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국 - 코로나 시국

by ClaraSue


이미 어학원을 그만두기 몇달 전부터 코로나가 터졌다. 물론 어학원 수업에도 차질이 있었지만,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유럽으로 이 시국에 유학을 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기숙사까지 예약했는데! 초조하게 학교의 연락을 기다리다 결국 100%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 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양가감정에 휩싸였다. 첫 일년은 어차피 학비도 저렴하기에 온라인으로 진행하면 나는 오히려 생활비를 아끼고, 심지어 한국에서 일하면서 돈을 더 모을 수도 있다! 이렇게 꿀같은 일이. 반면 안 그래도 짧은 유학 생활을 해외가 아니라 ‘한국 집구석’에서 하게 되다니. 나의 신나는 네덜란드 인생은? 새로 사귈 친구들과 내가 누빌 교정은?!





아무리 서운해 해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 시국에 굳이 네덜란드에 가고 싶지는 않다고 결정된 이상. 나는 결국 비행기표와 기숙사를 취소하고 집에 있기로 결정을 내렸다.

사실 해외생활을 하면서 그 동안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들이 많았다. 이번 기회에 새로운 프로젝트들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첫번째로 한국어 교원자격증 따기. 중국에 있을 때도 한국어 선생님이 될 뻔한 적이 있었다. 취직을 해버리는 바람에 그 길은 포기했지만, 항상 ‘한국어’를 가르친다면 어떨까 상상했었다.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 국가교육지원 프로그램으로 온라인 교육 할인까지 받을 수 있었다. 알아보니 온라인 수업 이수하고, 실기 수업 이수하고, 마지막으로 자격증 필기/면접 시험을 합격하면 된다고 했다. 에이, 이거 참 쉽네! 뭐 그렇게 어렵겠어?!




라고 쉽게 생각했다….또 나는 내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도 모르고 덥석 시작한 것이다. 우선 온라인 수업을 이수하는 것 부터가 쉽지 않았다. 정해진 기간 안에 수업을 다 들어야 하는데 그 수업이라는게 거의 수면제 수준이었다. 거기다 양도 방대했다. 공부해야 할 범위가 기본 교육학부터, 언어학, 한국어학(문법), 그리고 교수법과 한국문화까지 장난이 아니었다. 중간중간 퀴즈와 시험까지 있어서 은근히 까탈스러웠다. 겨우 이수 완료 했더니만 실기 수업을 듣고 시범 수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실기 수업은 서울에서 진행됐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 끼고 용산까지 갔다. 용산역이 그렇게 텅 빈 건 처음 봤다. 무서울 정도로 흐르는 고요함. 정말 세상이 변했구나 싶었다. 그렇게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난생 처음 한국어 시범 수업을 했는데 다행히 1년간 영어 강사를 한 보람이 있게도 말이 잘 나왔다.


교원 자격증 따려고 오신 분들은 내 생각보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았고, 외국인 분들도 몇 분 계셨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관문은 필기 자격증 시험이었다. 다행히 코로나 때문에 시험 취소가 되지 않았다. 만약 이번 시험을 놓쳤더라면 내년에는 한국에 없을 수도 있었다. 운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은 곧 반드시 이번 시험에 합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시험공부에 매달렸는데 모의고사를 치면 칠 수록 자신감이 떨어졌다. 내가 이렇게 한국어 문법을 몰랐다니. 거기다 ‘한국문화’ 과목은 거의 나의 기본 상식과 운에 맡겨야 할 지경이었다. 한 과목이라도 과락만 면하면 통과 가능할 것 같은데, 제발 공부한 것에서 나오게만 해 주세요, 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렇게 어찌어찌 필기시험까지 치렀다. 집에서 예비 채점을 해 보는데 다행히 합격했다!


합격의 여유를 느끼기도 전에 면접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진짜 마지막 고비다. 어떻게 준비 해야 할지 몰라 책을 우선 한권 샀는데, 살펴보니 또 눈앞이 캄캄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면접 준비를 하면서, 왜 내가 이 시험을 본다고 했던가, 후회했다. 시험 이란게 항상 그렇다. 확실한 목표가 정해져 있으니 그걸 달성하는 과정에서 실력은 느는데 부담 갖지 않으려고 해도 언제나 스트레스를 동반하는…그래도 다행히 결과는 좋은 편이다. 그렇다. 이것도 동전의 양면이다.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좋기만 한 것도 아닌.


면접은 준비했던 것보다 훨씬 여유롭게 진행되었고, 이론적인 것보다 한국어 교사로서의 태도에 중점을 두고 질문했다. 기억에 남는 질문은, ‘한류 때문에 한국어 강좌 인기가 해외에서 높아진다는데, 만약 한류의 인기가 떨어진다면 어떻게 한국어 강좌 수강생을 확보하겠습니까?’ 였다. 한국 음식이라든지 다양한 컨텐츠로 관심을 높이겠다, 이런 비슷한 대답을 했는데 요즘 한국어 강의 현장에서 고민하고 있는 화두인 것 같다. 한류의 인기에 의존하지 않고, 어떻게 한국어 자체에 대한 관심을 끌어낼 것인가. 한국어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왜, 얼마나, 중요한가. 언어학에 관심이 있는 내게 흥미로운 주제다.







다음 프로젝트는 요가 강사 자격증을 따는 거였다. 인도에서 요가를 처음 접하고서 부터 요기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언제나 컸다. 마침 퇴사 후 교육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이번 기회에 3개월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요가원에서 수련하고 명상하는 삶을 살아보자, 다짐했다. 그런데 요가 코스를 시작한지 한달만에 새로운 일자리가 들어왔다. 그렇게 나의 요가만 하는 삶은 언젠가로 또다시 미뤄졌다.



안 그래도 유학 자금이 더 필요하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일자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상해에서 어설픈 스타트업에서 잠시 겪어본 후, 처음 일하는 ‘스타트업’. 조직이랄 것도 없이 이제 막 학원을 오픈한 원장님 한 분이 계신, 내가 ‘창립 멤버’나 마찬가지인 영어 도서관이었다. 영어 유치원에서 오래 일하다가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계셨던 사업을 시작하셨다는데, 커리큘럼, 클래스 내용, 인테리어, 상담까지 모든 면에서 원장님이 오래 기획하던 것이구나, 를 느낄 수 있었다. 한 클래스당 영어 동화책 한 권을 재미있게 읽어주고 함께 관련된 액티비티를 하는 수업이었다. 그림을 그린다든지, 만들기를 한다든지 하는.


100% 영어 수업은 같지만, 이번에는 어학원에서 가르쳤던 초등학생보다 더 어린 유/아동 수업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하는 영어 사교육에 반대한다고 했지만, ‘학습’보다는 영어로 하는 ‘놀이’에 초점이 더 맞춰지는 소규모 그룹 이라는 점으로 설득하셨다. 그리고 원장님이 나에게 쫙 보여주시는 그림 동화책들이 너무 좋았다. 나도 어렸을 때 엄마가 영어 동화책을 많이 사주셨었는데, 항상 재미 없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다시 보니 왜 이렇게 그림도, 글도 좋은 거야?






학원을 채운 그림책들과 원장님의 열정에 홀딱 넘어가서 나는 수업을 하겠다고 했다. 문제는 초등학생들을 처음 가르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유치원생들에 대해 하나도 몰랐다는 것이다. 네 살, 다섯 살 심지어 여섯 살까지도, 교실의 문이 닫히면 울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 앉히는 것, 책을 보게 하는 것부터 진땀 빼는 일이었다.

어떠한 것에 대한 아이들의 흥미는 기본적으로 10분이면 끝났다. 10분 동안 재미있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다른 활동을 해야 하는데 아이들은 곧장 책상과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원장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그리고 연령대별 아이들 수업을 해 보면서 나는 점차 네 살에게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것, 다섯 살과 여섯 살이 가능한 액티비티, 일곱살은 어디까지 내가 학습적으로 푸시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IMG_2977.JPG



아이들이 과연 내가 읽어준 그림책을 미래에 기억할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 수업을 해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무의식 중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지, 얼마나 빨리 성장하는지, 그리고 모든 아이들의 성향이 얼마나 다른지, 나는 많이 배웠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귀여운지도. 물론 여전히 남의 애라 귀여운 거라 생각한다. 내 자식은..아직까지 자신이 없다.


교육업에 종사하면 아이들 뿐 아니라 다양한 학부모를 만난다. 내가 일했던 영어 도서관은 어학원보다 더 VIP 학부모들이 많았고, 대부분 아이들은 비싼 교육비를 내는 영어 유치원 원생들이었다. 아이들의 나이대가 어린 만큼 어찌 보면 나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어머님들이라 나도 모르게 나의 미래를 대입해 보게 되었다. 비싼 차와 명품들을 자연스럽게 걸치고 계시며 해외생활을 하셨거나 영어 잘하는 분들도 많으시다(그래도 자기 자식은 못 가르치겠다고 보내신다고 하셨다).


다들 벌써부터 영어와 공부에 대해, 어느 유치원을 보내는게 가장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계시는 걸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스카이 캐슬 스러운...). 놀라운 건 아이의 성격이 그 어머님을 보면 자연스레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절대 모래놀이 같은 걸 안 만지려고 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어머님이 엄청나게 깔끔한 스타일로, 아이를 불고 털고 닦고 하셨다. 거침없이(선을 넘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아이가 있었는데 어머님이 아이를 너무 예뻐하셔서 거의 혼을 내지 않으셨다.

가끔씩 아예 학습적인 부분을 특정 나이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학부모님도 계셨다. 3살때부터 알파벳을 배우는 아이들을 보다가 6살, 7살인데 영어는 커녕 숫자도 모르는 아이들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게 정상인가, 한국이라 비정상으로 보이는건가. 그런데 그런 ‘공부’나 ‘수업’을 들어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아이들은 오히려 그룹에서 주눅들어 있었다. 안타깝기도 했다. 옆의 친구들은 다 신나게 발표하고 이야기하는데 그 아이들만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 이래서 선행학습이 필수라고 말하는 걸까?



나도 언젠간 나의 아이의 영어 교육을 고민하는 학부모가 될까. 나는 어떤 엄마가 될 것이며 나의 아이는 나의 어떤 면을 반영하는 거울이 될 것인가. 한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면 얼마나 자유롭게 혹은 얼마나 교육제도에 맞게 키워야 하는가.




코로나 시국에 조용히 집에만 있다 보니 이런 저런 색다른 경험도 하게 되었다.

고등학생 국어 과외를 하게 됐는데 나름 자신이 있게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몇달 간 진땀 뺐다. 교육 과정이 바뀌었다! 심지어 '언어'도 아니고 '국어'라고 한다. 오히려 과외학생보다 내가 더 수능국어 공부에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하고 있었다. 결국 두번다시 국어 과외는 안하는 것으로 마음 접었다.


영어 라디오 방송의 공동 DJ를 하기도 했는데 한 달간 매일 2시간 짜리 라디오 쇼 스크립트를 써야 했다. 내가 흥미있는 주제면 괜찮을 텐데, 90년대 이전까지의 올드 팝이다 보니 대본을 써 내는데 한계가 있었다. 내가 말할 때 가끔 쩝쩝 소리를 낸다는 것, 방송 작가가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 일 이후에 팟캐스트에 대한 미련이 싹 사라졌다. 세상에 참 쉬운일이 없구만.



그 와중에 나는 만 나이로도 빼도박도 못할, 서른 한살이 되어 버렸다.

어찌어찌 새로운 일과 요가 자격증 수업을 병행하면서 나의 생일에 자격증을 받았다.

서른이 될 때도 별 감흥 없었는데, 오히려 서른 하나가 되어, 그 자격증을 받으면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나도 모르게 수고했다 스스로에게 말하는 와중에 왈칵 감정이 북받혀 올라왔다.


마지막에 거의 2주 가까이 소화도 못 시키고 아파서 더 그랬을까. 요가 자격증까지 따면, 31살이 되기 전, 내가 20대 때 하고 싶었던 것들을 정말 딱 끝내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거야 라고 생각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고 울었던 모든 순간들은, 오직 신만이 전부 알고 계신 나 혼자의 여정.

퇴사하고 무언가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다고, 그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러고보면 좋기만 한일도, 나쁘기만 한 일도 없었다.

어쩌면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은 환상인지도 몰라. 어떤 것을 선택해도, 내가 예상치 못했던 실망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어떤 것을 선택해도, 내가 예상치도 못하게 마주할 놀라운 것들이 있을 거라는 말이다. 내가 처음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고 해서, 그걸 실패라고 말할 있을까?

그러니 주눅들지 말자.

나의 선택은 언제나 끝이 아니라 또다른 챕터의 시작일 뿐이니까.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심해지면서는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 듣고, 과제하고, 맨날 영어로 눈 빠지게 논문과 책만 읽고 있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덩달아 할머니도 매일 나가시는 주간보호센터도 못 나가시니 그나마 나라도 집에 함께 있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다행이다. 우리끼리 화투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차도 끓여 마시고 하면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함께하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순간 순간 답답해서 미칠 듯한 때도 있었다. 불타오르는(?) 나의 젊은 시기에 서로를 피해 숨을 곳도 없는 답답한 작은 아파트에서 할머니와 엄마아빠하고만 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필요한 줄도 몰랐던, 귀중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진정으로 사람이 사는데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 전에는 더 많이 보고, 여행하고, 배우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소소하게 가족과 티비 보는 시간, 수다 떠는 시간, 같이 밥을 해 먹고, 과일을 깎아 먹는 시간들은 내가 그냥 흘려보내는, 낭비하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시간들이 ‘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시간들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 거였다.


코로나 시국에는 더더욱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죽어 나가고, 언젠간 할머니도 돌아가실테고, 엄마 아빠도 돌아가실테고, 그리고 그 다음은 내 차례일 테니까. 죽음을 생각하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뭐가 중요한지 선명해진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결국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