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강 작가님의 소설을 읽기 힘든 이유
한강 작가님의 책은 채식 주의자, 소년이 온다 이렇게 읽었었다. 뭣도 모르고 한국에서 상해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었는데, 소년이 온다를 종이책도 아니고 전자책으로 비행기에서 읽으면서 너무 울어가지고 정말 챙피했던 기억이 난다. 다 읽지도 못했는데 눈이 팅팅 부어서 후회했었지 왜 내가 이걸 비행기에서 읽었나 하고.
두 권 읽고서 충격을 받았었다. 세상에 이렇게 예술적인 작가도 있는데 내가 어찌 감히 글을 쓴다고 하나. 내가 쓰는 소설은 여기에 비하면 소설이 아니다 라는 생각에 지레 좌절했다. 특히나 소년이 온다는 그냥 한 문장 문장이 너무나 슬프고 가슴을 때려서 눈물을 멈출수가 없었다. 한강 작가님의 소설은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렸다.
춤을 춤으로써 살풀이 하는 대신 글로서 살풀이를 하는 무당 같다고 생각했다. 산자와 죽은자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럼으로써 한을 푸는 무당. 나도 518에 깊이 닿아 있기에 너무나 공감가면서, 너무 근원적인 슬픔이라 외면하고 있는 나의 감정을 건드리는 한강의 소설이 나는 힘들었다.
내가 깊이 깊이 억누르고 있는 무언가를 건드려버리는 글들이라고나 할까. 내가 억누르고 있는 무언가...나는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건드리면 나는 제대로 살 수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너무 예민해서 살 수가 없어서 일부러 나의 감정을 끊어버린 사람처럼.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더 느끼지 않기로, 더 슬퍼하고, 분노하지 않기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은 고스란히 나에게 전이되니까, 그리고 그게 증폭되어 나에게 전달되니까, 그러면 내가 살기 너무 힘드니까, 나는 마치 싸이코패스처럼, 어느 부분의 스위치를 꺼버린거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더 이상 느끼지 않기로. 그런데 그걸 사정없이 쳐부수고 확 뚜껑을 열어버리는 한강의 소설.
나는 한강 작가님이 어째서 이 시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잔치를 벌일 수가 있냐고 하는 말에 동의한다. 그런 작가님을 본다는 것, 그리고 글을 읽는다는 것은 나를 한편으로 안도하게 만들고 또한 부끄럽게 만든다.
안도하게 만드는 것은 나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나처럼 감정을 닫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이 매일매일 울 정도로 너무나 고통스러울지라도 끝까지 파고 들어가 있는 그 감정을 퍼 올려 예술로 승화시킨 사람이 있다는 것. 나와는 달리.
나의 깊은 내면에서 나는 한강 작가님과 어쩌면 비슷한 영혼을 가진 아주 예민한 영혼을 본다. 내가 소설을 읽을때마다 그것이 나를 트리거 하는 것이다. 너무 예술적이고 감정적이고 연약한 나비같은, 아이같은 영혼. 언제나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 내가 저 멀리 마음 속 싶은 곳에 꽁꽁 숨겨둔 아이. 항상 이상적인 생각만 하고 꿈을 꾸고 있어 현실과 괴리가 너무 큰 아이. 어째서 저기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여기에서 나는 살고 있는지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아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무력감을 느끼고 간접 트라우마를 함께 겪으며 그렇게 또 슬픈 사건들이 잊혀지고, 사람들- 나를 포함한 - 은 아무일도 없는 것 처럼 살아가는 것에 대해 다시 깊은 회의감과 슬픔을 느끼는 사람. 아름다운 이야기에 한없이 감동해 버리고, 슬픈 이야기에 한없이 슬퍼해 버리는 인간. 미미한 인간을 넘어서는 무언가에 경이를 느끼고 압도되어 버리는 존재.
그 아이는 마음 속 깊숙한 방에 넣고 가둬버리고 나는 존재론적인 고민과 죄책감, 부끄러움에 시달린다. 나는 속세의 성공(?)을 위해 그 감정을 외면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약한' 자아라고만 생각하면서. 그런 감정에 삶을 소모하고 낭비하지 않고 뚜렷한 목표를 세워 무언가를 성취하는 목적지로 달려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 세상의 폭력에 대해 생각해서 뭘 할거야.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소설을 써서 뭘할거야. 그걸로 먹고 살수 있는 것도 아닌데. 감정에 너무 심취하지 마 그건 너를 아무데로도 데려다 주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결과'를 예측하여 그 결과를 향해 달려갈 수는 있어도 그 결과가 가져올 결과는 또 모른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치 무언가를 아는 양 계획할 수 있는 양 살아가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내가 해외 생활을 거진 20년 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한번도 518 그리고 광주라는 이름이 이런 방식으로 세계에 알려지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목표를 향해 달려 가서 나온 결과가 아닌 것이다. 목표를 세운다고 해도 달성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냥 씨를 심는 것이다. 어쩌면 자그마한 꽃을 보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끝인 것이다. 운이 좋다면 언젠가 고개를 들었을 때 주변이 온통 꽃밭으로 뒤덮여 있거나 아니면 자그마한 것이 자라서 거대한 나무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도. 어쨌든 미약한 인간의 한계로는 알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결론은 한강 작가를 보고 나도 미약하게 나의 내면의 멀리 숨겨놓은 가장 연약한 아이를 어쩌면 꺼낼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그 아이도 나의 귀중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이 지독한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쓸모없다고만 생각했었던, 언제나 여리고 슬픈 울보. 나의 약점이 아니라 나의 특별함일 지도 모른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