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우와아- 역시 도시는 시골 촌구석이랑 달라도 한참은 달라!”
레스휘나가 기분이 좋은 듯 옷걸이들의 사이를 누비며 말했다. 시링크스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얼굴엔 불만이 철철 흘러넘쳤다. 레스휘나는 거울 앞에 서서 이 옷 저 옷을 갖다 대면서 옷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시스, 이거 나 잘 어울려? 아니 이게 괜찮을까?”
레스휘나가 양손에 들고 있는 옷들을 그에게 보이며 물었다.
“레스 아가씨께서 좋은 걸로 고르세요. 저는 그런 것에 문외한이거든요.”
시링크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레스휘나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말했다.
“어머머, 시스. 그렇게 예쁜 옷을 입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믿을 것 같아? 얼른 골라줘~”
“잠깐, 이 옷은…….”
시링크스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레스휘나가 그를 지나쳐가듯 구둣발로 사정없이 그의 발등을 내리찍었기 때문이었다.
“아아, 역시 이게 더 괜찮으려나? 음, 역시 이게 좋겠어.”
그녀는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시링크스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시스 가자. 이거 살래.”
“네에.”
시링크스는 쓴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치렁치렁한 드레스가 움직이기에 상당히 힘들었지만 그는 불평을 할 수 조차 없었다.
“저기, 레스휘나.”
거리로 나오기 위해 양산을 펴면서 시링크스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레스휘나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시링크스를 쳐다보았다.
“아가씨라고 불러.”
“아, 예. 아가씨.”
“응. 왜?”
“아까부터 생각한 거지만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은데 역시 안 어울리…….”
“하하하.”
레스휘나는 시링크스의 말을 끊고 경쾌하게 웃었다. 시링크스는 자꾸만 주변을 둘러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냐 아냐, 시스. 시스가 너무너무 예뻐서 그런 거야.”
레스휘나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링크스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스휘나는 그 표정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그의 볼을 주욱 꼬집어 당기고는 활기차게 거리로 걸어 나갔다.
“잠깐, 레스……. 아니 아가씨!!”
시링크스는 그녀가 갑작스럽게 꼬집어 얼얼한 뺨을 쓰다듬으며 레스휘나를 좇아 뛰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잠시 멈칫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스휘나가 인파 사이로 사라져 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시링크스와 레스휘나가 총총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그들이 서 있었던 옷가게의 옆 작은 골목에서 키가 큰 남자가 한 명 걸어 나왔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역시 인파 사이에 파묻혔다.
“홀리 경, 점심식사 같이 하실래요?”
레스휘나가 시링크스와 함께 나갔으니 홀리가 혼자 있을 거라 생각한 세르시우스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노크하며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 열린 문틈사이로 고개를 살짝 집어넣었다. 하지만 방 안은 텅 비어있었다.
“어라, 어딜 가신 거지?”
세르시우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홀리의 침대 위에는 그녀가 보던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 한 권 놓여있었다. 적포도주처럼 어두운 붉은색에 단단한 재질의 표지로 싸인 책이지만 책의 그 어디에도 책의 제목이나 내용을 표시하는 글도, 그림도 없는 책이었다. 세르시우스는 호기심에 그 책을 살짝 집어 들었다. 오래된 책인지 종이 끝이 노랗게 바래 있었다. 펼쳐서 주르르 훑어보니 손으로 직접 쓴 것인지 글씨의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세르시우스는 탁 소리가 나게 책을 접었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책의 제일 앞장을 폈다. 첫 페이지는 굵고 곧은 글씨가 단 한 줄밖에 없었다.
"티이아의 역사."
세르시우스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뭐야 역사책인가.’
그는 그 책에 대한 흥미를 금세 잃었다. 그는 나지막이 하품을 하며 책을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두려고 했다. 건성건성 페이지들을 넘기던 도중 그는 어떤 페이지에 손가락이 멈춰버렸다.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책에 쓰인 단어를 봤다.
‘귀천’
그 페이지에는 오직 그 단어만 쓰여 있었다. 무언가 덧붙일 이야기가 있는지 그 아래는 공백이었다. 무언가 썼다가 지운 흔적도 남아있었다. 그는 그 페이지를 펼친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걸 알고 있는 거지?”
세르시우스는 단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엔 당혹감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이건 인간이 쓴 게 아닌가?”
그는 그 페이지로부터 뒤로 몇 장을 더 넘겨보았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없었다.
“말도 안 돼."
그는 저도 모르게 책을 덮었다. 지금은 그 책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일단 그 방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빙글 몸을 돌렸다가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호, 홀리 경? 언제부터 거기에?”
햇빛이 잘 닿지 않는 곳에 홀리가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르시우스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긴장을 풀려고 마음먹었다. 홀리는 차가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전 돌아왔습니다. 그보다 그 책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녀가 한 걸음 다가오자 세르시우스는 뭔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손을 홰홰 내저으며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그냥 좀 손으로 직접 쓴 책이라서 신기해서요.”
홀리는 그를 잠시 지긋이 쳐다보다가 세르시우스의 근처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허락 없이 건드려서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세르시우스는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홀리는 허둥대는 그의 모습을 흘깃 쳐다보았다. 홀리는 천천히 책을 펴 세르시우스가 보고 놀랐던 그 페이지를 펼쳤다.
“세르시우스님.”
“예?”
세르시우스가 홀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친절함이 묻어나는 평소와 달리 기사답게 딱딱하고 곧은 어조로 그를 불렀다. 세르시우스는 순간 그녀와 자신들과의 거리감을 새삼 느꼈다. 홀리는 시선을 책의 페이지에서 세르시우스의 얼굴로 옮겼다. 세르시우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홀리는 ‘귀천’이라고 쓰인 페이지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저는 지금까지 이것에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것에 대하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
세르시우스는 그녀의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일부러 그녀를 외면하며 곤란해하는 세르시우스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홀리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 책은 제 조상대부터 이어내려 오던 책입니다. 몇 대를 거치며 저희 집안 내력을 비롯한 이 나라의 여러 가지 일들이 쓰여 있지요. 다른 역사책과 비교해도 그다지 손실이 없을 만큼 내용이 충실한 편입니다만, 오직 이 페이지만 비어있지요.”
그녀의 손가락은 누렇게 색이 바랜, 그리고 더없이 낡아 손끝이 닿아도 부스러지는 가장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세르시우스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앞 페이지에 쓰여 있으니 오래된 것이라는 건 알겠지만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아마 그분들도 찾아오셨을 겁니다. 저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분들도 저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직 말이죠.”
홀리가 말을 멈추자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홀리는 세르시우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세르시우스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밖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닫힌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귓가에 울렸다. 세르시우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
침묵이 이어졌다. 세르시우스와 홀리는 서로를 뚫어지도록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없었던 일로 하지요.”
홀리가 먼저 세르시우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눈을 낮게 내리깔아 예의 그 책을 다시 쳐다보았다. 세르시우스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홀리는 그가 방을 떠나가는 모습을 쳐다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단어를 제외하고는 깨끗한 종이를 손끝으로 훑으며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아, 역시 노동 후 주스 한잔의 여유란.”
레스휘나가 밝게 웃으며 시링크스에게 오렌지주스가 잔뜩 담긴 크리스털 잔을 건네주었다. 시링크스는 그것을 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어머, 시스. 그렇게 예의 없이 마시지 마. 교양 없게.”
레스휘나가 시링크스에게 충고했다.
“신경 끄셔. 어떻게 마시는지는 상관없잖아.”
시링크스가 대꾸했다. 레스휘나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것은 그녀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패턴 2였다. 시링크스는 잠시 그녀의 제스처에 침묵했다.
“더워서 안 되겠어. 시스, 한 잔 더 사와.”
“그냥 그 옷을 벗어요, 아가씨.”
겹겹이 껴입고 덥다고 하는 레스휘나가 이해가 가지 않는 시링크스가 불만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했다. 시링크스는 더위 아랫사람들과 부딪히며 그녀를 위해 주스를 사러 갈 만큼 그는 착하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무례해. 그냥 사 오란 말이야.”
레스휘나의 패턴 2가 강화되었다. 시링크스는 두 말없이 일어섰다. 그리고 발끝을 조심하면서 차분히 그러나 되도록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가 걷는 모습은 웬만한 아가씨들보다도 나긋나긋해서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레스휘나는 혼자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즐거움은 금세 무료함으로, 무료함은 금세 짜증남으로 바뀌었다.
“늦어.”
레스휘나가 기다리다 지쳐 짜증 난 상태로 주욱 내민 입을 우물우물거렸다. 오렌지를 직접 재배해서 짜오 기라도 하는지, 아니면 오렌지를 한 알 한 알 정성스럽게 씻어내고 있는지, 시링크스는 심부름하러 간 다음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레스휘나는 다리를 꼬고 까딱까딱 거리면서 시링크스가 사라진 곳을 말없이 한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시링크스는 해가 질 무렵까지 그녀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세르시우스가 낮에 혼자 돌아다니면서 구입한 여행물품들을 정비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문이 꽈당 하는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세스 오빠! 시스 여기 있지? 감히 여린 여동생을 두고 도망가다니! 치사해!”
인파에도 불구하고 여관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레스휘나가 외쳤다. 세르시우스는 레스휘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스? 너랑 같이 있지 않았어?”
“뭐?”
레스휘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어렸을 때부터 거짓말에 서툰 세르시우스였기 때문에 레스휘나는 그가 지금 거짓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럼……. 시스는 어디로 간 거야?”
레스휘나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시스를 잃어버렸어?”
세르시우스가 정리하던 물품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레스휘나에게로 다가왔다. 레스휘나는 말을 못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길 못 찾아올 만큼 바보는 아닌데.”
세르시우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레스휘나가 초조한 듯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세르시우스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 그녀의 방에 데려다주었다. 마침 홀리가 있었다.
“홀리 경. 레스 좀 부탁드려요. 저는 시스를 찾아볼게요.”
홀리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르시우스는 인사도 없이 방을 나왔다. 하지만 시링크스를 찾으러 밖으로 뛰어나가는 대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물품들로 어지럽혀진 자신의 침대 대신 맞은편의 시링크스의 침대에 털썩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소리를 중얼중얼거렸다. 물에 잉크가 퍼지듯 그의 몸에서 붉은빛이 아스라이 스며 나왔다.
“마셔요.”
홀리는 레스휘나 앞에 따뜻한 김이 피어나는 우유 한잔을 놓았다.
“고마워요.”
레스휘나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쥐었다. 홀리는 그녀의 옆에 가 앉아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곧 돌아올 거예요. 사람이 많아서 헤매는 것뿐이에요.”
홀리가 레스휘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레스휘나는 뜨거운 우유 컵을 입에 갖다 대었다. 하지만 마시지 못하고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세르시우스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영상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시링크스. 시링크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를 둘러싼 붉은 빛은 한층 더 붉어져서 마치 핏빛이 일렁이듯 했다.
“아!”
세르시우스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가 눈을 뜨는 순간 그와 동시에 그에게서 퍼져 나오던 붉은빛은 사라졌다. 세르시우스는 좀 전에 그의 마법을 통해 본 것을 곰곰이 되새겼다. 분명히 레스휘나와 나갈 때의 그 차림의 시링크스였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시스의 친구일까?'
하지만 친구라면 말없이 사라질 만큼 무책임한 녀석도 아닐뿐더러, 지금은 그의 친구 중 하나인 하즈엘의 생일파티에 가는 중이다. 가던 길을 돌릴 만한 녀석도 아니다. 대체 누구지 그 사람들은? 시링크스는 아직 이 도시 어딘가에 있긴 했다. 하지만 어디인지 몰랐다. 이 큰 도시를 무작정 뒤져봐야 하는 것이다. 일단 레스휘나에게 말해야겠다. 세르시우스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이게 그 계집애야? 키가 꽤 큰데? 정말 귀족이긴 한 거야?”
“하지만 입은 옷 좀 봐. 보통내기가 아니야. 이런 건 귀부인들도 맘먹고 사야 한다고.”
“하하, 네가 옷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겉만 화려한 걸지도 몰라.”
더럽고 컴컴한 좁은 골목에 사내들이 모여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화젯거리 삼아 얘기하는 가운데 입에 재갈을 물리고 팔과 다리가 묶여있는 한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시링크스가 있었다.
“이봐, 지니스. 네가 보기엔 어때?”
그들은 빛이 한줄기도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골목 안을 향해 손짓했다. 지니스라고 불린 사내가 성큼성큼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너저분하게 옷을 입고 수염도 제대로 다듬지 않아 듬성듬성한 데다가 꼬질꼬질하게 때가 낀 사내였다. 그의 두 눈은 어두운 곳임에도 불구하고 맹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담배연기를 훅 내뿜으며 그는 찬찬히 시링크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크게 웃으면서 담배를 다시 빨았다.
“이건 후작부인에게 상납해야겠군.”
“후작부인? 로젠블럼 말인가? 귀족이 아니야?”
“옷은 따로 팔지. 방에 데려가.”
지니스는 다른 사내의 말을 무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사내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의 지시를 따랐다. 그들 중 한 명이 시링크스를 들고 계단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곧 돌아왔는데 그때는 시링크스가 곁에 없었다.
“메리를 부를까? 여자애들은 귀찮게 구니까.”
“필요 없어.”
지니스는 시링크스가 옮겨진 방과 이어진 계단을 성큼성큼 밟으며 대꾸했다. 한 사내가 걱정스러운 듯이 그에게 충고했다.
“여자애들은 시끄럽다고.”
“무슨 사정인진 모르겠지만 사내놈이야.”
지니스는 껄껄 웃으며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남은 사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시링크스는 커다란 소파에 앉아있었다. 아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니스가 시링크스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입에 물린 재갈이 풀리고 나서야 시링크스는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전 그 귀한 귀족도 아니고 여자는 더더욱 아니에요. 제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정말 하늘이 두 쪽 나도 말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랑 비슷한 거 이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집은 아니고 집처럼 지내고 있는 여관에서 늑대 같은 형이랑 여우 같은 여동생이랑 진짜 듬직하고 멋있고 상냥한 홀 아아아니 기사님이 계신단 말이에요. 그래! 기사님이 여길 발견하면 당신들 죽은 목숨이에요 알아? 아니 저 실은 한 달 꼬박 걸려 가야 하는 데 살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생일이거든요? 그냥 가도 빡빡한데 이렇게 시간 지체하면 아까 말씀드렸던 여우 같은 여동생이 꼬리가 아홉 개로 불어나면서 눈이 빨갛게 변해서 당신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이런 짓, 저런 짓을 한단 말이에요. 저는 정말 살고 싶어요. 당신보다 그 여동생이 두려워요. 아니 지금은 당신도 두려워요. 저 좀 살려주세요. 저 이래 봬도 좀 귀한 태생일지도 몰라요. 우리 형 말이죠, 엄마가 물려주신 재산을 모조리 관리하고 있으니까 우리 형한테 날 팔아주든지 해요. 여관 주소라면 얼마든지 알려드릴 테니까요. 우리 형은 착하니까 보복 같은 건 안 할 거예요. 아니하면 어쩔 수 없지만 괜찮아요. 아직 죽일 만큼 누구를 패는 건 못 봤으니까. 여동생만 잘 피해가시면 되거든요.”
시링크스가 숨 한번 제대로 쉬지 않고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자 지니스는 크게 웃었다.
“그래 요점은?”
“절 돌려보내 주세요.”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니스는 담뱃재를 톡톡 털어냈다.
“안됐지만 돌려보내는 것은 안돼.”
“예?”
지니스는 그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저, 새우 못 잡아요.”
“…푸하하하.”
지니스는 다시 폭소를 터트렸다. 시링크스는 불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니스는 그에게 옷으로 보이는 더미를 던졌다. 그리고 그의 손과 발을 결박하고 있는 밧줄을 단도로 끊어버리고 낡고 삐걱대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갈아입어.”
“네?”
시링크스는 자꾸 반문했다.
“그 옷은 따로 팔 거야. 그러니까 갈아입어.”
“갈아입으면 보내주시는 거예요?”
시링크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지니스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럴 거 같냐?”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긴 싫다.”
그는 가볍게 대꾸하고는 입에 담배를 물었다.
“하지만 하나 말하지. 갈아입는 게 안 갈아입는 거보단 좋을 거야.”
시링크스는 불안감과 불만이 반쯤 섞인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옷을 펼쳤다. 자신이 입고 있던 드레스에는 비할 것이 못되지만 꼬질꼬질한 아저씨가 가지고 있기엔 좀 어울리지 않은 좋은 남성복이었다.
“어라?”
시링크스가 신기하다는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뭐가 ‘어라’냐.”
“제가 여자가 아닌 건 어떻게 알았어요?”
시링크스가 물었다. 지니스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꾸했다.
“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거든.”
“흐응-.”
시링크스가 ‘과연’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지니스도 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는 것인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등을 돌려 앉았다.
“그 옷도 네가 말한 그 여동생의 옷인가?”
시링크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지니스는 킬킬거리며 말했다.
“그 여동생 한 번 만나보고 싶군.”
“별로 추천하지 않아요.”
시링크스는 옷을 차곡차곡 개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니스는 뭐가 재밌는지 자꾸 웃었다.
“이젠 가도 돼요?”
“누가 가도 된다고 했나?”
“옷은 갈아입었는데.”
“아, 그럼 이제 갈 곳이 있어.”
지니스가 시링크스의 팔목을 낚아채고 자신이 들어온 쪽이 아닌 다른 쪽에 나있는 문으로 나갔다. 밝은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골목이었다. 조금 걷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마차가 한 대 있었다.
“여어, 지니스. 이번엔 어디인가?”
“로젠블럼 성으로.”
“하하, 큰 거 한건 올렸군.”
지니스와 마부는 익히 알고 있는 사이인 것 같았다. 지니스는 마부와 농담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마차에 올랐다. 귀족들의 마차와 달리 좁은 마차였기 때문에 시링크스와 지니스는 마차 안에서 무릎을 맞대고 마주 앉을 수밖에 없었다. 말을 채찍질하는 소리가 들리고, 곧 마차가 덜컹덜컹 거리면서 인파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지. 난 이 근처에서 알아주는 노예상이야.”
지니스가 뿌연 마차의 유리창 너머로 멍하니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