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즈엘 공의 파티에 참석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동그란 테이블에 불러 앉아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던 도중 홀리가 세르시우스에게 질문했다. 황실 기사인 자신이 잘 모를 만큼 먼 지방의 사람이 어떻게 공작 가문의 하즈엘을 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에 뭐 어쩌다가 인연이 닿은 사람이죠.”
시링크스가 별생각 없이 홀리의 질문에 대답했다. 레스휘나는 힘차게 시링크스의 발을 꾸욱 밟더니 상냥하게 웃으면서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분은 소녀의 생명의 은인과도 같으신 분입니다. 위기에 처한 저를 구해주시면서 이렇게 인연이 닿아… 호호호”
홀리는 "아 그렇습니까?"라고 대답한 후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도 비밀 투성이 인 데다가, 눈에 뻔히 보이도록 숨기려고 하는 그들의 행동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한 원인이었다. 홀리가 입을 다문 뒤로부터 아침 식사가 다 끝날 때 까지는 그릇이 달그락 거리는 정도의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식사가 다 끝나자 빈 그릇이 모두 치워지고 대신 쿠키가 가득 담긴 바구니 하나와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찻잔 네 개가 테이블 위를 장식했다.
“하아 그나저나 걱정이네. 어제 그 녀석 같은 놈이 또 나타난다면…….”
세르시우스가 시링크스의 뻗친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어 주고 있는 레스휘나를 흘깃 쳐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어제저녁 홀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따뜻한 저녁식사는 물론 이 마을 전체가 지도에서 깡그리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레스휘나가 화가 날 때 혹은 짜증이 날 때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곤 했다. 드래곤이니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해야 한다기보다는 드래곤이기에 사소한 것도 심판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물론 그런 그녀를 어르고 달래는 역할은 모조리 세르시우스의 것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동행해도 괜찮겠습니까?”
홀리는 차를 한 모금 음미하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세르시우스에게 물었다. 세르시우스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는 임무를 마치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어차피 하즈엘 공의 저택은 황궁으로 가는 길에 있고, 그 먼 길을 가는 동안 어제와 같은 소란이 또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가는 길 동안 엄호해 드리겠습니다.”
‘엄호’라는 단어에 시링크스가 킬킬거리면서 웃었다. 그러나 그는 세르시우스의 고민스러운 표정을 보고 그는 금세 웃는 것을 멈추었다.
“저어. 엄호해 주신다면 감사하지만, 저희 남매가 워낙 별나서요…….”
세르시우스는 뒷말을 흐렸다. 한 달여간을 같이 다니다 보면 그들의 정체를 분명 그녀가 알아챌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뭐 어때 큰오빠.”
레스휘나가 후식으로 나온 쿠키를 반으로 톡 부러뜨리면서 시큰둥하게 말을 꺼냈다.
“아까도 걱정했었잖아.”
‘그건 너 때문이잖아’라고 생각하며 세르시우스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지만 이내 가라 앉혔다. 어쨌든 레스휘나가 ‘괜찮다.’는 의미를 말했으니 모든 결정은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르시우스는 홀리와 레스휘나, 시링크스를 차례로 돌아보고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잠시 부탁드릴까요?”
홀리는 그에 대답 대신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올해 여름은 진짜 긴 거 같아.”
시링크스는 투덜투덜 불평을 토로했다. 그는 하얀색 레이스가 나풀거리는 양산의 좁은 그늘 안에서 셔츠의 단추를 반쯤 풀어놓고 손으로 정신없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양산의 그늘 아래에는 레스휘나도 있었는데 그녀는 우아하게 역시나 하얀 부채로 부채질을 하면서 애써 앞서가는 사람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앞에는 세르시우스와 홀리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세르시우스는 더위를 잘 타지 않는지 땀도 잘 흘리지 않고 있었지만, 문제는 홀리였다. 홀리가 입고 있는 ‘검은 수리’의 제복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벗지 않았다. 아니 벗지 못했다. 그녀는 황실 기사단이기 때문에 황제의 허락 없이는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옷 하나도 제대로 벗지 못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검의 또한 항상 달고 다녀야 하는데, 이 역시 무게가 만만치 않아서 더욱 힘에 부치게 만들었다. 시링크스는 ‘역시 기사야.’라면서 그녀의 강인한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저어- 홀리 경? 조금만 쉬었다 갈까요?”
세르시우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홀리는 애써 괜찮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새빨갛게 익은 얼굴에 담은 ‘괜찮은 표정’은 바라보는 이를 정말 안타깝게 하는 ‘괜찮은 표정’이었다. 세르시우스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시링크스가 갑자기 ‘꽈당’하고 큰 소리를 내면서 넘어졌다. 시링크스가 고개를 홱 돌려서 레스휘나에게 뭔가 말하려고 하자 레스휘나는 빠른 어조로 그의 말을 막았다.
“이크. 오라버님 발을 조심하셔야죠. 어머, 이렇게 다쳤으니 무리해서 행군도 힘들겠네요. 조금만 쉬었다 가요.”
레스휘나가 미소를 지으며 시링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링크스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를 무섭게 째려보기 시작했다.
“이 더위 속에 계속 걷게 하는 건 불쌍하잖아.”
레스휘나가 손가락으로 살짝 홀리를 가리키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시링크스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늦여름의 무더위가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햇빛이 강한 정오 무렵 결국 휴식을 맞이했다. 그들은 가까이 있던 가게에 들려 네 사람은 말없이 주스를 꼴깍꼴깍 삼키기만 했다.
“아아 생일파티 같은 거. 가지 말까 그냥.”
시링크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레스휘나가 손가락을 접었다가 폈다가 하면서 “근성 없긴.”하고 쏘아붙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링크스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지체되는 것 같아서요.”
홀리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아뇨. 뭐 홀리 경만 더웠나요? 같이 체력을 좀 회복하고 가는 거죠.”
세르시우스가 넉살 좋게 웃었다.
“그냥 확 날아가 버리고 싶다.”
시링크스가 주스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하하 그런 게 가능하겠어?”
세르시우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하느님! 제발 해 좀 어떻게 해줘요!”
시링크스는 입에 손을 모아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자신이 짐이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홀리는 시링크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다소 밝은 미소를 찾았다. 레스휘나는 ‘절대 저 사람은 제 오빠가 아니에요.’라는 표정으로 남은 주스를 다 마시고 딴 데로 시선을 옮겼다. 세르시우스는 크게 웃고만 있었다.
“시스. 너 평생 저주할 거야.”
레스휘나의 낮고 어두운 목소리가 시링크스의 귓가를 맴돌았다. 신기하게도 시링크스의 기도(?)가 효력이 있었는지 두터운 구름이 몰려와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었다. 그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구름은 어느새 비를 몰고 와 여름 비를 잔뜩 뿌리고 있었다. 덕분에 시원해지기는 했지만 대신 일행은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후후 레스. 이 비는 말이지, 기화하면서 열을 흡수하여 땅을 시원…….”
“조용히 안 할래?”
시링크스는 무언가 전문적인 용어를 늘어놓아 레스휘나를 달래줄 생각이었지만, 레스휘나는 그의 시도에 콧방귀도 뀌지 않고 냉담하게 반응했다. 시링크스는 금세 우울한 표정을 짓고 처량하게 한 손을 비가 내리고 있는 창밖으로 뻗었다.
“소나기인 것 같으니 조금 후면 그칠 거예요.”
홀리는 창밖을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좋을 텐데요.”
세르시우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창문에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그는 성격상 약속시간에 상당히 철저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자꾸 발이 묶이게 되면 결국 빠듯한 예상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할 것이 뻔해서 조금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하즈엘의 일방적인 연락이었기 때문에 늦어도 그가 그리 불평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세르시우스의 성격상 ‘늦는다.’는 것은 역시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다. 하지만 땅 밖은 이미 질척 질척하게 젖어버린 데다가 구름이 두꺼워 햇볕이 잘 들지 않아 벌써 날이 어두워진 것 같았다. 이 상태로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날이 저물 것 같아서 그는 약간 속이 타는 것같이 느껴졌다.
“앗! 홀리 경!!”
비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착잡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갑작스럽게 깨는 누군가가 있었다. 창 밖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네 사람은 전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란색이 짙게 도는 청록색의 구불구불한 머리를 헐렁하게 묶은 건장한 청년이 홀리에게 힘껏 아는 척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햇빛에 적당히 그을린 갈색의 건강한 피부에 홀리 경과 같은 진한 남색의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조금 차이가 있다면 그의 체격이 홀리에 비해 상당히 크고 단단하다는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단속한 홀리와는 달리 제복을 멋대로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제복에도 황금색 독수리 단추와 황실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홀리 경과 같은 제국 기사 ‘검은 수리’ 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홀리와는 달리 훨씬 자유롭고 경박했다. 그에게도 기다란 검이 한 자루 있었지만, 그의 훤칠한 키 때문인지 검이라고 해도 장난감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는 연신 싱글싱글 웃으면서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