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이것 참 무방비한 녀석이군.”
시링크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늘어지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지니스는 혀를 끌끌 거렸다. 오랜 시간을 마차의 흔들림에 시달리는 게 힘들기는 하겠지만 팔려가는 입장인데도 저렇게 편하게 잘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니스는 저도 모르게 시링크스의 앞날을 걱정했다.
아침이 왔다. 피곤한 기색으로 잠이든 레스휘나의 옆에서 세르시우스가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밤새 번갈아 주변을 탐색했지만 시링크스를 찾을 수도 없었고, 끝내 스스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피곤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홀리가 말했다.
“제가 한 번 찾아볼게요.”
“아니에요. 제가 한 번 더 돌아볼게요. 제 동생이니까요.”
세르시우스는 레스휘나의 손을 조용히 놓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밤새도록 골목골목 찾아 헤맸지만 시링크스를 찾을 수 없었다. 무작정 여기저기 쳐들어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에 세르시우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여관에 돌아와 레스휘나를 일단 잠재웠다. 홀리에게도 잘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지 않고 그와 함께 시링크스를 기다려 주었다.
“아무래도 납치를 당한 것 같습니다.”
홀리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세르시우스도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의견에 긍정을 표했다.
“제국에 연락하겠습니다.”
세르시우스는 잠시 고민했다.
“아뇨. 하즈엘에게 연락해주십시오.”
홀리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표정을 가다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시링크스가 안내된 곳은 커다란 성이었다. 큰 문을 지나자 미로처럼 여러 갈래의 길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는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아가는 지니스를 보고 시링크스는 ‘그래도 굉장한 사람이구나’ 하고 새삼 그에게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어떤 방문 앞에 우뚝 섰다.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다리는 듯이 잠시 그곳에 서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으음. 길을 잃었네.”
'존경심 취소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앞에 있는 방문을 덜컥 열었다. 그곳은 시스보다 조금 나이가 어려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부터 중년배의 여인까지 다양한 연령의 여성들만 모여있는 방이었다. 그들이 비슷비슷하게 생긴 밋밋한 드레스를 입고, 앞치마를 두른 것으로 보아 그들은 모두 이 성의 고용인인것 같았다.
“실례지만 로젠블럼 후작부인은 어디 계시오?”
그녀들이 하녀임을 알면서도 지니스는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물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선생님.”
한 여자아이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그녀는 친절하게 생긋 웃으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지니스는 시링크스를 흘낏 쳐다보고는 그녀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곧 후작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후작부인은 밝은 금갈색의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중년의 여성으로, 후작부인 답지 않게 수수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래. 저 아이가 자네가 말한 그 아이인가?”
“네.”
그녀는 찬찬히 시링크스를 뜯어보았다.
“귀엽게 생긴 아이구나. 그래 네가 할 줄 아는 것이 있느냐?”
시링크스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바이올린을…… 조금 켤 줄 압니다.”
“그런가. 그럼 그 아이가 심심하지 않겠구나.”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잘 데려왔네, 지니스.”
그리고 그녀는 아까 그 길을 안내해준 어린 여자아이를 손짓으로 불렀다.
“저 아이를 리나에게 데려다주어라.”
아이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명령을 받들었다. 그리고 시링크스에게 따라오라는 듯이 잠시 쳐다보다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시링크스는 후작부인에게 인사하고 그녀를 따라 방을 벗어났다. 그가 안내받은 방은 제일 높은 층에 있는 방이었다.
“이곳에 들어가십시오.”
그를 안내해준 아이는 그 말을 남긴 채 종종걸음으로 어디론 가로 사라졌다. 시링크스는 그 문의 손잡이를 빤히 쳐다보면서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별 수 없지’라고 생각하고는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어두운 복도로 붉은 햇빛이 눈부시도록 쏟아졌다. 그의 키보다 더 큰 창문으로 햇빛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그 창문의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소녀였다. 후작부인보다 조금 더 황금색에 가까운 금갈색 머리카락이 햇빛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겨울호수처럼 푸른 눈을 가늘게 뜨고 시링크스를 쳐다보았다. 시링크스도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뭇결 침대. 이불이 따뜻하다.
“오빠?”
레스휘나가 벌떡 일어났다.
“레스, 일어났니?”
세르시우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시, 시스는……?”
세르시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세르시우스의 몸에서는 붉은빛이 파도가 일렁이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스 오빠, 마법을……?”
레스휘나가 토끼눈을 하고 세르시우스를 쳐다보았다. 레스휘나는 자못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세르시우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붉은 빛은 사라졌다.
“급한 상황이니까 어쩔 수 없지.”
세르시우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레스휘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차분히 쓸어주었다.
“걱정이다. 어제는 여기에 있었는데 오늘은 여기에 없네.”
레스휘나가 세르시우스를 쳐다보았다.
“시스가 이 마을에서 없어졌어. 어제 찾을땐 분명 마을안에 있었는데.”
레스휘나는 헉 하고 잠시 숨을 멈췄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이녀석, 미아가 된건 아닌 것 같고 누가 데려간 것 같아. 그리고 밤새 어디 멀리 이동해버린것도 같고. 그래도 다행히 홀리 경이 도움을 주신다고 했어. 하즈엘에게도 연락을 했다.”
“그래, 다행이다. 아니 아닌가.”
레스휘나는 세르시우스의 손을 뺨에 가만히 갖다 대었다.
“미안해. 미안해.”
세르시우스는 다시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아, 네가 그 아이구나.”
그녀는 반가운 듯이 가볍게 박수를 치곤 그에게 다가왔다. 창가를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명랑한 목소리와 사뿐사뿐한 발걸음에 그녀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시링크스는 그녀가 꽤 가까워지고서야 그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그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에 가느다랗게 말라 가냘퍼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명랑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시, 시스입니다.”
시링크스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반가워, 시스. 이미 들어서 알지도 모르겠지만 난 리나야. 리나 로젠블럼.”
리나라고 이름을 밝힌 소녀는 진심으로 기쁜 듯이 밝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미소를 짓자 햇빛이 한 움큼 들어온 것처럼 방 안이 밝아진 것 같다고 시링크스는 생각했다.
“저, 제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시링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나는 신기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대답해 주었다.
“리나아가씨라고 불러. 다들 그렇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