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밭길 생일파티 #13

#13

by Clare Kang

“으하암.”

시링크스가 기지개를 쭈욱 켜며 일어났다. 나무의자에 앉아 책상에 기대어 잤기 때문인지 온 몸이 뻐근했다.

“으음, 여기가 어디지.”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인지 금세 떠오르지는 않았다. 우리 집에 이렇게 책이 많았던가? 책장이 장렬하게 늘어서있는 방의 한쪽 책상에서 그는 졸린 듯한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방 밖이 왠지 소란스러웠다. '레스가 또 뭔가 깨버렸나.' 그는 두 눈을 끔뻑이며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불이 꺼진 초가 차갑게 식은 채로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그 옆에는 갈색 표지의 책이 몇 권 놓여있었다. 고급스러운 잉크와 깃펜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오래 쓰지 않았는지 먼지에 파묻힌 채 한쪽 구석에 물러나 있었다.

“아!”

여기가 어딘지 알았다. 시링크스는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주먹으로 쳤다. 그는 지난밤, 리나가 고집스럽게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잠들 때까지 그녀의 방에 붙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잠들고 나서 방으로 돌아가던 도중 길을 잃어버린 바람에 이리저리 찾다가 들어온 것이 바로 이 서재였다. 자신의 방을 찾기는 글렀고, 리나의 방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모르겠고 해서 결국은 책이나 볼까 하는 마음으로 그는 의자에 앉아 책을 몇 권인가 뒤적이다가 잠이 들었었다. 그는 자신이 보다만 책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덮었다. 덜컹하는 소리가 나면서 서재의 문이 열렸다.

“시스!”

자신을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려 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리나였다.

“왜 여기에 있어?”

리나는 반쯤은 화가 난 듯한 그리고 반쯤은 놀란 듯한 목소리로 시링크스를 향해 외쳤다.

“그게 어제 방을…….”

시링크스는 말을 맺지 못했다.

“리나!”

그는 서재 문가에서 쓰러진 리나를 향해 다급하게 뛰어갔다.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 리나가 힘겹게 숨 쉬고 있었다.

“누가……. 누가 좀 도와줘요!”

시링크스는 큰 소리로 외쳤다. 길게 굽은 어두운 복도 저 너머로 하녀들이 종종걸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검고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네 필의 건강한 말들이 거침없이 달리고 있어서인지 마차에 달린 바퀴는 덜컹덜컹 소리를 내면서 요란하게 달리고 있었다. 검은 마차에 음각으로 새겨진 날개 달린 사자가 유난히 밝은 초가을의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단 한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는 창밖으로 끊임없이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손에 닿을 듯, 닿을 듯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풍경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마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 끝에 걸린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도시와 멀어졌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길은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했다. 하지만 공기는 맑고 상쾌해서 깊이 들이마시면 속을 씻어내는 것 같은 개운함을 주었다.

“비록 예정에는 없던 일이지만 이런 식의 시골여행도 괜찮은데?”

그는 누군가에게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좀 괜찮은 것 같아요?”

시링크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리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미안. 여기가 어디지?”

“전에 그 방이에요.”

“그렇구나.”

리나는 눈을 감았다.

“어젯밤은 어딜 갔었어?”

“그게, 길을 잃어서…….”

리나는 몸을 뒤척이며 일어났다. 그와 함께 이마에 올려뒀던 물수건이 떨어졌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바보 같긴. 코딱지만 한 성에서 길을 잃을 건 또 뭐람.”

리나는 투덜투덜 거리며 일어났다.

“일어서도 괜찮아요?”

“응. 한두 번도 아닌걸.”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어섰다. 비틀. 그녀는 그 자리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괜찮다면서요.”

시링크스가 손을 내밀었다. 리나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그 손을 홱 당겼다.

“으앗!”

시링크스는 안전하게 넘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하하하.”

리나는 호쾌하게 웃었다. 시링크스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불평을 쏟았다.

“뭐예요. 남은 도와주려고 하는데.”

시링크스는 머릿속으로 레스휘나도 이렇게 까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리나를 쳐다보았다. 리나는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시링크스에게 손을 뻗었다. 시링크스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서 먼지를 툭툭 털었다.

“부탁이 있어.”

리나는 시링크스를 쳐다보며 웃었다. 시링크스는 옷을 털다 말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이야기를 좀 해줄래? 어젠 내 얘기를 해줬잖아.”

“어떤 걸 듣고 싶은데요?”

리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 것 까지 알려 줘야 해?”

시링크스는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눈을 이리저리 한참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신비주의로 밀고 나가면 안 될까요?”

“안 돼.”

리나는 단호하게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흠흠. 할 만한 얘기가 잘 없는데. 형이랑 여동생이랑 셋이서 살거든요.”

“부모님은 안 계셔? 아, 혹시 참견하는 거 싫어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잠시 계셨다고는 하는데 잘 기억이 안 나요. 꽤 오래전 일이니까요. 아, 참견하는 건 신경 쓰지 않아요. 뭐 어쨌든 형이 부모님처럼 자상하고 따뜻하고 또 어렸을 때부터 잘 보살펴줬으니 좀 죄송한 말일지 몰라도 부모님이 별로 그립진 않아요. 여동생도 별 탈 없이 자랐고.”

“여동생은 예뻐?”

리나가 불쑥 물었다.

“……. 뭐 본인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죠. 가족이라 객관적인 입장이 안 되네요.”

시링크스는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리나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생일이라서 오랜만에 온 가족이 외출 삼아 나왔달 까요. 사소한 일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리긴 했지만.”

“친구 생일? 그럼 늦지 않게 가야 하지 않아? 이렇게 시간을 지체해도 괜찮은 거야?”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이런 건 보통 예정에 넣지 않는다고요. 이제 쾌속 마차를 타고 달려야 간신히 시간을 맞출 정도라고요.”

시링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잡힌 거야? 보통 납치란 건 남자애들보다 여자애들을 선호한다고.”

“그게 말이죠…….”

시링크스는 말끝을 흐렸다. 리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그를 쳐다보았다. 시링크스는 바쁘게 눈알을 굴리며 생각하다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말 못 할 사정이에요.”

“에이 설마 내기에 졌다던가, 그런 거야?”

시링크스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맞췄구나. 그래 여동생의 부탁으로 여장을 했다던가? 하하, 그 여동생 만나보고 싶다.”

리나는 쾌활하게 웃었다.

“하지만 걱정이네. 친구 생일이 코앞이면. 우리 집은 쾌속 마차가 없어서 빨리 갈 수가 없어. 그건 이용료가 비싸기도 하고.”

리나는 중얼거렸다. 시링크스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뭐 늦어도 이해해주겠죠.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러 가는 거잖아. 빨리 가족들이 찾으러 왔으면 좋겠다.”

리나는 시링크스의 머리에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놓았다.

“으앗! 뭐예요!”

“술래잡기나 할까 해서. 물론 술래는 너야.”

“이 성에서 또 길을 잃으란 소리로 들리는 걸요.”

시링크스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리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그땐 내가 술래가 되면 되지.”

리나는 나비가 팔랑팔랑 나는 듯한 가벼운 걸음걸이로 어느새 문가에 서있었다.

“그럼 술래 씨. 길 안 잃어버리게 조심하세요. 열 세는 거 잊지 마시고요.”



레스휘나와 세르시우스는 이미 아소반 영지에 도착해있었다. 하즈엘의 집사인 체스의 도움을 받아 쾌속 마차를 타고 순식간에 온 것이다. 그들은 비록 시링크스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하즈엘이 직접 나선만큼 잘 해결되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인이 없음에도 불고하고 하즈엘의 저택은 여전히 부산하고 소란스러웠다. 주인의 생일잔치란 이들에게도 성대한 축제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이 꾀죄죄한 몰골로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하녀는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세르시우스 님. 레스휘나 님.”

하녀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들을 알아보는 것에 세르시우스가 놀라 레스휘나를 쳐다보았지만 레스휘나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일 뿐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주인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으니 그동안 쌓인 여로를 좀 푸셔요. 방은 지난번에 쓰시던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그녀는 그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는 개의치 않고 밝게 웃으며 앞장섰다. 세르시우스와 레스휘나는 서로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린 후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몇 번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익숙한 방에 들어서니 세르시우스는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레스휘나는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하하, 세스 오빠. 나 정말 이기적인가 봐.”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야?”

“아직 시스가 안전하다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막 편해지려고 해.”

세르시우스는 눈을 낮게 내리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어딘가 달리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스가 그렇게 된 것도 내 잘못인데.”

레스휘나는 몸을 뒤척여 세르시우스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게 등을 돌려 누웠다.

“괜찮아, 레스. 시스도 드래곤이니까.”

세르시우스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를 못 지킬 만큼 그 녀석은 약하지 않아.”



“아, 또 같은 방이다. 아니 아닌가.”

시링크스는 좁은 방을 휘 둘러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았다. 그의 옆을 지나치는 하녀 몇 명이 그를 보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리나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찾을 수 없었고 게다가 자신의 염려와 같이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후우. 이제 리나가 술래가 된 건 틀림없는 것 같은데.”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복도에 난 커다란 창을 통해 무심코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벌써 가을이 되어가는 듯 하늘은 높아지고 더욱 푸르러졌다. 하녀들은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몇 번이고 물어보았지만 자기들끼리 웃기만 할 뿐 그에게 어떤 지시도 도움도 주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물었지만 똑같은 반응만 자꾸 반복되자 그것조차 포기해 버렸다. 그는 지금 스스로가 어디에 있는지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멍하니 복도 한가운데 서있었다.

“저게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지?”

그는 문득 나란히 늘어져 있는 문들 사이에서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발견했다. 지난번 리나와 함께 왔던 음악실이었다.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전처럼은 아니지만 여전히 먼지가 잔뜩 쌓인 방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리나의 방에서 연주를 마친 후 갖다 놓은 바이올린 케이스가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바이올린 케이스를 살짝 훑으며 음악을 흥얼흥얼거렸다. 그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연한 분홍색의 빛이 점차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가며 그의 몸을 감쌌다. 시링크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계속 노래를 흥얼거렸다. 시링크스가 눈을 감자,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방이 눈앞에 펼쳐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까이 있는 사람. 어두움을 닮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물기에 촉촉이 젖어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도 젖어있었다. 그녀는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스휘나!”

시링크스는 눈을 떴다. 그의 몸을 휘감던 붉은빛은 마치 없었던 마냥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시스 님! 시스 님!”

시링크스는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얼른 복도로 뛰어나갔다. 발소리를 내며 복도를 가로질러 뛰어가던 하녀가 그를 발견했다.

“시스 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링크스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목욕을 마친 후 젖은 머리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며 말리고 있던 레스휘나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세르시우스를 쳐다보았다.

“세스 오빠?”

레스휘나의 목소리에 세르시우스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는 곧 레스휘나가 왜 자신을 놀란 목소리로 불렀는지 알게 되었다. 그의 몸은 붉은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스가 하즈를 만난 것 같아.”

세르시우스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스휘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세르시우스의 몸을 감싸던 붉은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녀는 그렇게 말을 하곤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시링크스는 고민의 여지없이 재빨리 문을 열었다.

“형!”

그는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새하얀 햇빛을 등지고 창가에 서있는 사람은 크림색 머리카락을 가볍게 휘날리고 있었다. 얼굴이 어두워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시링크스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가 오히려 표정이 더 밝아져서 그에게 달려가 힘껏 끌어안았다.

“하즈!”

“미안하다 형이 아니라서.”

하즈엘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 역시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지. 그건 가면서 얘기하자.”

하즈엘은 시링크스의 뺨에 가만히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그간 못 본새에 고생한 모양이구나. 살이 좀 빠졌네.”

“뭐 못 본새라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 사이에 다이어트를 했는지 네가 알게 뭐야.”

“천하의 시링크스가 다이어트라니 무슨 바다가 말라버릴 소리를.”

“뭐야,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

시링크스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걱정해주는 거다. 고맙다고 하진 못할 망정.”

하즈엘은 시링크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게다가 먼 길 달려 이렇게 직접 데리러 왔잖아. 그것도 내 생일에 말이지.”

“오오, 감사하옵니다. 하즈엘 카민 아소반 공.”

시링크스는 무릎을 꿇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하즈엘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하고 가자. 세스형이랑 레스가 많이 걱정하고 있을 거야.”

하즈엘이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창 밖에는 커다란 마차가 희미한 수은등에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쾌, 쾌속 마차. 역시 공작님.”

시링크스가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황제폐하를 제하고는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함부로 타고 다니는 것이 힘들다고 소문난 쾌속 마차를 직접 보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신기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검은색의 마차. 고작 네 필의 말들이 끌고 다니건만 건장한 말들 여덟 마리가 끌고 가는 마차보다 두 배 이상은 빨랐다. 먼 옛날의 마법이라고 전해지기만 할 뿐인 마차였다. 보통 어딘가에 꼭꼭 감춰두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은 타기는커녕 보는 것조차 힘들다고 하는 마차였다.

“새삼 존경스러운걸, 하즈.”

시링크스는 마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일전에 만난 이샤에게서 들은 하즈엘의 이야기가 좀 더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감탄은 직접 타보고 하라고.”

하즈엘은 문가로 발을 떼었다.

“아, 인사를 해야 하는데.”

시링크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후작부인에겐 이미 인사했어. 굳이 인사할 것 없어.”

시링크스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야.”

그리고 그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뭐가 또 남았는데 이 도마뱀.”

하즈엘은 그가 뛰어나간 문을 쳐다보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저녁 무렵, 어두워지고 있는 복도를 큰소리를 내며 뛰어가던 시링크스는 생각했다. '내가 어딜 가고 있는 거지?' 그는 급하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어둑해진 성을 밝히기 위해 촛대에 불을 붙이고 있는 하인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리나 아가씨는 어디 계세요?”

하인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아마 아가씨의 방에 계실 겁니다.”

시링크스는 그에게 감사하다고 말을 전한 뒤 다시 뛰어가려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하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이리로 가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시링크스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리나는 자신의 침대에 가만히 앉아 붉은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술래잡기는 멈춰버렸다. 괜히 멀리 가버렸나 봐. 조금만 도망갔으면 금방 찾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깜박였다. 조금씩 산 아래로 빨간 해가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헤어질 줄은 알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쉽네.”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갑작스러운 노크소리가 들렸다.

“리나, 시스예요!”

“들어와.”

리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시링크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리나의 얼굴이 노을을 닮아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저 이만 가야 할 것 같아요.”

“알아.”

리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시링크스는 침대 옆의 작은 의자를 끌어다 그녀의 침대 옆에 앉았다. 리나는 뭔가 싶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리나 아가씨. 실은 알려드릴 게 있어요.”

시링크스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이야?”

“저, 실은 아가씨에게만 알려드리는 건데요. 전 인간이 아니에요.”

리나는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시링크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쑥스러운지 시링크스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드래곤이에요.”

리나는 무언가가 ‘탁’하고 자신을 세게 때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반응이 나올 것을 짐작했는지 시링크스는 입술을 살짝 안쪽으로 말았다. 그리고 그는 소녀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쥐었다. 리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빼려고 했다. 그의 두 손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링크스는 그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시스, 이게…….”

그녀는 시링크스를 다그치려고 했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붉은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따뜻한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흘러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시링크스의 손을 꼭 쥐었다. 붉은빛이 사라지고 그의 손은 처음처럼 차가워졌지만 그녀는 손을 놓지 않았다.

“아가씨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시링크스는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제 이별 선물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노크소리가 들렸다. 하즈일 거야. 시링크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리고 잠깐 동안 리나를 쳐다보다가 일어섰다.

“잠깐만!”

리나가 시링크스의 옷깃을 붙잡았다. 시링크스가 멈칫하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리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름. 네 진짜 이름을 알려줘.”

시링크스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반 바퀴를 빙글 돌아 그녀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의 이름은 시링크스 가드리안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꾸벅 인사하고 방을 벗어났다. 여전히 시링크스의 키보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온 한 줌의 붉은 햇빛이 리나 로젠블럼의 뺨을 반짝반짝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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