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커다란 방. 벽을 따라 책장이 들어서 있고, 책장에는 책이 빈틈없이 꽂혀있는 그런 커다란 방이었다. 바닥에는 진한 보라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고, 종이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한쪽 구석엔 아이보리색의 커다란 소파가 있었는데 그 소파 위에 누군가가 엎드린 채 책을 보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책을 받치고, 왼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리며 땅콩 접시를 찾고 있었다. 땅콩을 까먹으며 독서하는 것만큼 그가 좋아하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날씨도 좋았다.
톡 톡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와 유리창을 두들겼다. 그는 잠시 책을 보던 고개를 들어 그 새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는 왼손으로 크림색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끔 그렇게 새들이 찾아와 먹을걸 달라고 조르던 적이 있었다. 지금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아, 미안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톡 톡 톡
새는 다시 창문을 두들겼다. 그는 다시 새를 쳐다보았다.
톡 톡 톡 톡 톡
“집요하기는.”
그는 땅콩을 한 줌 쥐고 일어섰다. 얼른 쫓아버릴 생각이었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 그의 크림색 머리카락을 살짝 헝클어트렸다. 제비는 얌전하게 들어와 그에게 다리 한쪽을 내밀었다.
“어라 제비국이잖아?”
그는 제비다리에 돌돌 말린 채 묶여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황실?”
그는 제비의 다른 쪽 다리에 묶여있는 실을 보고 놀란 나머지 손에 쥐고 있던 땅콩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황급히 제비다리에 묶인 종이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제비는 바닥으로 내려가 그가 방금 떨어뜨린 땅콩 몇 알을 쪼다가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는 다급하게 방문을 열고 소리쳤다.
“체스! 마차 좀 준비해줘요. 갈 데가 생겼어요.”
그리고 하즈엘 카민 아소반은 대답을 들을 겨를도 없이 자신의 방을 향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어갔다. 그의 모습을 보고 ‘별 일’이라며 몇몇 하녀들이 수군거렸다.
리나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시링크스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맞추지 않은 채였다.
“몸이 많이 불편하신가 봐요?”
“아냐. 건강해. 겉보기만 이렇게 보이는 거야.”
시링크스의 질문에 리나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별반 대화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시링크스는 화제를 옮겼다.
“와아. 여긴 경치가 굉장히 좋네요. 마당도 잘 보이고.”
“겨울엔 추워.”
“…….”
시링크스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낮게 내리깔고 있었다.
“말 걸지 말까요?”
“아냐, 해줘.”
“그럼 중간에 끊지 마세요.”
“하지만 더 할 얘기도 없는걸.”
시링크스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에 바이올린이 있어요?”
시링크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어섰다.
“따라와.”
그녀는 앞장서서 그녀의 방을 떠났다. 시링크스는 그녀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뒤쫓았다. 이윽고 그들은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문 앞에 섰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덧문을 열어줘.”
시링크스는 그녀의 요구대로 덧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뿌옇게 흩날렸다.
“여긴 아버지도 잘 안 쓰시는 음악실이야. 예전엔 가끔씩 오긴 했지만 요즘 들어 통 안 왔었는데.”
그녀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짝 가 닿은 빛이 반짝거리는 피아노와 먼지 쌓인 악기 케이스들을 보았다.
“악기가…… 먼지에.”
“하나 줄까? 여긴 안 쓰는 악기들을 모아둔 거니까. 실은 쓰레기나 다름없어.”
그녀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하나 꺼냈다. 손수 먼지를 탁탁 털면서 조심스럽게 열어 시링크스에게 바이올린을 보여주었다. 쓰레기나 다름없다는 악기치곤 상당히 잘 만들어진 악기였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표면을 쳐다보다가 손으로 악기의 현을 지그시 눌러보았다. 그는 케이스에서 악기를 꺼내 활을 꺼내 몇 번을 켜보았다.
“뭐 하는 거야?”
리나가 그의 행동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조율하는 거예요. 오랫동안 안 써서 그런지 음색이 잘 안 맞네요.”
시링크스는 싱긋 웃었다.
“조율? 그런 것도 필요해?”
“네에. 보통 정기적으로 하는 건데요?”
리나는 처음 본다는 듯이 그의 손놀림을 뜯어보았다.
“연주할 수는 있는 거야?”
“조금은 할 줄 아니까 만지지 않을까요?”
“흐응.”
리나는 톡톡 튀는 듯한 가벼운 걸음걸이로 창가에 가서 섰다. 시링크스는 그 자리에 서서 악기의 조율을 마치고 멋들어진 모습으로 그녀를 향해 궁정식 절을 올렸다.
“그럼 마드모아젤. 한 곡 연주하겠습니다.”
그의 연주는 짧았다. 시링크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바이올린을 가지런히 케이스에 넣었다. 리나는 아무런 감상을 표하지 않았다.
“저녁…… 먹으러 갈까?”
리나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해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비교적 작은 테이블에 후작부인과 리나, 시링크스 세 사람이 둘러앉아 저녁을 들었다. 시링크스는 그에 대한 대접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다른 하인들은 모두 가족들의 식사를 마친 후에야 하는 것 같았는데 ―그는 집에 하인을 거느려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잘은 모른다―분명 노예로―지니스의 말에 의하면― 팔려온 자신은 심지어 그녀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인이 아닌 건가?' 시링크스는 포크로 애꿎은 완두콩을 이리저리 굴리며 괴롭혔다.
“너는 어디서 뭘 하던 아이니?”
후작부인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시링크스에게 물었다.
“아, 저어…….”
시링크스는 지금 자신의 사연을 늘어놓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가 금세 입을 다물었다. 분명 아까 그가 언뜻 보았던 후작부인과 지니스의 관계는 그냥 사람을 사고팔고 하는 사이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쨌든 얘기한다고 손해 볼 건 아니지.
“저는 본래 형과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그저 평범한 소년입니다. 아까 그분(그는 잠시 그 녀석이라고 할까? 하고 고민했다.)께서 절 납치를 하시는 바람에 여기에 있게 되었지만요.”
그는 자신의 사정을 매우 간단하게 줄여서 말했다.
“억울하다는 건가?”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물었다.
“뭐 그렇기도 하고요. 전 노예가 아니니까요.”
“아무도 너를 노예 취급하진 않았단다.”
그녀는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후작부인의 말을 듣는 순간 시링크스는 포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완두콩을 접시에서 밖으로 튕겨버렸다. 하지만 그는 완두콩이 튀어간 방향보다는 후작부인의 얼굴을 실례가 될 정도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지만 후작부인은 그의 무례한 행동에는 신경 쓰지 않고 와인을 살짝 입에 머금었다.
“아, 그렇군요.”
시링크스는 완두콩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서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수 없었기 때문에 포크를 손에서 내려두고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너를 데리러 누군가가 오겠지.”
후작부인은 식사를 마쳤다는 의미로 나이프와 포크를 그릇의 옆에 살짝 포개어 내려두었다. 그리고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시링크스를 쳐다보았다.
“부디 그때까지만 이라도 리나와 즐겁게 놀아주렴.”
커다란 검은 마차가 요란스럽게 덜컹덜컹 소리를 내면서 좁은 길을 달렸다. 마차를 이끄는 네 필의 말들은 마차가 가벼운 깃털이라도 되는 마냥 거침없이 이끌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마차와 말들에게 부딪히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는 멀쑥한 여관 앞에 멈춰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키만 머쓱하니 큰 노인이 한 명 내렸다. 마차 안에는 누군가가 있는지 그는 마차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차 안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마차 문을 닫았다. 그러자 마차는 올 때와 같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여관에 들어섰다. 여관 주인은 그를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비록 그 일대에서 마구간이 딸린 비교적 큰 여관이기는 했지만, 그 커다란 마차까지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지 앞으로 나섰다. 키가 큰 노인은 그에게 공손한 어투로 물었다.
“여기 가드리안가의 자제들이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