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아그라]
꼬리꼬리한 발냄새를 풍기며 후덥지간한 델리 공항 구석에서 분노의 일기를 썼다.
공항 라운지에서 내 pp카드로 새벽 내내 식사 하면서 와이파이 쓰며 우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내가 멍청하게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을 하여 이모양 이꼴이 난거다.
원래 계획은 뱅갈루루에서 델리 공항에 밤늦게 도착해 여기서 기다리다가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서 아그라가는 기차를 바로 타는 거였다. 내려서 사실 공항 라운지도 탑승할 때만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기대도 안했었는데 도착 후에도 라운지를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 바로 라운지로 가면 될걸, 뭣 모르고 밖으로 짐을 끌고 나왔다. 델리 공항은 밤이 깊었는데도 사람들로 바글바글 하다.
너무 사람 많다, 안에 들어가야지 하고 뒤 도는 순간, 비행기 표 없어? 없으면 못들어가 하고 막혔다.
엥? 공항에 못들어간다굽쇼??
테러 위험따위는 겪어보지 못한 한국에서 온 위험불감증인 나는 대체 왜 공항에 못들어가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운지는 커녕, 공항 안에라도 들어가게 해달라고...... 밖에서 지금 이 많은 사람들과 바닥에 널부러져서 노숙해야 하는거야? 덥고, 위험한(?) 이 상황에?
한시간 동안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배낭을 메고 공항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왔다갔다 빙빙 돌았다. 당연히 아무도 나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고,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하필 8월 5일 인도 독립기념일이 가까워져 델리 공항 경비가 엄청나게 삼엄했다. 평소보다 두세배는 심한것 같았다.
아니 왜 또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미리 택시 승강장 알아보기까지 한다고 밖에 나온거야 난? 사실 예전에 시드니에서 공항 안에서 노숙하다가 공항 문잠그던 기억이 나서 새벽에 델리 공항에 갇혀서 밖에 못나갈까봐 조금 불안했다. 문을 잠그기는 커녕 델리 공항은 완전 불야성이다 불야성.
공항이라는 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 할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나오면 못들어간다는 걸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한국이 참 안전하고 자유로운 나라로구나.
차라리 라운지가 있다는 걸 몰랐더라면 그래 원래 이렇게 노숙하는 거지 하고 별 생각없이 받아들였을 텐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게도 내가 가질 수 있었는데 바보같은 실수로 놓쳤다는 걸 알고 나니 더 화가 치솟는다. 내 자신에게! 한발 늦게 문을 두드리는데, 내가 놓친 기회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건 없고 무력하게 잘못된 선택을 한 자신을 책망하며 후회할 수밖에 없는 이 기분.
눈물이 날정도로 서럽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을 곱씹으며 후회해 봤자, 변하는 건 없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 아픈 마음을 안고 뼈저린 교훈(공항 밖으로 함부로 나가지 맙시다!)을 얻고, 어쨌든 빨리 다음 차선책을 찾아낼 수 밖에.
어찌어찌 공항 안은 아니더라도 공항 구석지에서 배웅하러 온 사람들을 위한 실내 공간이 있어 거기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나마 실외가 아니다.
꾸벅꾸벅 졸며 버티다가 기차역으로 택시 타고 가서 아그라행 기차 탑승까지 해냈다! 첫 SL(슬리핑 기차) 체험이다. 2층으로 기어 올라갔는데 새벽이고 너무 피곤해서 무슨 정신으로 올라갔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역 놓칠까봐 대충 알람 맞춰놓고 잤는데 갑자기 쎄한 기분에 번쩍 일어나서 여기 아그라에요? 했더니 아그라란다. 오마이갓.
허둥지둥 부랴부랴 내려서 꼬질한 얼굴로 릭샤를 잡는데 또 바가지를 씌우고 흥정을 시작한다. 지겹다 지겨워 이놈의 흥정.
어찌됐든 릭샤기사와 흥정해서 릭샤+숙소를 함께 예약했다. 한국인도 많이 태웠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냥 피곤해서 대충 대꾸해주고 숙소가 괜찮기만을 바랐다.
숙소는 시설은 별로였지만(하긴 인도에서 저렴한 숙소에 무슨 시설을 기대하겠는가...) 정원은 예뻤다. 조금 쉬다가 대충 세수하고 두건만 둘러쓰고 타지마할로 출발했다.
이놈의 타지마할 보려고 내가 고생 고생 했지!!
흰 색 건물을 상상했는데 왜 붉은 문?
이 문을 통과 하면 눈부시게 하얀 아름다운 건물이 등장한다.
사실 너무나 유명한 관광지라 그렇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인도까지 왔는데 꼭 보고싶다는 의무감으로 간거다.
사진에서 본 거랑 비슷하겠지 뭐 싶었는데, 직접 타지마할 앞에 서니, 세상에는 실제로 보아야만 하는 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얀 건물과 돔은 정말로 찬란했고, 대체 과거 문명은 어디까지 발전했었던 건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그 옛날이 이런 건축물을 세운 것일까.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스테리로 불릴 만 하다.
알라딘의 궁전이 타지마할에서도 영감을 받았다는데, 알라딘이 나오는 아라비안 나이트는 아랍권 이야기인데, 왜 인도 건물과 비슷한지 궁금하다.
같은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이라 그런가?
타지마할은 이슬람 사원(무덤)이고 그 사원이 부러워서 힌두교에서 델리의 악샤르담 사원을 만들었다는데 아무리 악샤르담이 화려하다고 해도 타지마할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어쩌면 색깔, 색깔이 넘쳐나는 인도에서 눈부시게 하얀 건물을 너무 오랫만에 봐서 더 감명을 받은 건지도 모르겠다. 난 역시 백의 민족 출신인가. 여백의 미와 수묵화를 사랑하는 한국인.
아그라부터 너무 더워서 적응이 안된다. 남인도보다 더 더운것 같다. 날씨가 너무 쨍해서 사진은 눈부시게 나오는데 실제로는 너무 덥다!
사진작가들이 150루피에 사진사 해준다고 하는데 냉정히 거절했다. 그냥 한번 돈내고 찍어볼걸 그랬나 기념으로. 한국 관광객들도 많았다.여전히 타지마할에서 만나는 많은 인도 관광객들이 나에게 사진 찍자고 다가왔다. 대체 왜 나랑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거야. 얼마나 많은 인도 사람들의 핸드폰 속에 나의 사진이 있을지...
타지마할을 산책하고 돌아다니다가 릭샤 아저씨랑 만나기로 한 곳에서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온다. 라씨까지 한잔 사먹었는데도 안온다.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도 연락이 안된다. 미친듯이 왔다갔다 하고 약속장소 근처 릭샤들을 다 돌아보고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연락 해 봐 달라고 하다가 겨우 찾았다. 멀리서 허둥지둥 오는데 진짜 열받았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서 쉬기로 했는데 숙소로 가기 전 점심을 먹으러 데려다준다고 하는 거다. 인도 음식점이었는데 온갖 릭샤꾼들이 관광객을 다 데려오는 곳인 것 같았다. 외국인이 많았다. 대강 인도식 밥 먹고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방갈로르에서 기차타고 올라오면서 화장실을 너무 참았는지 방광염에 걸린 것 같다. 피곤하고 면역력도 떨어진 듯하다. 여행할 때는 그저 건강이 최고다.
타지마할 말고 아그라에서는 릭샤타고 돌아다니면서 딱히 구경할 것도 마음도 없고 빨리 숙소로 데려다 주라고했더니 나보고 쇼핑 가자고 하면서 기념품 가게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나의 표정은 점점 더 불쾌해져 갔다. 인도 여행중 처음으로 아그라에서 혼자 돌아다니는데 그러다 보니 이놈의 릭샤꾼이 붙어가지고 골치가 아파지네. 친절하게 대했더니 사람이 더 만만한거지. 가자고 했더니 이번에는 대리석 가게에 데려간다. 정말 표정이 안좋아서 숙소로 지금 당장 가자고 화를 버럭 냈다.
숙소로 돌아오니 일하는 아저씨가 빨래를 해다 줬다. 고맙다고 팁을 줬더니 나에게 노트에 한마디 써주라고 고이 간직하는 노트를 내민다. 그 노트에는 온갖 나라 사람들이 한마디씩 적어놓은 인사말이 있다. 나도 한국어로 고맙다고 한마디 적어줬다. 이 아저씨가 세계여행을 하는 방법은 세계 각지에서 온 손님들의 방명록을 모으는 것인것 같다. 주인장들보다 이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친절하다.
저녁에 릭샤아저씨가 다시 슬그머니 와서 타지마할 노을 보러 가자고 했다.
타지마할 남문쪽에 레스토랑, 루프탑 등이 몰려있다.
루프탑에서 그렇게 한참이나 타지마할을 바라보았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타지마할과 후덥지근하고 꼬질꼬질하고 외롭고 텁텁한 냄새가 나는 현실이 뒤섞였다. 여행은 그런 것인가.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것이고, 현실은 상상만큼 완벽하지 못하다는 걸 깨닫고, 반대로 상상도 못했던 경험을 하는 것.
대 자연을 보며 느꼈던 경외와 찬탄의 마음만큼은 아니지만 위대한 건축물-타지마할을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받았다. 밀라도 대성당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인간의 능력과 예술성에 찬탄할 수밖에 없는 감정. 두번이나 기차표 취소했다 다시 예매했다 하면서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다만 다시 꼭 오고 싶은 곳이라고는 말 할 순 없다. 나는 또 다른 세계 불가사의를 찾아 가느라 바쁠테니.
이렇게 아그라는 하루만에 지나가고 바로 바라나시로 넘어간다. 아그라에서는 릭샤 아저씨랑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여행자들은 어쩌다 보니 하나도 못만났다.
며칠 머무르는 바라나시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또 만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