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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Jan 24. 2022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2021.12월 넷째주]

스페인에서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고 네덜란드로 돌아오니 참 분위기기 칙칙하게 느껴졌다.

4개월 있었다고 그새 '익숙해서 지루한' 평범한 곳이 되어버린 것일까?

무엇보다 회색빛 서늘한 겨울 날씨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 그리고 full lock down으로 인한 거리의 한산함이 우울함을 더해 주는 듯 하다.

돌아오자마자 다시 가고 싶네, 남부로!

그래서 북유럽 사람들이 12월부터 2월까지 짐싸서 남쪽으로 여행을 가는가보다.



하지만 흥분되는 소식은, 거의 4년간 만나지 못했던 텍사스 친구 J가 드디어 유럽에 온다는 것이다.

J의 아빠쪽 가족들이 독일에 있는데, 친척들을 방문하는 겸 옆 동네인 네덜란드에도 와서 새해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

나의 네덜란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L과 J와 나는 4년전 뉴질랜드에서 함께 일하면서 만났는데 그 중에서도 죽이 잘 맞는 친구들이어서 헤어져도 변함없이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다.

L은 한국에서 나를 만난적도, 텍사스에서 J를 만난적도 있지만 우리 셋이 이렇게 모이기는 처음이다.

항상 우리 다시 만나야 한다고, 셋이 모여야 한다고, 뉴질랜드에서 서로에게 이별을 고할 때부터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는 이야기였지만

각자의 사정과, 커리어와, 그리고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L네 집에 며칠 있다가 J와 L이 12월 29일 저녁에 드디어 틸벅으로 방문했다.

4년만에 다시 만났어도 엊그제 만난것처럼 다들 변하지 않았고,

락다운으로 밖에 나가지 못해도 우리 집에서 셋이 와인 마시면서 수다만 떨어도 좋았다.

뉴질랜드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틸벅 곳곳을 산책하면서 나름 '길거리 음식'이라고 간식을 사 먹었다.

다행히 lock down이지만 몇몇 작은 테이크아웃 가게들은 열었다.

신년이면 먹어야 하는 호떡믹스 비슷한 올리볼렌.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본 돈 내고 햄버거 직접 꺼내먹는 가게.

코시국에 한국에 도입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마요네즈 찍어먹는 네덜란드식 감자튀김.



감회가 새롭다.

4년 전, 우리가 미래에 틸벅에서 만나리라고 점괘를 받았더라면

틸벅이 어디나며 헛소리라고 낄낄대고 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 과거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 곳에 우리가 있다.

L은 지중해에서 요트타다가 아이슬란드로 갔다가 네덜란드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J는 집으로 돌아가 텍사스에서 까페 사업 열심히 하다가 팔고 갑자기 항공사에 취직했다.

나는 한국에서 휴무도 없이 영어강사 하다가 석사 유학을 시작했다.


아직도 J는 뉴질랜드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 때를 그리워하면서 다시 돌아가서 일년살이만 하자고 한다.

나도, L도 마음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 행복했던 시기는 이미 지나간 과거고,

현실적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을 뿐더러

설사 다시 돌아간다해도 예전과 같을 수는 없을거라고.

당시 떠날 때는 각자의 이유가 있어서,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 우리를 떠나고 싶게 만들었던 답답한 감정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 몇년이 지나 돌아보니 그런 감정들은 걸러지고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만 남아 우리를 아쉽게, 후회하게 만든다.



좀 더 미친듯이 놀 걸.

좀 더 많이 같이 시간을 보낼 걸.

그래서 우리가 지금 추억할 거리들이 더 많도록.

돌아보니 즐겁고 행복하게 보낼 시간도 부족했는데

왜 그 시간마저 우울해하고 고민한답시고 방에서 혼자 보내곤 했을까.


하긴, 뉴질랜드 뿐만이 아니다.

내가 머물렀던 모든 곳을 떠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쉽고, 돌아보면 더 잘 지냈을 수 있었을 것 같고.

그렇다고 해도 과거를 곱씹어봤자 한번 지나간 시간을 돌아오지 않는다.

몇번의 떠남과 정착을 반복하면서 내가 배운 것은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시간조차 현재를 보내는데 쓰기 너무 아깝다는 것이다!

J와 L과 지금 현재,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만드는데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꿈만같은 며칠은 금세 사라지고 말테니까.

보드게임을 하고 새로 나온 영화 몇편 보니 시간은 참 빨리 간다. 



대망의 31일 저녁, 우리 셰어하우스에서 크리스마스 겸 신년 행사로 디너파티를 열어 다같이 배 터지게 먹었다. 각자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어 헤어지고 우리 셋은 11시 50분부터 샴페인을 들고 틸벅 시내로 나갔다.

언제부턴가 네덜란드는 신년 불꽃놀이가 문화가 되어

12월부터 밤마다 간간히 뻥 뻥 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연말이 가까워질 수록 전쟁이 나는 것마냥 폭죽소리가 나고

12월 31일 카운트다운이 끝남과 동시에 해피뉴이어!하면서 경쟁적으로 폭죽을 터트린다.

틸벅에서도 곳곳에서 비싸보이는 폭죽들이 여기저기서 거의 20분 넘게 터져댔고

시내는 진짜 전쟁난것 마냥 연기로 뒤덮였다.

코로나 시국이라 기대하지 않는게 낫지 않나 했는데

오히려 코로나 시국이라 사람들이 심심해서 다른 때보다 더 죽자고 터트려댔다.(라고 더치인 L이 말했다)




틸벅이 벨기에랑 가까워서 오히려 암스테르담보다 폭죽을 더 많이 터트렸다고 한다.

더치들이 얼마나 다들 벨기에로 넘어가서 폭죽을 사재기하는지

벨기에에서는 폭죽이 동나고 코로나 시기에 그만 넘어와서 사라고 뉴스까지 냈다.

신년 폭죽놀이 관련해서 환경문제와 동물복지문제들이 제기되고 있어

요즘에 법으로 금지해야 되네 마네 하지만 여전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축제같은 문화라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가끔 우리 집 앞에서 폭죽 터질 때만 빼고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지 않긴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12월 부터 1월까지 이어지는 폭죽 소리에 골머리를 썩기도 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1월 1일을 해돋이를 보면서 힘차게 맞이하는 것보다

12월 31일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정작 2022년 1월 1일에는은 거의 12시까지 거리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새해부터 늦잠잔다고 혼날텐데

여기는 다들 새해부터 늦잠자고 숙취에 쩔어서 시작하네.


어찌됐든 드디어 공식적으로 2022년이다.

여전히 코로나는 지속되고 있지만,

2021년의 마무리는 기대했던 대로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졌다.

2022년의 마무리도 기대하는 대로, 아니 기대를 넘어서는 어디선가,

예측할 수 없는 누군가와 함께 하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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