 가운데로 캐리어를 끌고 들어간 것이다.



학기가 시작하고 한달이 지나도 주거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학교에서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말했다. 유학 포기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나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만약 끝까지 집이 안 구해지면 포기해야 할까. 그런데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니 오히려 답이 명확해졌다.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죽어도 못 돌아간다. 집을 못 구하고, 거주 등록을 못해서, 나갔다가 재입국을 반복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반드시 버티고 말 것이다. 놀랍게도 그렇게 ‘버티기’를 결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이 구해졌다.



백신이 보급되고, 강력한 코로나 규제는 풀려가고 있지만 여전히 첫 학기는 코로나와 함께 진행되었다. 오프라인으로 수업을 하다가도, 코로나가 심해진다 싶으면 온라인으로 전환되었고, 마스크를 쓰네 마네, 가게와 술집들을 여네 마네 하는 것도 여전히 논란거리였다. 크리스마스까지 부분 락다운이 되면서, 온전한 해외 유학생활은 하지 못했다. 나도 결국 2022년 초 네덜란드에서 코로나에 걸렸고, 이후부터는 점점 유럽에서 코로나의 여파가 걷히기 시작했다.




2월 말, 갑자기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학교에 갔는데 갑자기 애들이 전쟁이 났다고 했다.

같은 수업을 듣는 우크라이나 친구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가족들이 키이우에서 피난갔다고 한다. 연락이 안되어 울고 불고 하다가 다행히 며칠 만에 가족과 연락이 되었고, 우선 그 친구는 네덜란드에서 어떻게 해서든 일상을 다시 유지해 나가려 노력했다. 크리스마스 때 키이우에 갔는데, 그 때부터 이미 분위기가 어수선했다고 했다. 다들 설마 설마 하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네덜란드도 우크라이나와 나름 가까운 위치이기때문에 초반에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다들 걱정했다.


러시아가 움직이고, 두번째로 중국이 움직일 수도 있다고 하던 이야기가 돌았다. 나도 모르게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잊고 살지만, 북한이라는 시한폭탄이 있으니, 완전히 안전하다 할 수 없다. 이렇게 네덜란드에서 평범한 삶을 보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서 핸드폰을 켜보니 “한국에 전쟁이 났다”라는 뉴스를 보게 된다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초조하게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무사하길 먼 타국에서 발 동동 구르며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족은 난민이 되고, 그렇게 영영 연락이 끊길 수도 있겠지. 엄마는 적어도 너라도 살테니 다행이다, 라고 했다. 하지만 나 혼자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 생각을 하니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깨닫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것 자체가 참으로 감사하고 소중한, 특별한 일이라는 걸 생각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진행 중이지만 여기서는 코로나 이후 2년만에 축제가 한창이다. 다들 코로나에서 벗어나 '일상'을 되찾음을 축하하고 있다. 밤새 광장에 천막을 치고 파티를 하는 한 가운데, 나는 이질감을 느낀다. 바로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피난가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신나게 마시고 즐기고 있다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더 열심히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한치 앞도 모르는 존재니까.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과 우크라이나의 아이러니를 논의한 적이 있다. 전쟁이 나기 전, 우크라이나는 동유럽권에서 아주 강력하게 아프간 난민들을 받지 않는 나라로 유명했다.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런데 이제 자신들이 난민이 되었고, 다른 나라들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과연 이 전쟁은 언제 끝날까.





전쟁의 여파는 내가 네덜란드 온 초반과 후반을 비교하면 극명히 느껴진다. 겨우 일년만에 이런 상황이 될 줄 누가 알았을꼬.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심각하지만, 네덜란드도 지금껏 겪은 적 없는 최악의 물가 상승을 겪고 있다.

초반에는 햄스터링-불안한 사람들이 음식이나 생필품을 사재기 하는 것- 때문에 소매 가격이 상승했고, 몇몇 품목은 구할 수도 없었다. 예를 들면 가장 저렴한 오일 종류였던 해바라기씨 유. 우크라이나가 해바라기의 주요 생산국이라는 걸 이번 사태로 알았다. 아예 해바라기씨 유를 구할 수가 없고, 간신히 어디서 발견한다 해도 엄청나게 가격이 비쌌다.


에너지 자체가 비싸니 가스/수도/전기 요금이 다 오르고, 집세도 올려 받는다. 러시아가 파이프라인을 막으면서 겨울 유럽의 난방비는 엄청나게 오른다고 하는데, 유럽은 러시아 대신 아메리카 대륙과 어떻게든 연결해서 가스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고 하는 것 같다. 네덜란드는 그래서 심지어 멈췄던 가스 추출을 다시 시작할 논의를 하고 있다.

친환경 에너지로 변환한다는 목표들은 다 어디가고, 다들 당장 닥친 에너지 문제 해결에 급급하다. 네덜란드가 가스 산업을 멈췄던 이유는 지진이 나서 였는데, 다급하니 주민들을 다 이주시키고 에너지 자급자족으로 경제의 흔들림을 최소화 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경제문제에 밀려 지진이나 이상기후같은 환경문제들은 끼어들 여지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유럽은 (아니 전세계는) 이상기후를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이번 여름도 유럽이 겪어보지 못한 더위를 겪으며 에어컨과 선풍기 등의 구매가 급증했다. 내 방에도 에어컨이 없는데, 네덜란드 친구들이 에어컨같은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간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다행히 나는 가장 더울 시기 네덜란드를 떠나 있었고, 선풍기로 충분히 여름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상 더위로 인해 사람들이 에어컨을 더 많이 사용한다면, 결국에 지구온난화는 더 많은 에어컨들이 뿜어내는 악성물질들과 열기로 심화될텐데, 이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야 하는 것일까.



이 인플레이션의 시기에 수입 없이 버티는 유학생의 생활은 참으로 팍팍할 수밖에 없다.

최대한 외식, 간식, 이동을 하지 않으며 집-학교-도서관-스포츠센터를 전전한다. 돈이 가장 없는 이 시기에 반대로 돈이 없어서 자유로운 삶에 대해 생각한다. 진정한 미니멀라이프. 내게 필요한 옷과 속옷, 신발은 딱 몇 벌이고, 가방도 백팩 하나, 에코백 하나, 어깨에 매는 작은 가방 하나면 충분하다. 화장도 잘 안하니 뷰티에 돈도 안 들어가고, 스트레스 받을 일이 그다지 없으니 직장다닐 때 남용하던 시발비용이나 퇴근 후 술 마시는 비용도 없다. 나는 지금까지 무조건 적어도 월 500을 버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언젠간). 500만원이 뭐야, 그 이상을 벌면 당연히 많이 벌 수록 좋겠지. 골프도 치러 다녀야 하고, 여행도 다녀야 하고.


하지만 그런 것은 다 나의 ‘행복한 삶’에 있어서 없어도 되는 부수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회사원일때 언젠간 반드시 있어야 하는 줄 알았던 애플워치, 명품백을 위시한 고급 물건들, 그리고 비싼 차. 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도서관에서 마음껏 글을 쓰는 시간, 집에서 해 먹는 맛있는 저녁, 그리고 땀 흘리는 운동, 이 세가지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오히려 인플레의 시기에 배우고 있다.


사실 학기의 마지막이 다가오면서 본격적으로 석사졸업논문에 올인 해야 했고, 자연스레 단순한 삶이 되었다.

논문을 위해 인터뷰 24개를 하고,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회사에 출근하듯이, 아침먹고 9시까지 도서관으로 가서 3,4시간 논문을 쓰고, 집에 돌아와서 점심먹고 잠깐 쉬다가 다시 도서관으로 가서 저녁까지 머물렀다. 인터뷰가 마무리되고 섬머스쿨로 떠나기까지 3주정도밖에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더 단기간 집중 할 수밖에 없었는데, 논문을 쓰면서 그 전까지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박사과정과 연구자로서의 삶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려해보게 되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나와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쓰고, 내가 너무 관심있는 흥미로운 주제들에 대해 공부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있고.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의 대부분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스물둘, 셋의 나이에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친구들이다. 그들은 '세금을 내는' 네덜란드인 들이기에 학비가 엄청나게 저렴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대학원 공부를 할 수 있다. 직업과 병행하기도 하고, 1년 코스를 2,3년에 걸쳐서 하기도 하고, 더블 마스터도 많이 진행한다. (공짜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그랬었듯, 괜히 이 학위를 한다고 투덜대기도 하고, 쓸모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을 보며 나는 몹시 부럽기도 하고, 네가 불평하는 이 학위가, 어떤 사람(나)에게는 엄청 간절한 것이었다는 생각도 한다. 너는 쉽게 얻은 기회겠지만 나에게는 멀고도 힘든 여정이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내가 쉽게, 당연한것으로 치부했었던 것들이, 반대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필사적으로 쟁취한 것이었을 것들이라는 것 또한 생각한다. 이 세상은 그렇게, 불공평하게 돌아가고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유럽에서는 일자리 구하기가 요즘 상대적으로 아주 쉽다고 한다. 청년 실업률이 높은 한국에 비해 네덜란드에서 대학/대학원 졸업자들은 쉽게 좋은 자리에 취직하고 외국인보다 돈도 많이 받는다. EU국가 출신으로 워킹 비자만 있어도 다들 취직이 되는 걸 보며, 나는 공식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은 참 답답한 일이라는 걸, 비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나는 더이상 워킹홀리데이 비자의 힘을 빌릴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도. 졸업이 다가오면서 나도 모르게 초조해 질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에 살아보니, 이 곳은 남녀평등과 성소수자 인권이 높은 편이지만, 여전히 이들도 유교문화 뺨치는 보수적인 크리스천 문화에서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변화가 진행될 수록, 반발도 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신남성연대'와 같은 극단적인 무리들이 특히 온라인에서 십대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과거 프랑스에서 내가 경험했던 것 만큼 대놓고 하는 인종차별이 없긴 하지만 여전히 뿌리 깊은 곳에서는 '다름'을 두려워하고 자신들끼리 뭉친다. 진보적이라면서 여전히 왕실과 블랙피트(누가 봐도 흑인 노예를 묘사한 것과 같은) 를 전통이라고 유지하고자 한다. 여전히 저소득층 특히 이민자 자녀들 같은 경우, 같은 교육 시스템안에서도 고등교육으로 올라가는데 한계가 있다. (언어, 인맥, 학습 지원, 편견 등의 이유로)

세금이 높은 만큼 혜택을 받지만(싼 대학학비 같은) 복지의 함정도 함께 공존한다. 내 친구 아빠같은 경우, (예를 들어) 10시간 일하고 저소득층 지원금을 받으면 20시간 일하는 것보다 돈을 더 많이 받는다. 총 소득을 높이고 싶지만 아무도 30시간까지 일을 주지 않고, 20시간 일해봤자 10시간 일한 것보다 돈을 덜 버니 일을 하고자 하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허가받은 가게에서 소비자에게 대마 판매가 합법화 되어 있지만, 정작 그 가게에서 합법적으로 대마 공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없기에 결국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불법 수입이 되어온다. (이건 무슨 아이러니인가) 대마 뿐 아니라 각종 디자이너 필 - 인위적으로 제조된 약 - 들이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엄청나게 쉽게 구매 가능하게 되어 있다. (법적으로 5%가 불법이라 명시되었다면 이들은 4%로 만들어 파는 식으로)

이곳도 마찬가지로 '집'을 물려받지 못한다면 더 이상 젊은이들이 집을 살 수가 없을 정도로 부동산 버블이 심하다.

그리고 해가 엄청나게 길고, 엄청나게 짧은, 극단적인 낮밤과 축축한 날씨는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세상에 파라다이스는 없구나.




초안을 고치고 고치는 작업을 거쳐 드디어 마무리한 나의 졸업 논문은 아주 좋은 성적을 받았다.

처음 성적을 받았을 때는 믿을 수가 없어 ‘내가 잘 써서’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의심했다. 마치 내가 처음 혼자 어찌어찌 써 낸 자소서와 아카데믹 에세이로 입학 허가를 받았을 때처럼, 정말로 내가 이 성적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혼란스러웠다.

친구들이 모두 나에게 Imposter 증후군이라고 했다. 자신이 실제 능력이 있는게 아니라 운이 좋아 그렇게 된 거라고 믿으며 진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과도하게 노력하는 사람. 좋은 성적을 받았으면 내 능력이 뛰어나구나, 생각하면 되지 왜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냐고. 나는 언제나 나보다 더 ‘잘난’ 사람들만 바라보며 스스로를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게 진실인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저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나를 발전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



이렇게 늦깎이 ‘인문학’ 석사 유학이 마무리되어간다.

멀고도 험한 학자의 길에 감히 들어갈 능력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내가, 점점 학교에 남는 길로 마음이 가고 있다. 어쩌면, 나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인문학 공부를 좋아했다. 철학과 역사학, 사회학과 지리학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그런데 두려움에 선택하지 못했다. 돈을 못 벌까봐, 생각만큼 재미 없을까봐, 실용성 없는 학문에 아무도 관심 주지 않아 나는 결국 루저가 될까봐.

다들 말리는 길이다. 인문학 분야로 박사로 나간다니. 박사 과정 자체도 길고 긴 여정일 뿐더러 이후에 일자리 보장도 없다. 하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이 이것이라면.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그 모든 길들이, 결국에 내가 언제나 원했던 이 길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의 여정은 또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나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삶에 대해.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계속해서 떠나고 싶다.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만남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