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할머니의 유언
나의 우간다 여행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코시국이 끝나 모두가 휴가를 갈 시기라 비행기 표도 최고로 비쌌고, 간신히 비행기표를 샀더니 황열병 접종이 문제였고, 티켓 때문에 항공사와 씨름하고, 떠나기 며칠전에 아슬아슬하게 기적처럼 티켓을 받아 공항에 갔더니, 이번에는 오버부킹 사태로 스탠바이가 걸려 친구들 다 비행기 타는데 나 혼자 초조하게 남은 좌석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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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우간다에서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너무나 좋은 인연들을 만나고 우간다의 대자연과 야생동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네덜란드로 돌아오기 며칠 전,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이었다. 도저히 지금 상황으로는 한국에 갈 수 없어 포기하고 동생을 통해 간신히 영상통화로 할머니 얼굴만 보았다. 할머니는 나를 알아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길 바라면서.
그리고 우간다에서 9시간 비행 해 네덜란드로 돌아오자마자 할머니의 부고 문자를 받았다. 공항에서 집으로 기차 타고 돌아가는 길에 설마하는 마음으로 확인한 비행기 티켓 예매 사이트에 당일 저녁 한국행 비행기가 있었다.
마음의 결정을, 지금 빨리 내려야 했다. 이 비행기표를 살 것이냐, 말 것이냐!
다행히 학교 수업이 없어 캐리어만 바꿔 들고 스키폴 국제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서 60유로나 주고 당일 코로나 검사까지 받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출입국 담당자가 심지어 나에게 오늘 입국해서 오늘 다시 출국하냐고 설명해보라고 캐물었다. 긴급 상황이 있어서 그렇게 됐다고 대강 설명하고 통과. 그리고 이어지는 12시간의 비행. 인천에 도착하니 하필 금요일 오후라 지방행 공항 버스와 기차표가 다 매진됐다. 설마 했는데!
두 시간 후에 용산에서 출발하는 KTX 티켓을 간신히 구했다. 시간 내에 인천공항에서 용산까지 도착하기 위해 거의 007 작전처럼 뛰었다. 그렇게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3일째 되는 밤, 한국에 도착하여, 다음 날 영결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 달려온 할머니의 마지막 길.
할머니에게 안녕을 고하면서도, 나는 할머니와 끊어지지 않는 끈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느꼈다.
96세로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는, 일제시대, 광복, 한국전쟁, 독재시대를 모두 겪은 그 당시 분들처럼 뼈빠지게 고생 하셨다. 모두가 아는 흔한 이야기다. 너무나 가고 싶었던 학교를 딸이라는 이유로 보내주지 않았던 아버지와 얼굴도 모르는 남편과 이른 나이에 억지로 결혼해 시작된 시집살이. 무능력한 남편 대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키워내야 했던 6남매. 할머니와 2년동안 함께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을, 나는 영원히 가슴 속에 간직할 것이다.
원없이 활개치면서, 훨훨 자유롭게 살아라.
그것은 할머니 평생 바랬던 원일 것이다.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살면서 세상 끝까지 가 보는 것.
하지만 시대와 사회와 삶에 짓눌려 할머니도, 할머니의 딸인 우리 엄마도 그렇게 살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할머니도 엄마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으니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살 도록 해 주리라는 희망이었다. 그 희망은 나에게 전이되었고, 나는 덕분에 원없이 활개치면서 살 수 있게 되었다.
퇴사하고, 마음대로 살겠다고 돌아다니면서,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이러한 자유는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더 넓은 곳을 바라보라’.
이 말은 학문하는 학자로서 자신이 과거 선현들의 지혜를 토대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문구다. 하지만 나는 이 문구가 내가 할머니와 엄마를 생각하며, 할머니와 엄마로 상징되는 한국의 현대사에 대해 느낀 바를 잘 표현해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더 넓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나를 밀어 올려준 거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이 대대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낸 할머니가 있었기에, 나는 내게 주어진 이 삶을 절대로 허투루 흘려보낼 수 없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삶은, 우리 할머니가 그토록 바라셨던 젊은 날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