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laraSue Jun 07. 2020

자유도, 자유롭게 살아본 사람이나
누릴줄 안다고

인도_다람콧



인도 다람콧 숙소 앞 발코니에 대자로 뻗어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구름을 보면서, 이따 저녁에 뭐 해먹을까, 내일은 뭐할까,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오는 깨달음. 나는 자유다!!!!!!!  


드디어 난생 처음으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도 되고, 반드시 해야 할 어떤 일도 없으며, 가야만 하는 곳도 없어진 것이다! 연락해야만 하는 사람도 없고 나를 꾸며 보일 사람도 없다. 내가 신발을 안신고 다녀도 상관 없고, 내가 백수로 누워있어도 혀를 차며 조언해주는 사람도 없다. 더이상 학생도, 회사원도, 큰딸도, 언니도, 누나도, 친구도, 연인도 아닌 그냥 나. 갑자기 마음 속 저 밑바닥에서부터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아하하하하하하!!

나는 자유라고!!!!!!! 이것이었구나. 내가 바라던 것. 내가 느껴보고 싶었던 것.  




정확히 몰랐다. 중학교 때 사춘기가 시작되면서부터, 나의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던 어떤 열망. 대체 무슨 열망인지, 어떤 소망인지 나도 몰라 설명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꿈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무엇인가 막연한 어떤 느낌. 그래서 추구할 수도 없었다. 실체가 없는걸 어떻게 추구한단 말인가. 그래서 대신 나는 실체가 있는 것을 따라 달려갔다. 학교 졸업장이라는 실체. 자격증이라는 실체, 취업이라는 실체. 


이성적인 논리로 따지면 실체가 있는 것이 실체 없는 것을 우선순위에서 이길 수 없었다. 느낌으로는 뭔가 아닌것 같은데, 나의 직감으로는 내가 바라던 것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그 느낌만을 믿고 눈 앞에 뻔히 보이는, 먹고 살기 위해 반드시 해야할 일들을 뒤로 미룰수가 없었다. 그럴 자신도, 확신도, 용기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나 자신을 합리화 시키려고 했던 말은, 우선 뚜렷한 기반을 잡고 나서, 그래서 인생을 어느정도 안정선에 올려놓고 나서,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항상 뒤로 미뤘다. 언젠가, 내가 마음껏 하고 싶은대로 살거라고. 



숙소에서 뒹굴거리면서 쓰는 글



아직 고등학생이니까. 대학생이 되면 자유로워지겠지. 학교도 널널하게 다니고, 부모님 밑에서도 벗어나고. 

그렇게 고대하던 대학생이 되어서는 나름 자유를 즐긴답시고 고등학생이라 못해본 것들을 다 해봤다. 

자유를 만끽했다고? 엄마 아빠 잔소리 안듣고 마음껏(?) 놀러다닌다는 것이 진정한 자유는 아니었다. 여전히 맞지 않는 대학 공부를 억지로 해야 하고, 알바를 해야 하고, 스펙을 위해 공모전이나 자격증을 연구하고 준비하느라 머리가 무거웠다.(심지어 머리가 무거웠을 뿐 스펙을 엄청나게 쌓은 것도 아니다!그냥 머리만 무거웠다.)  

그래서 빨리 취직해서 월급을 받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좀 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상상했다. 사실 이제와 보니, 그런저런거 아무것도 신경 안쓰고 다 때려치고 그냥 내 마음대로 일이년 정도 살수도 있었을 텐데. 여전히 나는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내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일까봐 불안했다. 일이년 놀겠다고 부모님 설득하기에 앞서 나 자신조차 설득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감도 없었고, 용기도 없었다. 


취직하고 나면, 무언가가 뚜렷해지지 않을까. 그 다음에는 정말 내 멋대로 살 기회가 오지 않을까. 그리고 운좋게 취직이 되고 회사원 일이년차가 되고 나니, 내 손에 쥐어진건 자유는커녕 지금까지의 삶과 다를 바 없는 내내 꽉 짜여진 평일 근무, 그리고 결혼, 출산. 

결혼하고 애 낳으면 어떻게 내 맘대로 살아?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 애 다 키우고 은퇴하면 그때가서 자유롭게 살겠지. 그런데 요즘은 은퇴하고 나서도 자식 결혼 걱정, 노후 걱정에 불안해하면서 살던데. 

아 그렇구나. 이렇게 미루고 미루다가 나는 이렇게 죽을때까지 나는 나 하고싶은 대로 한번 못살아보고 죽는 거구나.   




내 맘대로 활개 한번 못쳐보고 죽는 삶. 그것이 내가 살아온 길이었고 앞으로 살아갈 길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나는 좌절하고 절망했다. 아직까지도 그때의 감정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희망을 잃으면 사람이 죽는다는 말이 맞나보다. 그때까지 나는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었으니까. 조금만 더 이 길로 가면, 그 다음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인생을 살아볼 수도 있을거라는 희망.  왜 나름대로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제와 보니 처음부터 온통 잘못 산것 같은지, 정말 이번 생은 망하고 만건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눈먼 봉사가 되고 나니, 다른 감각들이 쭈볏하게 살아났다. 그 감각들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된다는 걸 아는데, 지금 여기로 가야만 하는 느낌. 그렇게 한국을 떠나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지금껏 내가 갈망해오던 그것은 바로 자유였구나. 내가 내 마음대로 살 자유. 나의 인생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자유. 먼 곳으로 모험을 떠날 자유. 옆에 달려가는 남의 인생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남들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기준에 맞출 필요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할 자유. 


그렇다. 나는 난생 처음 돈 걱정 안하고 이런 자유를 누려 보겠다고 회사다니면서 모은 돈을 가지고 여행 계획도, 파트너도 없이 홀로 이곳에 왔다. 내가 맘에 들면 그냥 여기서 자는 거고, 먹고 싶으면 먹는거고, 안먹고 싶으면 안먹어도 된다! 아무 것도 하기 싫으면 누구에게 보고 할 필요도, 핑계를 찾을 필요도 없이 그냥 안하면 된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그래, 내가 쟁취했다고 말하고 싶은) 자유가 너무 복에 겨워 씰룩쌜룩 엉덩이춤을 추고 어쩔줄 모르는데, 막상 두팔 벌리고 나는 자유다!!와하하하하 라고 외치고 나니, 근데 이제 뭐하냐.




산 밑 마을까지 뭉게뭉게 내려온 구름



예전에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노예들이 자유롭게 풀려나면 막상 어디로 갈지 몰라 그대로 거기서 이제는 월급 받으면서 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코끼리를 어렸을 때부터 묶어 키우면, 자라서도 그냥 그대로 묶여 있는다고. 새장에 갇혀있던 새를 자유롭게 날아가도록 문을 열어도 못날아 간다고. 막상 나는 그렇게 내가 고대하던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는데, 이제 이 자유를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어떻게 혼자 뭘하고 살아야 하는지, 나는 이제껏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고 배운적도 없었다. 자취를 한다고 해도 항상 멀지 않은 곳에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고, 지금 할일이 없다고 해도 며칠 후면 학교를 가야 한다든지 학원을 가야 한다든지 출근을 해야 하는 그런 할 일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아는 사람도 없고, 언제까지건 할일도 없다. 내가 어딜 가야겠다, 하고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나랑 어디 가자고 나를 데리고 갈 사람도 없고, 내가 뭘 해먹어야겠다, 하지 않으면 누가 밥 먹으라고 해주는 사람도 없다. 인터넷도 어디 까페 가야 간신히 조금 되고, 말도 안통하고, 바글바글한 시내랑 떨어진 외딴 동네. 




자유도 자유롭게 살아본 사람이나 누릴줄 안다고, 나는 이제야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다. 스스로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법을.  동네를 어슬렁 거리고 괜히 헤매고 돌아다니는(산책 이라는 것!) 법을. 괜찮은 채소 가게를 발견하고, 야채를 사다가 손질하고 냄비 밥을 지어 맛있는 한끼를 혼자 해먹는 법. 낯선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법. 하루를 무엇인가 특별한 일 -근처에 있는 티벳 사원을 가 본다든지, 시장 구경을 한다든지, 명상 수업을 발견해서 하루 해 본다든지, 저번에 지나가면서 본 까페에 가본다든지 하는 것 - 로 채우는 것.  


지금껏 무언가 멀리 가서 아주 진귀한 어떤 경험을 해야만 특별한 일인줄만 알았는데, 사실 그런 일이 아니라도 무채색의 일상에서 내가 소소하게 색칠하는 무엇이든, 아주 특별한 일이 될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혼자, 집밖으로 나서지 않는 이상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비가 쏟아지고, 또 개고, 구름이 산마루로 내려와 마을을 뒤덮고, 나는 비가 오는 날이라 밖에 나가지 않고 발코니에 앉아 하루종일 책을 읽기로 한다. 부엌으로 내려가 냄비 가득 차를 끓여 향기로운 차 내음을 음~하고 음미하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주먹만한 나방이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더니

 뜨거운 김에 휩쓸려 냄비 속으로 풍덩 빠졌다. 

이런 젠장. 또 물끓여야 하잖아! 물끓이고 또 기다리는 시간 아깝게! 



아니다. 나는 이제 물끓이는 그 잠깐의 시간 정도는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내가 오분 더 부엌에 있는다고 해서 차 마실 시간이 오분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쉬는 시간이 오분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니까, 이제 그정도의 시간은 자유롭게 쓸 수 있어! 

그러고 보니 내가 바쁘든 어쨌든, 이렇게  차를 끓일 오분 정도는 항상 시간을 낼 수 있었을텐데.


어쩌면 나는 지금껏 자유가 아니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정한 자유로운 사람은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모모와 시간 도둑들이 생각난다. 

시간을 저축해야 한다며 사람들에게서 삶을 즐기는 여유를 빼앗아간 회색 신사들. 

다시 차를 끓여서 모모 이야기를 읽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인도에서 만난 티베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