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해가 희미하게 뜨고 있는 창밖을 하염없이 쳐다보던 하즈엘이 옆에 스러지듯 누워 자고 있는 시링크스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시스. 다왔어.”
시링크스는 졸린 듯이 눈을 비비면서 느릿하게 일어나 앉았다. 그는 연신 하품을 했다.
“아아, 이러 정말 빠르긴 하구나.”
그는 기지개를 쭈욱 켰다.
“어떠신가, 쾌속마차를 직접 타보신 경험은?”
“아아, 어지럽다.”
시링크스는 한마디로 표했다. 하즈엘은 그의 대답을 듣고 피식 웃었다. 시링크스는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켰다.
“남들은 돈 주고 구경하기도 힘든 건데 그런 식으로 말하기냐.”
“뭐 어때. 며칠 내내 타고 다니면 멀미날 지경이라고. 걱정 마. 누가 물어보면 아주 멋있었다고 대답해 줄게.”
시링크스는 혀를 쏙 내밀었다. 하즈엘이 킬킬 거렸다. 마차는 어느새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천천히 흔들거림이 멎고 마차가 섰다. 시종 소년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검은 마차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소년은 밝게 미소하며 하즈엘을 맞이했다.
“응, 랭스틴. 그동안 잘 있었니?”
하즈엘이 소년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은 기분 좋은지 어깨를 으쓱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하즈엘이 마차에서 내려서고 그 뒤를 시링크스가 따랐다.
“어서 오십시오, 시링크스 님.”
시종 소년이 시링크스도 반갑게 맞이했다. 시링크스는 그를 향해 한 번 웃어주고는 하즈엘의 옆으로 걸어갔다. 주황빛에서 점점 붉은색으로 물들어가는 햇빛이 웅장한 저택을 비추고 있었다.
“하즈네 집은 역시 크구나.”
“뭘 새삼 감탄하고 그래.”
“우리 집보다 크다는 건 굉장한 거니까.”
“제국의 공작님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별로 우습게 보는 건 아니지만…….”
시링크스가 말끝을 흐렸다. 하즈엘은 피식 웃으면서 시링크스의 어깨를 탁 쳤다.
“들어가자. 이제 저녁은 꽤 쌀쌀하다고.”
아직 지지 않은 새벽별이 여명에 물든 하늘에서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시스!”
시링크스와 하즈엘이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레스휘나가 시링크스에게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어디 갔었어. 미안해.”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레스휘나는 단 두 문장으로 말을 끝내버렸다. 하지만 시링크스는 이해하겠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울었어?”
“아냐.”
레스휘나가 꽉 끌어안았던 손을 풀며 부정했다. 밤하늘을 닮은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있다.
“울 것 같아.”
“안 울어.”
레스휘나는 다시 부정했다. 시링크스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웃었다.
“자자, 감동의 재회는 그 정도로 하시고 아침이나 먹을까요? 밤새 마차를 탔더니 배가 좀 고프네요.”
하즈엘이 배를 쓰다듬으며 실실 웃었다. 세르시우스가 이불을 한 쪽으로 곱게 밀며 입을 열었다.
“그래. 하즈 말 대로 하자. 나도 배고프다.”
그는 씨익 웃어보였다. 그의 하얀 얼굴이 왠지 기운 없어 보였다. 하즈엘은 어정어정 식당으로 발을 옮겼다. 남은 세 남매는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앞 다투어 식당을 향해 발을 옮겼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2층에 딸린 조그만 테라스의 난간에 시링크스가 기대듯 서 있었다. 해는 이미 높이 떠버렸다. 하늘은 어느 것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아져 있어서 가을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예정했던 것 보다 일찍 도착했네.”
후식으로 나온 체리를 입에 물고 웅얼웅얼 시링크스가 말했다. 시원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그거 알아, 시스?”
레스휘나가 그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시링크스는 대답대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렸을 때 말이야. 시스는 볼 때 마다 울고 있는 거 있지.”
“그건…….”
너 때문이잖아. 라는 뒷말을 꾹 삼키며 시링크스는 그녀를 보았다. 레스휘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시스는 너무 여려서 나한테 많이 뺏기고 그랬잖아. 시스는 너무 많이 울어서, 내 몫까지 전부 울어주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어.”
바람은 레스휘나의 머리카락도 슬금슬금 건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울지 않기로 했었어. 그 시간에 다른 뭔가를 하자고 생각했거든.”
레스휘나는 시링크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링크스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그녀를 마주보았다.
“시스를 지켜주자고 생각했어.”
이른 낙엽 하나가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푸른색의 테라스 난간에 닿을 듯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낙엽. 손을 대면 바스러질 것 같은.
“고맙긴 하지만…….”
시링크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닌 것 같아도 난 네 오빠거든.”
“하하, 그랬지.”
레스휘나도 가볍게 웃었다.
“1년밖에 차이 안 나서 자꾸 까먹어버려.”
둘은 유쾌하게 웃었다.
하즈엘의 생일로부터 하루 전. 해가 뉘엿뉘엿 가라앉고 있었다. 하즈엘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세 남매의 방에 머물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다.”
하즈엘은 진지한 표정으로 레스휘나에게 말했다. 레스휘나는 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손톱의 거스러미에 에 집중한 채 건성으로 하즈엘에게 대답했다.
“알았다니까.”
하즈엘은 거듭 그녀에게 당부했다. 레스휘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공작이라는 지위에 비해 소소한 파티를 즐기는 하즈엘이라 초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안면이 있는 사람이기에 굳이 이런 부탁들 할 필요는 없었다.
“왜 그러는데?”
듣다 못한 시링크스가 물었다. 하즈엘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좀 어려운 사람이 오거든.”
그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돌려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아하하. 주의해라, 레스. 난 방구석에나 박혀 있어야겠다.”
시링크스는 본래 사람이 많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하즈엘이 갖다 준 책이나 휘적휘적 넘기면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아니면 하즈엘이 잠시 틈을 내서 같이 체스를 둔다거나. 하지만 레스휘나와 세르시우스는 오히려 파티의 분위기를 즐기는 것을 선호했다.
“뭐, 레스야 밖에 나오면 얌전하니 괜찮을거야 하즈.”
세르시우스가 위로하듯 말했다. 하즈엘은 납득하겠다는 듯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손님을 맞이하러 가야하니 정말 잘 부탁해.”
그는 마지막까지 당부의 말을 강조하고는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아. 귀족이라는 것도 저렇게 바쁘구나.”
세르시우스가 넥타이를 매만지며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생일이라서 바빠 봤으면 좋겠다.”
시링크스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시스, 옷 안 갈아입어?”
레스휘나가 물었다. 시링크스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레스휘나가 불만스러운 듯 입을 삐죽 내밀며 그의 옆에 옷상자를 갖다 놓았다.
“하즈엘의 성의를 무시하면 안되지.”
레스휘나와 세르시우스는 이미 하즈엘이 준비해준 예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새하얀 새틴 드레스를 입은 레스휘나와 흰색 줄무늬에 파란 보석이 알알이 박힌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세르시우스. 그들은 누가 봐도 귀족의 자제가 아니라고 의심할 수 없을 만큼 깔끔했다. 물론 시링크스의 옷도 그들에 못지않게 고급스러울 것은 틀림없었다. 단지 그가 그것을 입어야 하지만.
“어차피 나가지도 않을 건데 말이지.”
“흐응. 그러셔.”
레스휘나는 발끝을 딱딱 바닥에 몇 번 부딪히고는 몸을 홱 돌렸다.
“뭐 상관없어. 세스 오빠랑 둘이서 신나게 놀다 올 거니까.”
그리고 레스휘나는 세르시우스와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 둘은 남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닮아있었다.
“잘 있어, 시스.”
레스휘나는 쏘아붙이듯 말하고 방을 나섰다. 세르시우스는 레스휘나에게 이끌려 가면서 시링크스를 쳐다보고 미소 지어 보였다. 시링크스도 잘 다녀오라는 의미로 미소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가을이 되긴 하는지, 해가 지는 속도가 좀 빨라진 것 같았다.
모든 축제는 당일보다 전야제가 멋진 법이었다. 그것은 하즈엘의 생일파티라고 다르지 않았다. 촛불을 잔뜩 켜서 밝힌 커다란 연회장은 촛불의 붉은빛과 저녁하늘의 푸른빛이 어우러져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갖가지 음식들이 테이블위에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고, 하즈엘의 생일을 축하할 겸 파티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그 테이블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웃고 떠들었다. 하즈엘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레스휘나와 세르시우스는 한 쪽 옆으로 나와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는 쪽이었다.
“저, 저어.”
수많은 보석들로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아직 앳되어 보이는 소녀가 주춤거리며 세르시우스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지, 아니면 파티장이 너무 시끄러웠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세르시우스의 귀에까지 닿지 못했다. 하지만 레스휘나는 그 소리를 들었는지 세르시우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세스 오라버님. 부르잖아요.”
세르시우스는 흠칫 하더니 미안한 표정으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부르셨어요, 아가씨?”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우물우물 말을 입속으로 삼켰다. 당연히 세르시우스는 그녀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네? 잘 안들려요.”
“춤 한번 추자는 거잖아요, 오라버님.”
레스휘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핀잔조로 내뱉었다. 세르시우스는 벙찐 표정이 되어 레스휘나와 소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말이세요?”
그의 물음에 소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시우스는 활짝 미소 지었다.
“영광입니다. 아름다운 아가씨.”
그는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소녀에게 내밀었다. 소녀는 주춤주춤 그 위에 자신의 왼손을 올렸다. 레스휘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수줍어 할 거면 그냥 말을 말던가.”
그리고 테이블위에 있는 오렌지주스 잔을 들어 홀짝였다. 왠지 이번 파티에는 몇 번 안면이 있었던 사람들보단, 잘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손님’ 때문인 걸까. 그녀는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한 쪽에서는 춤추는 사람들의 무리, 그리고 얘기하는 사람들의 무리.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잘 빼입고 나타난 귀족 아가씨들. 수많은 하인들. 하즈엘과, 세르시우스, 그리고 그와 춤추고 있는 이름 모르는 수줍음을 잘 타는 귀족 아가씨.
그리고 눈앞을 스치듯이 지나가는 사람. 훤칠한 키에 몸에 딱 맞는 하얀색 예복을 입은 금갈색 머리의 청년.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에 띠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주위로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그는 금세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레스휘나는 고개를 돌리며 오렌지주스를 다시 입에 머금었다.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